Bad $rs in GetInsertSQL. Connection or SQL invalid. Try using $connection->debug=true;

류시하 교수의 영화로 보는 신학담론 http://blog.kcmusa.org/ryusiha11
   2020년 8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전체보기
월별로 보는 포스트
자주 가는 링크
메모박스
새로운 포스트 새로운 덧글 새로운 트랙백
사이드바
본문 제목 . | 카테고리

▲영화 <완벽한 타인, 2018>

1984년 겨울 얼음이 꽁꽁 언 강원도 영랑 호수 위에서 아이들이 얼음낚시를 하기 위해 돌로 얼음에 구멍을 내기 위해 빙판을 깨기 시작합니다. 쾅쾅쾅 돌을 내리칩니다. 저러다 애들이 서 있는 얼음이 금이 가고 깨어져 빠질 것만 같습니다. 아마도 관객들은 저처럼 꼬마들이 물에 빠질 것 같은 걱정으로 잠깐 긴장을 했을 것입니다.

쾅 하고 풍덩 하는 소리가 났지만 다행히도 얼음은 갈라지지 않고 구멍만 내고 아이들은 그곳에서 물고기를 낚아 올립니다. 소년들이 얼음 위에서 낚시를 하며 호수 위에 떠 있는 달이 월식하는 것을 보다가, “호수가 바다니, 강이니” 하며 서로의 주장을 하며 다투는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합니다.

이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영화가 소년들이 장성해서 전개되는 이야기지만 이들이 벌거숭이 시절부터 오래 알고 지내온 허물없는 친구 사이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장면이 이 영화의 시작과 결말의 복선이라 봅니다. 얼음이 깨질 것만 같은 위기 속에 재미있게 낚시를 하고 함께 물고기를 구워 먹는 장면은 이 영화의 다행스러운 해피엔딩을 예측할 수 있게 만든 은유적인 한 장면입니다.

어린 시절 얼음낚시 놀이의 장면으로 시작해 모두 어른이 되어 서로는 물론이고 배우자끼리도 친밀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어 이들이 만납니다. 34년 전 그날처럼 월식을 맞아 석호 부부가 새 집으로 집들이를 하게 되면서 흥미 있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다들 사회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화목한 가정이 이루어 관계도 좋은 듯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행복해 보입니다. 그러나 모두 어느 정도 속사정이 있고 서로의 마음들이 달랐습니다.

속도위반으로 결혼한 성형외과 의사 석호와 교수인 예진 부부, 가부장적인 변호사인 태수와 전업주부인 수현 부부, 서로 굉장히 다정다감하고 잉꼬부부 티를 내는 수의사 세경과 사업가 준모 부부, 그리고 이혼 후 '민서'라는 애인을 둔 영배라는 친구가 혼자 집들이에 옵니다.

저녁 식탁에서 즐거운 추억을 나누며 대화를 하던 중 석호의 아내 예진이 게임을 제안합니다. “다들 핸드폰 올려봐.” 바로 각자의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통화 내용부터 문자와 이메일까지 모두 공유하자고 한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흔쾌히 게임을 시작하게 됩니다. 재미로 게임을 시작했지만 이들의 비밀이 핸드폰을 통해 들통 나면서 처음 게임을 제안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상치 못한 결말로 흘러갑니다. 그들이 알아 왔던 친구들의 모습에서 서로에게 보여주지 못한 모습들을 발견합니다.

엄마 아빠를 닮아 착한 아이로 포장했던 딸의 가방에 콘돔이 발견된 이유이며, 발기가 되지 않는다며 도와달라는 수의사 아내의 옛 남친의 문자에 놀란 남편과 친구들, 새로 알게 된 여친이 밤마다 보내오는 야한 사진, 그것을 숨기려고 핸드폰을 서로 바꾸는 친구… 그 때문에 더 일이 꼬여버리는 코믹한 이야기들을 영화는 담고 있습니다. 식탁에서 일어나는 대화와 핸드폰을 공유하면서 듣게 된 전화상에서 나누는 문자와 대화뿐인데 영화는 지루함 없이 아주 재미있게 전개됩니다.

남의 삶과 이야기에 대한 인간이 가진 관심과 호기심 때문인지 결국 그 호기심과 장난은 친구간의 오해와 부부간의 갈등을 야기해 위기로 몰고 갑니다. 알지 않고 그냥 지내면 더 좋았을 것을 알게 되면서 가정과 친구 사이가 금이 갈 것 같은 모양이 됩니다. 이야기는 영화의 첫 장면처럼 그들이 서 있는 빙판은 다행히 금이 가거나 깨어지지 않고 재미있는 식사 후 월식을 감상하고 끔찍한 상상 속의 하루를 보내고 각자의 집으로 갑니다. 차 안에서 그동안 충실하지 못했던 배우자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며 한편으로는 핸드폰에 날아온 문자 메시지를 아내 몰래 삭제하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오늘날 핸드폰은 과학이라는 인간에게 선물한 신의 선물이자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호기심이 가득한 비밀이 담겨있는 개인 세계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생활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아바타(AVATAR)가 있는 사람에게는 아바타가 실제로 사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사람은 누구나 3개의 나가 있다. 공적인 나, 개인의 나, 비밀의 나”라는 자막 내레이션을 통해 인간이 가진 여러 본성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인격이 있음을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보다 더 많은 나가 존재합니다. 작게는 두 개, 많게는 여섯 일곱일 수 있습니다. 일곱 개라고 언급하는 이유는 인간의 인격을 이루는 성격은 둘 아니면 하나로 보여지만 그 감정은 일곱 가지 정도로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표정과 말과 행동은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고 그것을 통일성 있도록 하는 것이 사람의 인격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과 행동 감정이 가능한 하나로 통일되도록 합니다. 그러지 않을 때 마음과 생각, 행동이 다를 때 이를 이중인격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얼굴은 무대이며, 그 마음은 무의식 속에 숨겨져 있던 인간의 본능과 욕구의 페르소나들이 인격이 되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대기실입니다. 생각이나 마음으로 수없이 연습한 말과 행동이 쉽게 무대로 나올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인격이 통제하기 때문입니다. 그 인격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인간의 사회적 본성입니다. 사회적 본성은 관계성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관계성이 바람직하게 되어 있지 않을 경우 사람에게 문제가 일어나기 쉽습니다. 사람들이 이중적인 행동을 하기 쉬울 때가,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경우이거나, 홀로 있어 누구도 나를 보지 않거나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입니다.

인간의 숨겨진 욕망 특히 인격의 그림자 욕구를 해결하고자 할 때 사람은 가면을 씁니다. 또는 나만의 공간으로 가게 됩니다. 오늘날 현대인에게는 과학의 신이 준 선물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과 판도라의 상자 같은 스마트 폰이 나만의 방의 비밀 열쇠입니다.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 방의 잠금장치를 여는 순간 어떤 이에게는 재앙이 될 수도 있는 괴물이 나올 수 있음을 이 영화가 경고합니다.

오늘날 현대 문화와 문명은 무의식의 세계에서도 거래하고 장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의식 속에 잠자고 있던 인간의 마음 속 욕망과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상품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상세계의 등장과 함께 인터넷 혁명을 기반으로 한 4차 산업이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가상세계의 공간과 그 세계를 이루는 인프라는 인간의 내면의 다양성을 만족시켜 주기에 가상 세계만큼 환상적이고 적합한 곳은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의 문화와 문명은 우리의 영혼을 그곳에서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악마처럼 우리의 영혼과 쾌락과 바꿀 수도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인격에 의해 통제되어 왔던 내면의 욕망과 그 내면의 욕구의 그림자가 그 공간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하며 관계를 맺고 발전시키면서, 인간의 욕구와 욕망이 충동적인 감정의 모습에 그쳤던 것이, 이제는 가상공간 속에서 또 다른 나의 인격을 만들어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완벽한 타인>은 이와 같은 세계가 삶이라는 물리적 세계에 나왔을 때 있을 수 있는 지극히 작은 문제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뷰티풀 마인드>에서 주인공의 가진 조현병처럼 오늘날 현대인들은 현대 문명의 조현병의 증세를 하나씩 가졌다고 봅니다. 문명과 문화가 만들어가는 삶의 특징은 다양성과 복잡성입니다.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모습이 한 공간에 동시에 존재할 때 우리는 그 곳을 세계라고 합니다. 또는 어떤 이에게는 그 세계가 엉망진창인 혼돈-카오스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삶을 정상적으로 행복하게 사는 비결 무엇일까요? 지혜자들은 단순함이라고 했고 그렇게 살았고 구도자들은 그들을 따르는 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하나의 인격으로 그 세상을 통일하든지 다른 세상을 정리해 버려야 합니다. 청소하듯 삶을 정리 정돈하는 과정이 날마다 우리의 삶 속에 있도록 해야 합니다. 칼빈이라는 신학자의 평생의 좌우명은 코람데오(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서’라고 합니다. 사람이 홀로 있을 때 내가 주체하지 못하는 또 다른 나가 마음에 등장해 욕망의 불춤을 출 때 그 마음의 무대 앞에 하나님께서 관람하고 계심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류시하(월드미션 대학 성서학 교수)

▲영화 A Beautiful Mind, 2001

19세기 사회를 묘사했다고 평해지는 <지킬박사와 하이드> 이 고전은 영화로 연극으로 많이 연출되며 클래식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와 같은 소설이 고전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마치 오늘날 영화가 흥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너도, 그리고 나도 같은 뭔가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뭔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사람 안에 있는 나아가 사회 안에 있는 선과 악의 공존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학적인 측면을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한 인간이 가지는 속성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특징을 잘 모르고 간과하다가 그러한 증상이 극단적으로 될 때 한 번 생각해 보거나 혹은 그러한 증상을 가진 사람을 이상인으로 취급하고 그 사람을 병적으로 몰아갑니다.

죄와 선이 공존하는 실제로서의 인간, 광인의 마음과 지극히 정상인의 마음이 공존하는 현상은 우리는 모두 가지고 실제입니다. 성경에서 기록된 바울의 고백에서 우리는 쉽게 이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 21-24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의 분열적 현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죄가 힘을 얻어 극단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때까지 그것을 모르거나 그 존재를 알지만 잊어버립니다. 이것은 귀신들림과는 다른 것입니다. 귀신은 외부의 다른 존재가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죄와 귀신을 악에서 나온 같은 실제로 본다면 우리들의 이해는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과 함께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극단적인 실제의 존재성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선과 악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죽을 수도 다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갈등을 다룰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힌트를 주는 영화가 있습니다.

천재 수학자 존 낸시의 실제 역사적인 인물을 극화하여 만든 영화 <뷰티풀 마인드, 2001>라는 영화입니다. 실제 ‘존 내시’는 게임이론에 대한 새로운 분석으로 제2의 아인슈타인이라 불린 인물이지만, 50년 동안 정신분열 조현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겨내고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 영화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살아냅니다.

주인공은 천재성으로 MIT 교수가 되고, 그리고 국가 정보기관에 협조하기도 했는데, 영화상에서도 현실과 공상 환상이 구별 안 될 정도로 영화 같은 이야기가 그의 삶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러나 존은 그러한 삶 속에서 점점 황폐해져 가는 자신의 영혼과 그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아내 알리샤의 사랑에 의지합니다. 그들은 함께 존을 그 환상 속에서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존 내시는 자신이 보는 세계 속의 사람들, 조카 마시와 친구 찰스가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먹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이 환상 속 인물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실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시의 환상 속 인물들은 계속 나타납니다.

현실과 환상 가운데 고통 받지만 내시는 가상의 인격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살아갑니다. 보기도 하고 이야기하는 친구처럼 지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환상 속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거나 대화를 하지는 않습니다. 두 공간을 인정하고 인식하면서 두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정상적인 삶을 만들어 갑니다. 자신을 앎으로 자신의 다른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시는 그의 이상 증상을 극복해서 존경받는 학자로 은퇴하게 됩니다. 동료 교수들은 최고의 학자로서 존경을 표하는 전통으로, 그리고 정말 존경한다는 마음으로 은퇴하는 내시에게 자신들의 만년필을 선물합니다. 이렇게 영화는 끝이 납니다.

악과 선의 공존은 인류가 종말하기 전까지 이 땅과 인간의 마음 속에 끝까지 공존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를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not yet)으로 말합니다. 이 한 마디는 정의하기에는 어렵고 심오한 개념이지만, 성서학자들은 인간을 하나님의 나라의 “이미”와 “아직” 사이에 존재하는 실존으로 설명합니다. 빛과 그림자처럼 선과 악이라는 이 두 영역은 항상 다투듯 우리의 삶을 침노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역동적이고 그 역동성이 생명인가 봅니다.

선과 악, 선한 존재로서의 회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착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삶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삶을 이어가며 결국 그 나라를 누리며 맛보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악/죄를 다스리려야 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타락했을 때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숨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을 찾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이 말씀은 죄를 완전히 없애버릴 수 없다면, 다스리라는 말입니다. 공중을 나는 새처럼 우리의 악하고 부패하고 음탕한 생각들이 우리들의 마음속을 날아다닐 때, 날아가는 새를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그 새가 우리의 머리에,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둥지를 틀지 않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일반적으로 우리는 공격적인 방법에 익숙합니다. 싸우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하려고 많은 구도자들이 절제도 하고 고행을 하기도 합니다. 지킬 박사나 내시가 겪은 증상을 다루는 정신과 의사처럼 약물로 역동적인 비정상 행동을 죽입니다. 이와 같은 처방은 방사선 항암치료처럼 건강한 세포까지 약하게 만들고, 죽기까지 하게 해서, 정신병동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현상처럼 멍청해지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바로 어떻게 보면 창세기 4장 7절의 말씀처럼 죄가 문 앞에서 있지만 그 문을 넘어 오지 않도록 다스리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그 존재를 인정하지만, 나의 주변의 삶을 넘어 나의 깊은 삶에, 그리고 다른 사람과 나의 관계에 끼어 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할까요, 영화에서처럼? 가능합니다. 영화가 사실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인간이 피조물로서의 사람됨의 본성을 인정하는 것이 회복과 변화 출발점입니다. 자신의 생명과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다면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공존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약함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약함을 인정하고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말씀합니다. 진리란 사실과 원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상의 원리와 그리고 영적인 원리만이 아니라 사실(Facts)을 알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알고 그것을 인정할 때, 그 때문에 야기되는 문제와 사실을 직시할 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앞서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확산되어가는 현대 아바타즘(Avatarism)이라는 문화 속에서 현대인들은 아바타와 같은 나의 인격이 새로운 세계에서 공존함을 인식하고 인정할 때라고 봅니다. <뷰티풀 마인드>에서 존 내시가 환상 속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던 방법처럼 두 공간을 인정하고 인식하면서 두 공간을 독립시켜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봅니다.


류시하(월드미션 대학 성서학 교수)

▲Avatar, 2009 포스터

한국 가요 방송에서 복면가왕이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가면을 쓰고 자신의 정체를 가리고 단지 노래 실력으로만 평가를 받는 노래경연 프로인데 잠깐 특별 프로그램이었다가 시청자들의 호응과 반응이 너무 좋아 정규 프로로 자리를 잡은 예능 프로그램입니다. 경연이 끝난 후 참가자들은 인터뷰에서 가면을 쓰자 자기도 모르는 자신감이 생겨서 노래를 더 잘 부를 수 있었다고, 그리고 가면을 통해서 자신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답합니다. 왜 그럴까요? 가면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가면은 일류가 만든 하나의 문명입니다. 가면은 21세기에서 아바타라는 모습으로 진화되어 인간으로 삶에 깊숙이, 그리고 독자적인 공간을 가지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바타는 현대 인류의 삶의 모습 변화에 직접적인 관계를 하고 있으며, 영화에 담겨 표현되기 시작했습니다. “가면”과 “아바타”는 인간 내면의 다양한 인격적 존재의 표현이라고 봅니다. 나아가 전자매체의 발전, 인터넷 문명의 발전으로 가상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고, 가면이 아닌 그 세계의 인격적 존재로 아바타를 등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현대인의 세계관과 문화의 스펙트럼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인간 인격의 다중성은 창조주께서 연출하는 데오드라마에 어떤 역할도 맡을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창조된 것 같습니다.

“아바타” 온라인상에서 자신의 실제 이름을 대신해서 사용하는 가상의 인물을 “아바타”라고 합니다.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세대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용어이지만 이 용어가 일반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아마도 이 영화 때문일 것 같습니다. <아바타 Avatar, 2009>는 <터미네이터>, <타이타닉>의 감독으로 유명한 제임스 캐머런의 SF영화로 역대 미국, 한국, 세계 전역에서 2009년 개봉 당시 최고의 흥행기록을 갱신하며 천문학적 수익을 올린 영화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도 외국영화로서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단순한 스토리이지만 입체적인 3D 영상미의 열풍을 몰고 온 영화라고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영화의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2150년대 미래를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인류는 환경과 자원의 한계를 해결하고자 우주 탐사를 해왔고 그 결과 판도라라는 행성을 발견했습니다. 판도라는 거대 암석이 신비하게 공중에 부유하고, 커다란 나무들과 숲이 밀림을 이루고 있는 신비롭고 자원이 풍부한 지구의 고생대와 너무나 유사한 행성입니다. 더구나 당시 인류가 개발한 언옵타늄이라는 귀중한 광물자원도 풍부한 행성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대기가 인간에게 해로운 독성을 띠고 있다는 점입니다. 귀중한 원소와 자원을 채굴하기 위해 인간은 판도라 행성의 토착민 나비(Na’vi)족과 접촉하고자 합니다. 이들과 더 잘 교류하기 위해 인간과 나비족의 DNA를 복합해서 만든 나비족과 유사한 복제 인간을 만드는데, 바로 이 복제인간이 아바타입니다. 지구에서 DNA를 나눈 사람이 뇌파로 조종하는 말 그대로 행동하고 말하는 손오공이나 홍길동 분신(分身)과 같은 존재로 사는 사람이 아바타(Avatar)입니다.

아바타는 나비족과 매우 흡사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나비족의 거부감을 완화하고 판도라의 거친 환경에서 제대로 활동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나비족 얼굴색과 모습은 비슷하나 손가락 개수나 코의 모양이 다릅니다. 타 행성에 거주하면서 지구상의 특정한 사람을 대신하는 존재입니다. 본래의 목적은 보호 장비 없이 현지에서 채굴작업이 가능한 인원을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탐사 임무나 원주민 나비족과의 외교 및 정탐 위해 먼저 하나를 만들어 행성에 보냅니다. 그래서 ‘톰 설리’라는 과학자의 아바타를 만들었는데 톰 설리가 죽자 쌍둥이 동생이 형을 대신해서 나비족 아바타를 조정하도록 선택됩니다.

주인공 제이크 설리는 하반신 마비로 과학자였던 죽은 일란성 쌍둥이 형의 아바타를 쓰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판도라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나비족과 접촉을 하게 된 제이크는 오마티카야 부족의 여 전사 네이티리를 만나고 사랑하게 됩니다. 인간의 대표로 그들과 협조와 공조를 해나가려 하지만 부족의 반대에 부딪힙니다. 설득보다는 결국 인간의 욕심으로 파괴와 무계획적인 개발을 시작합니다. 이를 저지하려는 부족들에게는 무자비한 공격을 퍼붓습니다. 결국 인간들과 나비족은 전쟁이 일어나고 제이크 아바타는 네이티리와 함께 중재하려고 하지만 실패합니다. 그래서 아바타 제이크는 멸망 직전에 있는 나비족을 도와 인간들하고 맞서 싸워 승리를 쟁취한 후, 부족의 의식을 통해 정신이 완전히 아바타로 옮겨져, 완전히 나비족이 됩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행성의 이름이 판도라인 이유를 생각하게 하는 결말입니다. 신의 선물 판도라의 호리병의 뚜껑을 연 인간에게는 수많은 재앙이 쏟아져 나오지만, 그 안에 소망이 남겨져있었기에, 인간은 멸망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이야기처럼 판도라 행성에 남겨진 제이크의 아바타가 결국 판도라 행성과 인류의 소망이 되어 모두를 살렸다는 메시지입니다.

왜 이 영화가 유행했을까요? 여러 가지 흥행요소가 있지만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수 있는 점은 제목에서와 같이 “아바타”라는 개념의 대중적인 이해와 공감입니다. 아바타의 개념은 21세기 이후 4차산업화의 과정 중 인프라로 구축되기 시작한 가상세계 즉, 온라인 세계가 대중화를 통해 가상공간의 삶이 독립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SF영화가 흥행할 수 있는 이유는 허무맹랑한 내용의 전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개연성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상상을 펼쳐나갔기 때문입니다.

‘아바타 정말 이것이 가능한가?’ ‘아바타’ 이 용어는 이미 온라인 공간에서는 또 다른 나로 나를 대신한 다른 인격체로 존재하는 실체이고, 현대인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용어이며 기술입니다. 아바타는 새 이름과 내가 꾸민 가상공간의 주인공입니다. 실체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이버 공간에서는 실제이며, 실체가 있는 존재입니다. 현실의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가상의 아바타가 과감하게 실행하는 것입니다. 온라인상에서는 말이나 영상 등으로 자기를 표현합니다. 이제는 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으로 활동합니다. 온라인상에서 가면과 같은 존재라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변경하고 모습도 바꿀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말과 태도가 그 사람을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말과 태도가 자신의 감춘 자아나 꾸며진 자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의 아바타의 인격은 자기 자신의 일부입니다. 현실 세계에서 표현이 되지 않았을 뿐이지 그래서 이 영화에서도 외계 행성에 살 수 있는 아바타를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아바타를 만들 때부터 결정된다는 설정을 하고 있습니다. 아바타가 로봇이 아니라 인격화 된 다른 나 자신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지만 그 아바타는 본질적으로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그 아바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을 죽은 형과 같은 유전자를 가진 쌍둥이 동생으로 설정한 것이라 봅니다.

이런 아바타가 온라인상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의 사회적인 삶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대표자라는 개념입니다. 아주 현실적인 예로 내가 지지하는 국회의원이라든지, 대통령 후보자라든지, 영화의 주인공 스타나 연예인 아이돌이 그 예라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생각과 마음이 통하는 인물에게 무조건적인 지지를 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아바타를 사실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정치적으로는 노사모, 박사모라든지, 아이돌 팬클럽이라든지, 이들은 자신의 지지자들 또는 대표자들이 옳고 그르냐를 떠나서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신을 대신하는 아바타 역할을 하는 대리자가 욕을 먹는다든지 공격을 받게 되면 이치를 따지지 않고 보호하고 방어하려는 성향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자신이 원하지만 할 수 없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보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대표하는 대리자를 아바타로 삼은 사람은 결국 객관성을 잃은 사람입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아바타를 통해서 현실의 여건을 극복해서 다른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바타의 실패가 자신의 실패로 투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내가 지지하는 아바타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인물이냐가 그 사람의 어떤 인격과 잠재적 성향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취향대로 내가 어떤 아바타를 선택하겠지만 때론 여러 아바타 가운데 내가 잘 알지 못했던 어떤 아바타가 나를 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화에서도 야생말과 같은 하늘을 나는 특별한 날개 달린 공룡과 주인공의 교감을 통해 선택하고 훈련하는 것을 보여주는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바타가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마스크처럼 융의 정신분석학에서 설명하는, 내가 가지고 있지만 모르는 페르소나의 하나라 볼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아바타 – 또는 어떤 인물을 나의 아이돌로 택하느냐에 따라 나의 모습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아바타가 나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누가 나의 아바타냐, 롤 모델이냐가 그 사람의 미래의 나를 결정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이러한 유사한 성격을 가진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대상으로서, 신으로서의 우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나를 지배하게 하지 말라는 뜻으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바타는 곧 종교적이고 수동적인 우상숭배와 같은 아이돌은 아닙니다. 좀 더 적극적인 나 자신이 투영된 우상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우상은 그 우상이 파괴되면 끝이 납니다. 그러나 아바타는 나의 선택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다른 나이기 때문에 그 우상과 같은 아바타가 파괴된다고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아바타 안에 담긴 나 자신이 파괴되어야 사라집니다. 그래서 아바타는 때론 우상보다 더 악한 적그리스도와 같은 죄인의 괴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적그리스도와 같은 자아의 아바타에서 자신을 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아가 아니라 죄에 속한 자아의 아바타를 죽이라는 뜻이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아바타가 로봇이 아니라 인격화 된 다른 나 자신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지만, 그 아바타는 본질적으로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 아바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화에서 아바타의 실제 주인인 주인공의 형의 아바타를 조정하기 위해서 영화는 형과 같은 유전자를 가진 쌍둥이 동생을 주인공으로 설정합니다.

그러나 여기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인격조차도 복제될 수 있다는 가정이 숨겨져 있습니다. 인격과 인성의 복제 사실, 이것은 과학의 영역 이전에 교육을 통해서 인간은 그것을 시도했습니다. 인격을 복제한다는 말이 좀 과하긴 하지만 그것은 인격을 발전시켜 이상적인 모습으로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라는 것을 만들어 사회가 필요한 인성과 자질과 기술을 가진 인재를 양성했습니다. 인재라는 말이 뜻하듯이 사람 자원이라는 뜻입니다. 자원이란 공통적인 요소와 특성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사회가 필요한 요소를 사람들에게 심어 넣는 과정을 교육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창조주는 인간을 개별적으로 특별하게 창조하셨지만 또한 동일한 요소와 특성을 담을 수 있도록 teachable 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인간의 상상력에서만이 아니라 성경의 계시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인간은 학습과 교육을 통해서 닮아가는 능력과 그것을 통해서 사회적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인간과 다른 자연 피조물과 다른 점이라 봅니다.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을 상상하고 모습을 만들어내기를 원하는 욕망과 능력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입니다. 자기 복사를 통해서 확장성의 욕구는 생산의 욕구 내면에 담긴 인간의 본능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봅니다. 여성이 출산을 통해 탄생한 자녀의 모습 그 자체에서 2세를 통한 자기 확장성의 모습으로 본다면, 남성은 자신의 뜻과 생각을 자녀들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확장성을 이루어나가기를 원하는 성향이 여성보다 더 강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 가상의 세계에 보여진 욕구를 하나의 모습화 된 아바타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아바타는 이러한 욕구가 현실 세계와 링크되어 있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바타> 영화에서처럼 현실세계와 실존이 연계되어 아바타의 생존과 실존이 아바타의 소유인의 존재에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오늘날 사회에서도 가상공간 온라인과 웹상에서 아바타의 불법적 행동을 사회는 아바타에게만이 아니라 그 실제 주인에게 책임을 묻을 묻습니다.

한국 대선 정치활동 과정에서 등장한 아바타 “혜경궁 김씨”의 존재가 트윗과 카카오상의 불법적 비도덕적 표현에 대해 그 실제 주인의 누구인가를 두고 정치인들이 곤혹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명예훼손, 선거법 위반과 같은 실정법정 소송이 제기된 이유도 그 한 단면입니다. 아바타 뒤에 자신의 실체를 숨길 수 있기에 사람은 용기있게 행동하고 말하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면이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보여지는 모습의 기능에 목적과 의미가 있다면, 아바타는 가면과 유사한 면도 있지만 아바타는 독자적인 인격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가상공간에서 독립된 인격체로서 존재하지만 실제 사람의 통제와 지시를 받기 때문에 인간이 지니는 본성은 다릅니다. 실제 주인의 본능과 인격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무의식 세계를 포현하거나 학습된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는 경향이 더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바타는 인간의 본성과 속성의 그림자의 영역의 자신을 표현하는 완벽한 존재라 볼 수 있습니다.


류시하(월드미션 대학 성서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