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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qoim님의 블로그 http://blog.kcmusa.org/yeqoim
순전한 복음 회복을 위한 예레미야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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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것은 생성, 성장,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인간에게는 생노병사의 과정이 있다. 성경과 기독교의 역사를 대충(in rough) 살펴보면 동일한 과정이 나타난다. 물론 다른 종교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모세로부터 시작했던 ‘여호와의 종교’는 점점 생명력을 잃고 화석이 되었다. 그것이 유대교다. 바울은 유대교가 ‘조상의 유전’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 1:14). 예수님도 복음서에서 이들이 하나님의 뜻보다 장로들의 유전에만 관심이 있다고 질타하셨다.

앞서 ‘해석학의 문제’에서도 밝혔지만 ‘조상의 유전’이란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는 프레임이다. 유명한 랍비들이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고 그것이 쌓이면서 하나의 프레임을 형성한 것이다. 여기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그 종교의 교리와 의식 등등을 통해서 생명력이 없어도 존속한다. 바울과 같이 신실한 사람도 유대교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찾았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하나님을 찾는다.

이렇게 화석화된 유대교에 예수님이 등장하셨다. 그래서 성경을 재해석하고 참된 생명을 부여하셨다. 그러나 그것도 몇 세기 지나지 않아 화석화되었다. 그것이 천주교다. 천주교 또한 더 이상 생명력이 없다. 그러나 한국 선교 초기에서 보듯이 그들도 순교를 각오한다.

화석화되고 생명력을 잃은 천주교에 저항하며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다. 종교개혁으로 생명력을 회복했던 기독교는 오백여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지금의 기독교는 생명력이 있을까? 앞에서 보았듯이 생명력을 잃고 화석화 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단히 짧다.

내가 보기에 오늘날의 기독교는 번영신학이라는 새로운 ‘장로의 유전’에 매몰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여의도에 세계 최대의 교회가 생기면서 거의 모든 메시지가 기복적 메시지로 돌아섰다. 그것이 하나의 ‘장로의 유전’을 형성한 것이다. 번영신학에 성경의 예수님이 있는가? 번영신학에서의 예수는 인간이 만들어낸 ‘금송아지’다.

나는 이것을 ‘유사유대교’라고 이름 붙였다. 유대교가 ‘장로의 유전’을 기반으로 형성된 것처럼 유사유대교는 ‘번영신학’, ‘기복신앙’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미국의 어떤 한인교회 목사는 자신은 ‘기복신앙’을 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의 논리는 이민 사회에서 365일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하다가 주일 몇 시간 겨우 시간을 내어 교회 나오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묻고 싶다. 왜곡되지 않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은 그들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이라도 해야 그들에게 위로가 된다는 것인가?

이런 사람들은 대단한 존경을 받는다. 그래서 여의도에 세계 최대의 교회가 생겨났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사랑이 많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심판을 말씀하시는데 이들은 심판을 말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라도 사랑만 있을 뿐이다. 하나냐가 그랬다. 불과 칠년 후 왕자들은 왕 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왕은 두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 끌려갔는데 ‘죄악이 관영한’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선포했다.

오늘날이 정확히 그러한 예레미야의 시대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단 한 사람의 의인을 요구하셨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 5:1). 소돔에서는 열 명을 요구하셨었다. 그런데 거룩한 도성에는 ‘한 사람만이라도’를 말씀하신다. 이 끔찍한 타락의 상황에 하나냐는 백성들의 귀에 좋은 소리만 외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남겨 놓으신 ‘남은 자’를 찾고 있다. 그들을 상징적으로 ‘칠천 명’(왕상 19:18; 롬 11:4)이라고 부른다. 엘리야가 보지 못했던 것처럼 나도 아직 그들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어딘가에 반드시 있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도 그 ‘칠천 명’을 찾고자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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