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rs in GetInsertSQL. Connection or SQL invalid. Try using $connection->debug=true;

yeqoim님의 블로그 http://blog.kcmusa.org/yeqoim
순전한 복음 회복을 위한 예레미야의 절규
링크
   2020년 7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전체보기
월별로 보는 포스트
메모박스
번영신학 만큼이나 위험한 가르침이 ‘금욕주의’다. 청교도 일부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세상은 악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백성은 세상 즐거움을 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오락을 금했다. 극장에 가는 것도 금했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부부 관계도 즐거움이 아닌 번성을 위해서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전 글에서도 밝혔지만 이것은 일찍이 어거스틴이 주장했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젊은 시절 방탕 때문에 성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회심하고 나서 성의 즐거움을 죄악시 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잘못된 금욕주의와 청빈한 삶을 구별하지 못한다. 탐욕스러운 모습으로 사치를 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덕목이 아니다. 우리는 청빈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맞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사치하면 안 된다. 사치란 쓸데없는 허영을 의미한다. 꼭 필요하다면 아무리 많은 돈을 써도 비난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크리스천들이 금욕주의와 청빈한 삶을 구별하지 못해 금욕적 삶을 억지로 추구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무소유가 아니다. 이 땅에서의 정상적인 삶이다. 그런데 금욕, 내핍을 덕목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성경적 균형 감각이 없는 소치다.

종교 개혁의 금욕 사상은, 사실 로마 카톨릭에 대한 반발로 나온 사상이었다. 중세의 카톨릭은 호화로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소박한 교회를 지었다. 사치하지 않고 탐욕과 탐식을 멀리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모든 세상적 즐거움을 금하는 금욕주의는 아니었다. 하나님 주신 것들을 감사함으로 즐겼다. 물론 오락도 즐겼다. 어떤 문헌에 의하면 칼빈은 사례비로 포도주를 받았다. 루터는 볼링 마니아로서 근대 볼링의 기초를 구축했다고 한다.

인간 사회에는 언제나 양극단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극단은 대부분 잘못된다. 바울시대에도, 어차피 이단이기는 하지만, 영지주의 일파에서 극단적 금욕주의를 주장했다. 거기에 대해 바울은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 4:3)고 반박한다.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은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 균형을 잃은 극단적 금욕주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현저하게 짓밟는 것이다. 그들이 기독교를 빙자해도, 청교도적 삶을 산다 해도 그들은 선하신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다.

바울이 말씀한 ‘식물’에 관해 생각해 보자. 인간에게 먹거리는 무한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다양하다. 고기, 생선, 과일, 곡식, 뿌리, 나물, 차(tea), 견과류 등등. 그리고 그 각각의 경우도 엄청나게 다양하다. 과일의 경우 사과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배도 있고 복숭아도 있고 망고도 있고 바나나도 있다. 고기, 생선, 곡식, 나물, 차, 견과류 등등도 그 종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선하신 창조주께서 그 피조물들의 즐거움을 위해서 만들어 주신 것이다. 자연 경관은 또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운가? 나무나 꽃 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아름다운가? 바울은 이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라고 한다. 왜 금욕해야 하는가? 맛있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호의를 왜 거절하고 그 맛을 즐기는 것을 거부하는가? 물론 탐식은 안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굶고 있는데 자신만 배불려서도 안 된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열왕기상 4장 22절, 23절은 솔로몬의 하루 식량을 이렇게 말한다. “솔로몬의 일일 분 식물은 가는 밀가루가 삼십 석이요 굵은 밀가루가 육십 석이요 살찐 소가 열이요 초장의 소가 스물이요 양이 일백이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찐 새들이었더라.” 물론 이 모든 것을 솔로몬 혼자 먹은 것은 아니다. 당시에는 왕의 상에서 함께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어떻게 보아도 이 표현 속에 금욕은 없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이어지는 말씀 속에 솔로몬의 이러한 ‘누림’을 비난하는 글도 없다. 오히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말한다.

솔로몬의 ‘누림’이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모든 백성들이 함께 누렸기 때문이다. 솔로몬 시대에는 은이 돌같이 흔했다. 열왕기상 4장 25절은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고 보고한다. 백성들은 굶고 있는데 왕이 저렇게 먹었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지적하셨을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줄 선물을 준비할 때 부모는 마음이 설렌다. 아이가 이것을 받고 얼마나 즐거워 할지, 이것을 얼마나 누릴지를 생각하면 만면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런데 선물 받은 아이가 즐거워하지도 않고 누리지도 않는다면 부모는 대단히 실망한다. 선하신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말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신 그 아름다운 것들을 마음껏 누리라.

탐식이나 탐욕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고 즐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트랙백 주소 : http://blog.kcmusa.org/blog/trackback.php?article_id=5989
작성자 : 비밀번호 : 확인
이메일 :
덧글 :
맞춤법 검사 (우리말 배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