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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qoim님의 블로그 http://blog.kcmusa.org/yeqoim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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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모든 내용은 구원과 성화다. 둘 다 죄와 관련이 있다. 죄책에서의 구원이며 죄의 성향을 제거해 나가는 성화다. 마태복음 1장 21절과 23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의 조건은 단 한가지다. 죄 없음, 즉 거룩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 백성의 죄는 단번에 사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죄의 성향이 남아 있다. 그 죄의 성향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 성화다. 그래서 구원은 단 한번의 ‘사건’이지만 성화는 지난한 ‘과정’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활을 결정하는 지점을 지나야 한다. 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추적하는 것이다. 서양신학의 주춧돌인 어거스틴은 악을 ‘선의 결핍’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서 죄란 일종의 결핍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신플라톤주의의 유물이다. 존 오웬은 죄를,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성’으로 보았다.

나는 이런 말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기독교 역사에서 죄에 대한 논의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죄를 지칭하는데 가장 많이 쓰인 단어가 히브리어의 하타트와 헬라어의 하마르티아다. 이 말의 의미는 과녁을 빗나갔다는 것이다. 화살을 쏘았는데 그것이 과녁을 빗나가서 다른 곳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정도를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는 이 단어들을 기독교 역사의 ‘죄의 본질에 대한 논의’에 적용하고 싶다. 2천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죄의 본질에 대한 논의’는 완전히 과녁을 빗나갔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두 요소 중 하나인 ‘성화’에 대한 논의가 중구난방으로 펼쳐졌다. 절대로 올바른 결론을 낼 수 없는 쪽으로 흘러간 것이다. 종교개혁을 통해서 두 요소 중 한 부분인 ‘구원론’은 논의가 완결되었다. 그러나 성화론은 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논의가 방향을 잃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의 의미는 아주 명백하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몸을 입고 오셔서 형언할 수 없는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고 결국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사건이다. 과연 창조주께서 이런 일을 당하셔야 하는 죄의 무게는 어느 정도일까?

로마서 1장 29절 이하에는 ‘추악, 탐욕, 시기, 분쟁, 불효’ 등등의 죄의 목록이 열거된다. 그것이 죄라면 창조주께서 인간의 불효 때문에 십자가의 수치를 참으셨을까? 남이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하는 시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을까?

존 오웬이 말하는 죄의 경향성이란 이런 것들에 기울어지는 마음이다. 그러나 로마서 1장 28절은 그러한 죄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말씀한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이 말씀에서 ‘합당치 못한 일’이 그 아래 열거되는 죄의 목록이다. 그것은 열매라는 것이다. 그 원인이 되는 뿌리는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다.

그럼 왜 저들이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까? 스스로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의 타락 기사에 의하면, 타락의 상징이 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에는 “하나님같이 되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그것을 먹으면 다른 것이 아닌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같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그 말씀대로 되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부분을 부정하며 스쳐 지나간다. 피조물이 어떻게 하나님같이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을 불경스러운 추측으로 돌린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 3:22) 말씀하시는 주체가 누구인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인간이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하나님같이 되었다.

여기서 “선악을 안다”는 것은 선악의 판단기준을 스스로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질상 선악의 판단 기준은 하나님만 갖고 계신다. 그 분이 옳다고 하시면 옳은 것이고, 그 분이 아름답다 하시면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하나님의 그 판단 기준을 거부한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자신의 판단 기준을 세운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거부한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서 그것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만나를 먹었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보호를 받았고 반석의 물을 마셨다. 그러나 광야 40년은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11절까지의 ‘그리스도 찬송시’는 그래서 우리에게 성화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면서 하나님이시기를 포기하고 피조물로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인간이 피조물이면서 피조물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된 것과 정반대다.

다시 말해 성경이 말씀하는 죄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본 것이고, 성화란 하나님 된 자리에서 내려와 피조물의 자리로 정초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화의 명확한 목표다. 따라서 성화는 막연히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 기준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와 기독교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인권을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기독교에 대단한 해를 끼친다. 이 역설적 관점이 그리스도의 시각이다.

2020년 상반기 중 아마존을 통해 영문으로 출간 될 “Jehovah and his wife Asherah” 중 발췌 수정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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