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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qoim님의 블로그 http://blog.kcmusa.org/yeqoim
순전한 복음 회복을 위한 예레미야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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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씀하는 창조주는 사랑이시다. 그 분은 알라와 다르다. 이슬람의 신관에 의하면 알라는 창조만 해 놓고 멀리 떠나있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을 위해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분이다. 그 분의 창조주성은 부성과 모성을 더하고 거기에 무한대를 곱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분의 창조주성은 피조물을 위해 죽기까지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은 “공중 나는 새를 먹이신다. 들에 핀 백합화도 입히신다”, “선인과 악인에게 해와 비를 주신다.” 모든 피조물은 그 분을 인해서만 숨 쉬고 기동한다. 창조주께서 그 만드신 태양을 거두어 가신다면, 달을 거두어 가신다면, 공기를 거두어 가신다면, 바다를 말리신다면 살아남을 피조물이 무엇이겠는가?

다시 말해 피조물성이란 철저하게 창조주께 매달려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는 절대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생존할 수 없다. 공기를 만들 수 있는가? 태양을 만들 수 있는가? 암 하나도 못 고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도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키 한자도 키우지 못한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염려’한다. 피조물이 피조물성을 상실한 분명한 증거가 바로 ‘염려’다. 그것도 내일에 대한 염려다. 성경은 내일에 대한 염려를 금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창조주의 영역이지 피조물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일을 주시는 분은 창조주시다. 창조주께서 내일을 주시면 내일에 필요한 것들도 함께 주신다.

창조의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그 분이 창조하신 권위의 질서는 최초

하나님

인간

만물

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자리를 이탈한 것이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본 것이다. 유다서 6절에는 천사 타락의 본질도 위치 이탈이다. “And angels who did not keep their own domain, but abandoned their proper abode, He has kept in eternal bonds under darkness for the judgment of the great day.” 이것은 이사야 14장 12절 이하 ‘계명성’의 타락이나 에스겔 28장 2절 이하 ‘두로 왕’의 타락에서도 같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사탄의 유혹을 받은 인간이 자신의 자리를 이탈했을 때 ‘하나님 같이’는 되었지만 하나님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이 다스려야 할 피조물을 섬기게 되었다. 그래서 타락 후 권위 질서는

하나님

만물

인간

이 되었다. 사실은 권위 ‘질서’라고 표현하면 안 된다. ‘질서’가 아니라 혼란이 온 것이다. 인간이 호랑이나 곰을 섬기고 오래된 나무에게 기도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 혼란은 예수님이 오셔서 교회의 그림(에베소서 1:21-24)을 만드심으로 회복되었다. 교회의 그림은

예수님

교회

만물

이다. 그런데 이 만물 속에는 불신자도 포함된다. 그래서 두 번째가 교회인 것이다. 교회에 들지 못한 자들은 교회의 통치를 받는다. 그래서 다시금 권위 질서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지상의 교회는 여전히 하나님같이 된 자리에서 내려오지 못한다. 그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 성화다. 그리고 교회, 곧 하나님 백성 된 자들이 평생을 싸워야 할 유일한 죄성은 바로 피조물이 자리를 이탈해서 하나님같이 된 그것이다.

그래서 피조물에게 있어 거룩은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온 올바른 모습은 창조주께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초에 인간에게 주셨던 만물을 통치하는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새는 창공을 날고 물고기는 강과 바다를 헤엄친다. 열대지방의 동물들은 열대지방의 생태계를 지킨다. 심지어 곰팡이 균 같은 세균도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지키기 위해 역할을 감당한다. 염려하지 않고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지도 않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본능으로 넣어주신 기능들로 세상을 지킨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는 필요가 없거나 존재 의미가 없는 것이 없다.

인간의 피조물성은 다른 피조물들과 같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지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른 피조물들을 돌보며 그들의 생육과 번성을 도와야 한다. 또 한 가지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된다. 마치 새가 하루 창공을 날며 먹이를 구하다가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단순하게 창조주께서 주신 역할만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무슨 거창한 일을 하려 하지 말라. 맡겨지고 주어진 것만 하라.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리를 이탈하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창공을 날아야 할 독수리가, “나는 지금까지 창공을 날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다. 좀 더 큰 비전을 가져 보자. 바다에서도 헤엄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 창공을 멋있게 날아다니는 내가 바다에서 헤엄까지 친다면 창조주께 얼마나 영광이랴?”고 생각했다면 그것이 바로 자리를 이탈한 것이다. 창조주께서 그것을 원하셨다면 창조 시에 독수리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셨을 것이다. 독수리는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이러한 일을 인간은 한다.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을 하면서 그것을 ‘비전’이라고 부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한다. 그것을 부추기는 교회와 목사들이 있다. 죄를 부추기는 것이다. 거창한 일을 할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하신다. 누구나 바울이 될 수 없고 베드로가 될 수 없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다섯 달란트를 주신 사람이 있다. 그냥 주신대로 하루하루를 피조물로서 경건하고 신실하게 살라. 그것이 피조물성이고 그 피조물성을 회복하는 것이 거룩이다.

피조물성의 요구는 교회론에서도 나타난다. 이미 보았듯이 교회의 가장 대표적 이미지는 한 몸이다. 본질적으로 몸은 분열되거나 다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병의 증상이다. 자가 면역 질환이라는 것이 있다. 외부의 병균으로부터 몸을 보호해야 할 면역세포가 자신의 몸을 공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몸이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에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 분열과 다툼이 있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2장 21절에서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한다. 교회 안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빌립보 교회에도 분열과 다툼이 있었다.

원인은 단 한 가지, 각각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아직 피조물성이 회복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아직 성화가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상황은 역사가 존속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성화의 완성은 육신으로는 불가능하다. 계속 진행형일 뿐이다. 그러나 성화를 시작했다는 것은 완성을 보장한다. 시작하신 분이 성령님이기 때문에 결코 중도에 포기되지 않는다.

그렇게 거룩해진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임마누엘 하신다. 물론 여기에서도 이미와 아직의 긴장이 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거룩한 무리가 되었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 몸을 성전 삼고 와 계신다. 임마누엘이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이 성화의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이미 보았던 요한 계시록 21장 3절에 묘사된다. “I heard a loud voice from the throne, saying, “Behold, the tabernacle of God is among men, and He will dwell among them, and they shall be His people, and God Himself will be among them.” 7절에서도 같은 말씀이 있다. “I will be his God and he will be My son.” 이것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물줄기다. 덧붙여 이야기하면, 피조물성은 구원론과도 연관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피조물성의 회복은 구원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피조물은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얻을 수 없는 존재다. 모든 것이 창조주로부터 온다. 더구나 타락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인간이 스스로 의를 얻어서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펠라기우스와 그 아류들은 이 피조물성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다. 피조물성을 모른다는 것은 성경을 모른다는 것이다. 피조물성에 비추어 봤을 때 그들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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