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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qoim님의 블로그 http://blog.kcmusa.org/yeqoim
순전한 복음 회복을 위한 예레미야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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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은 예수님께서 시행하신 훈련방법이다. 그 원리와 내용, 정신을 밝혀 성도들의 훈련에 적용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한 쪽 측면에서 보자면 교회의 모든 일이 제자를 만드는 일이다.

제자훈련의 정신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방법이나 형태는 어떠해도 좋다. 설교를 통해서도 할 수 있고 성경 공부를 통해서도 할 수 있고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할 수 있다. 나는 2천 년대 초 칼 세미나에서 고 옥한흠 목사의 ‘광인론’을 듣고 깊이 공감했다. 그 이후 내 사역은 제자훈련의 여정이었다. 제자훈련으로 급성장한 교회에서 제자훈련 교재를 편집하기도 했다. 그래서 제자훈련의 내용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 지금도 나는 제자훈련의 마인드로 목회하고 있다.

내가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고정화된 프로그램의 형태다. 이건 제자훈련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먼저 그 내용이 제자훈련이라고 부르기에 너무 부실하다. 교회의 역사가들에 의하면, 초기 교회에서는 세례 예비자 교육만 5년을 한 경우도 있다. 완전한 삶의 변화를 요구했다. 알렌 크라이더(Alan Kreider)에 의하면 기독교가 공인된 312년의 이전 3세기 동안 매 10년마다 평균 40퍼센트 성장했다고 한다. 그 시기는 로마의 ‘10대 박해’로 알려진 끔찍한 핍박이 있었던 시기였다. 그 시기의 성장은 오늘날의 부풀려지거나 의미 없는 성장이 아니다. 물론 가라지도 섞여 있었겠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마 16:24) 진정한 제자들의 성장이었다.

그런데 지금 시행되고 있는 제자 훈련 내용은 히브리서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 도의 초보’(히 6:1-3))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사활적으로 심각한 문제는 현재 시행되고 있는 제자훈련의 목표가 ‘사역자 만들기’라는 것이다. 제자훈련이 선교단체에서 시작된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필연적이며 태생적인 문제점이다. 전 세계에서 제자훈련을 한다고 하는 교회의 대부분의 구조가 그렇다. 3년 정도의 기본적인 훈련을 마치고 ‘사역자’가 되는 것이다.

‘사역자 만들기’의 첫 번째 문제는 ‘그리스도 도의 초보’만 익히고 장성한 것처럼 행하도록 요구받는다는 것이다. 마치 유치원 졸업생에게 어른의 책임을 맡기는 것과 같은 형국이다. 마치 교회가 성인아이 만들기를 목표로 하는 듯하다.

두 번째, 치명적인 문제는, 본질적인 목적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누누이 말했지만 크리스천의 일생의 과업은 ‘성화’다. 하나님 형상의 회복,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는 거룩한 인격이다. 제자훈련의 목적도 ‘사역’이 아니라 ‘성품, 인격’이 되어야 한다.

제자훈련 설계자들의 근거 구절이 에베소서 4장 11, 12절이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기서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몸은 5장 27절에서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것에 방점이 찍힌다. 그런데 지금의 제자훈련은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까지만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봉사의 일’이 최종 목표가 되었다.

세상과 초월이 혼합되면 인간은 반드시 세상을 택한다. 보이는 우상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혼합되면 인간은 반드시 우상을 택한다. 사역과 인격이 혼합되면 인간은 반드시 사역을 택한다. 인간의 조급성과 결과를 중시하는 본성은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요구한다. 인격의 성장은 너무도 더디다. 거의 자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성품의 성장에는 관심을 거두어 버렸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묵상해 보더라도 사역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인위적인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을 창조하시면서 첫 번째 주신 복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곧 생산성이다. 생산성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피조물들의 본능이다. 본능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Juan Carlos Ortiz) 목사는 양들을 건강하게만 키워놓으면 스스로 짝을 지어 번식한다는 말로 이 본능을 설명한다. 필자는 이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제대로 성장도 하지 않았는데 억지로 번식을 시키는 것은 창조 질서에 반하는 일이다. 목자의 일은 양들을 건강하고 정상적으로 성장시키는 일이다. 그러면 양의 몸에서는 질 좋은 털이 날 것이고 좋은 육질을 유지할 것이며 때가 되면 번식을 할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인위적인 번식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교회의 봉사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가이드가 필요하다. 그러나 성도들이 온전케 되면 그들은 스스로 봉사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본능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되어 있다. 주님의 최종적인 목적은 봉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거룩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거룩은 교회의 표지다. 그런데 교회가 거룩을 포기하고 사역을 택했다. 사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교회의 교인들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무언가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성취감과 보람은 그들을 더욱 활동적인 교인으로 만든다. 이런 경우 정말 심각한 문제는 ‘결과’에 모든 것을 집중하는 것이다. 크리스천은 동기와 과정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결과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이 개발되지 못한 채 사역의 기쁨을 누리는 자는 반드시 ‘결과 지상주의자’가 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세상의 악한 방법을 사용하고도 결과만 좋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 결과란 세상적인 기준의 성공이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명분으로 실패를 몹시 두려워한다. 편법을 이용해서라도 교회 건물을 크게 지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한다. 사업을 할 때에도, 그들의 생각에는,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고 실패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보다 더 악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성공하려 한다. 슬프게도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거룩을 그렇게 쉽게 내팽개친다. 기쁨으로 사역하는 교인들은 많지만 거룩한 인격, 고상한 품격을 갖춘 사람들은 쉽게 만나지 못한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그런데 교회가 이렇게 무기력한 적이 있었는가? 교회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교육과 훈련이 행해지고 기독교 서적이 쏟아져 나오는 오늘날, 세상이 교회를 걱정해주는 참으로 비참한 상황이 되었다. 필자는 이것이 교육과 훈련의 피상성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께서 시행하셨던 제자훈련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모범은 빌립보서 2장의 ‘그리스도 찬송시’에 잘 나타나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예수님의 제자는 바로 이런 모습이다. 죽기까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된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오늘날의 제자훈련은 ‘건전한 시민’을 육성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예수 밖에 있는 자들도 ‘건전한 시민’은 많다. 마하트마 간디도 산상수훈을 따라 살려고 몹시 노력했다. 교회의 교육 훈련은 ‘건전한 시민’, ‘윤리적이고 청렴한 지도자’, 심지어 ‘정의로운 사람, 평화의 사람’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바벨탑 아래의 인간들도 평화를 사랑하고 의로우며 윤리적이고 청렴할 수 있다. 그들만의 기준으로.

제자는 겉모습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속사람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다. 에덴의 아담에게 속한 자가 아니고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다. 제발 예수님의 겉모습을 흉내 내려 하지 말고 그 분 성육신의 본질을 보라.

사역자 만들기를 목표로 하는 제자훈련은 “영적 성인 아이”를 만든다. 제대로 성장하지 않은 영적 어린 아이들에게 어른의 역할을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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