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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qoim님의 블로그 http://blog.kcmusa.org/yeqoim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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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은 고진감래라는 말을 흔히 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것이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말도 흔히 한다.

그래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도 한다.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지만 세월을 지나면서 어느 정도 검증도 되었고, 또한 이런 희망조차 없으면 인간은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말이 교회에 아무런 여과도 없이 들어왔다.

물론 조건이 하나 붙어서 들어온다.

‘예수 잘 믿으면,’ ‘믿음 생활(?) 잘 하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자들은 금송아지 여호와, 금송아지 예수를 믿는 우상 숭배자들이다.

초월의 관점이 없이 내재적 가치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우상은 초월이 없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무당이라고 한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세상과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다.

우리의 모든 낙은 하늘에서만 주어진다.

이 세상에서는 고생 끝(苦盡)에 죽음이 온다(死來).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자신의 육신적 스펙을 말한다(4-6).

그것은 세상에서 낙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들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겨 내던져 버렸다.

빌립보서를 쓸 때 투옥상태에 있던 바울은 이후 잠시 풀려나지만 나중에 참수되었다고 전해내려 온다.

투옥(정확히는 가택연금)의 고생이 끝나도 바울은 이 세상에서 누릴 낙이 없었다.

아니 그것을 내던져 버렸다.

우리가 알다시피 빌립보서를 쓸 당시 바울은 이미 1-3차 전도여행을 마친 상태였다. 그 과정에서 고린도 후서 11장 23절에서 27절까지 묘사된, 한 인간의 인생에 받았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끔찍하고도 많은 고난을 받았다.

그리고 죽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 삶의 전형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이 그랬다.

카타콤에서 아무 육신적 즐거움도 없이 숨어 살다가 잡히면 사자 굴에 던져지고 기름 가마에 튀겨져 죽고 원형경기장에 횃불이 되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바랐던 소망은 무엇이었을까?

이 세상에서 육신의 생명이 끝났을 때 받을 상급이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이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로마서 8장 18절이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고린도후서 4장 17절이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믿음을 통해 우리가 얻는 결과는 이 세상의 것이 절대로 아니다.

베드로 전서 1장 9절에서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고 말씀하실 때 이것이 우리가 받기 원하는 것이다.

여기에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는 없다.

즉 세상도 즐기고 천국도 즐기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하나를 사랑하면 하나를 미워한다고 하셨다.

‘미워’(hate)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꿩 먹고 알도 먹을 수 있겠는가?

속지 말라.

거짓 선지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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