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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qoim님의 블로그 http://blog.kcmusa.org/yeqoim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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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9 편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찌라도
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13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 내가 은밀한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16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7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8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인생에 대한 하나님 절대주권의 대전제는 위의 말씀이다. 특히 16절 말씀을 주목해야 한다. 내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나에 대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다. 에베소서의 표현에 따르면 ‘창세 전’이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그러한 대전제 하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함께 호흡하신다. 시편에는 인생의 위기가 닥쳤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구원이 임했다는 고백들이 많이 나온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위기 상황에 구원으로 응답하신다. 그러나 그것을 마치, 살다보니 우연히 찾아온 위기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면 모든 것을 놓친다. 우연히 찾아오는 위기는 없다. 하나님의 섭리다.

시편에 고백되는 다윗의 많은 위기들은 누군가가 ‘광야 학교’라고 불렀던 시기의 일들이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십년 동안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한다. 블레셋으로 도망갔을 때는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삼상 21:13)로 위기를 모면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십년을 통해 다윗을 왕으로 훈련하시고 연단시키신 것이다.

코로나 사태를 맞이해서 교회들이 기도회를 한다. 그리고 그 기도회에 자주 인용되는 말씀이 역대하 7장 13절, 14절이다.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이 말씀을 인용하는 것은 합당하다. 그러나 내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들이 이 말씀을 인용할 때 그 앞의 말씀을 생략한 채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잘못 읽으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빠져버린다. 다시 말해서 이 염병이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인지 우연히 일어난 일인지 혼란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부분까지 보면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나타난다.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이런 오해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까지 세계 교회를 오염시켰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 현상에서 정확히 나타난다. 성경을 어떻게 읽으면 그런 오해를 하게 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아주 많은 교회가 그 속임수에 넘어갔다. 그 책의 내용은 “예수를 믿어도 조상의 죄 때문에 오는 저주가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어서 예수의 이름으로 그 저주를 구체적으로 끊어내야 산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저주가 있을 수 없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우리의 모든 저주는 속량되었다. 아직도 우리에게 저주가 남아 있다면, 그래서 그것이 대를 이어 계속 전달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효가 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복과 저주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생사화복의 주관자시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내리신 저주를 아들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끊으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을 대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성경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는 이런 요설로 세계 교회가 몸살을 앓았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슬람의 알라와 달리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우리와 호흡하시고 우리 시간 속에서의 필요와 문제들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성경, 특히 시편의 많은 표현들이 이 부분을 강조한다. 그러나 시편 139편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미 창세전에 정하셨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순간순간마다 그것을 섭리하신다. 그럴 때 우리는 마치 우리 인생 속에 날마다 발생하는 어떤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그때서야 반응하시는 것으로 이해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우리 유한한 인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섭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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