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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qoim님의 블로그 http://blog.kcmusa.org/yeqoim
순전한 복음 회복을 위한 예레미야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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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 전서 13장 11절에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을 통해 초월적 관점에 대한 이해를 넓혀 보자.

어린아이들의 ‘세계’도 나름의 규칙과 약속이 있다. 종이로 돈을 만들고 일정한 규칙과 약속 안에서 그것을 사용한다. 그 규칙과 약속 안에서 아이들은 대단히 진지하다. 군대놀이를 할 때는 계급을 정한다. 나름대로 작전에 능하고 리더십이 있는 아이가 대장이 된다. 병원놀이를 할 때는 다른 아이보다 질병이나 약 이름을 많이 아는 아이가 의사가 된다.

어른의 ‘세계’는 어떤가? 어른의 사회도 그 작동방식은 어린아이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 다만 좀 더 세련되고 좀 더 고급화 되었을 뿐이다. 어른의 군대에서도 작전 능력이나 리더십이 좀 더 나은 사람이 높은 계급에 올라간다. 의사들도 일반 사람보다 의학을 좀 더 많이 공부한 사람들이다. 돈도 어린 아이의 세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회적 합의에 의해 가치를 부여한다.

이 세상에서는 어른의 ‘세계’가 끝이다. 그래서 어른의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어른의 기준으로 볼 때 어린 아이의 ‘세계’는 유치하고 조잡하다. 만일 어른의 세계가 없다면 어린 아이의 세계가 유치하고 조잡하다는 것을 알 수가 없다. 판단 기준과 시각이 어린 아이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른의 세계 위에 그보다 더 고급한 세계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사실 ‘더’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절대적으로 다른 차원이다. 그 시각과 기준으로 판단하면 어른의 세계를 포함한 이 세상 자체가 참으로 조잡하고 유치하다. 어른의 세계에서 별 일만 개를 달았다 해도 인간이다. 모든 전쟁에 승리할 수는 없다. 세계 최고의 의사들도 감기 하나 완치시키지 못한다. 아이들의 세계에서 다른 아이보다 ‘조금’ 뛰어난 아이가 대장이 되고, 의사가 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어른이 되면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다. 어렸을 때는 조잡한 장난감에 눈과 마음을 온통 빼앗긴다. 그런 장난감을 많이 갖고 있는 친구가 그렇게도 부럽다. 필자가 어렸을 적 가졌던 구슬 중, 어린 눈에 너무도 신비로운 문양을 가진 구슬이 있었다. 그 구슬을 보고 있으면 마치 신비한 세계로 끌려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구슬은 구하기도 힘들어서 어쩌다 찾으면 많은(?) 돈을 주고라도 샀다. 초월적 시각에서 본다면, 어른들의 마음을 빼앗는 10캐럿짜리 다이아몬드와 어린 아이들의 마음을 빼앗았던 구슬은 아무런 차이도 없다. 심지어 세상의 시각을 가지고도 ‘황금 보기를 돌같이’했던 사람들도 있다.

아이들의 세계 위에 어른의 세계가 있고 그 위에 초월적 세계가 있다. 크리스천들은 초월적 세계의 사람들이다. 이 세상의 것들이 조잡하고 유치한 것임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것들은 심지어 배설물처럼 보인다(빌 3:8 참조).

물론 육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세상 것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수단일 뿐이다. 어릴 적 그리도 소중했던 종이돈이 어른이 되어서는 그저 유치한 장난감인 것과 같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이런 것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어릴 적 소중한 것들을 소중한 것으로 경험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을 통해 정상적인 어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성장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은 ‘성인 아이’가 된다. 크리스천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 어른 세계의 가치관을 심도 있게 경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정상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갖게 된다. 문제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초월적 세계로 성장하지 못하고 ‘어른 세계’에 멈춰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섯 살에서 육신적 성장이 멈춘 것보다 더 큰 재앙이다.

초월적 관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돈은 그저 이 세상에서 잠시 필요한 것뿐이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기에 목적이 될 수도 없다. 인간은 가치 있는 일에 시간과 물질을 투자한다. 진정한 가치가 있다면 목숨까지도 걸 수 있다. 크리스천의 모든 가치는 초월적 세계에 있기에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에 삶을 허비하지 않는다. 그들의 가치는 오직 ‘하나님 나라와 의’다(마 6:33).

이런 관점에서, 제자훈련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필자는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제자훈련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제자훈련에는 초월적 관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오병이어의 이적’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사건이다. 이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밤새도록 예수님을 찾아다녔다. ‘그 밤’에 그들은 예수님을 너무도 사랑했다. 마침내 이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육신의 떡이 아니라 ‘하늘의 떡’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러자 그들은 ‘이 말씀은 어렵다’며 예수님을 떠났다.

하늘의 떡에 관한 말씀은 초월적 세계에 관한 말씀이다. 밤새 예수님을 찾아다녔던 이들은 하늘의 떡이 아니라 육신의 떡만을 원한다. 하늘의 떡을 원한다 해도 그것은 지극히 부차적인 것이다. 우선 이 세상의 것들이 충족되어야 하늘의 떡을 찾는다. 하늘의 떡이 부차적이고 지엽적인 것으로 밀려날 때 이것은 정확히 우상숭배가 된다. 번영신학이요 기복신앙이다. 이들은 밤새 찾아다닌 예수님을 떠났다. 이것이 밤새 교인들의 실상이다. (나는 이들을 ‘밤새 교인’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오늘날 크리스천으로 자칭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밤새 교인’이다).

예수님은 떠나가는 자들을 전혀 붙잡지 않으셨다. “하늘의 떡 뿐만 아니라 육신의 떡도 주마”고 설득도 안 하셨다.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어보셨을 뿐이다(요 6:67). 그런데 오늘날 초월적 관점이 없는 목사들은 육신의 떡을 약속한다. 그 약속을 믿고 ‘밤새 교인’들은 교회에 머무른다. 그래서 대형, 초대형 교회가 탄생한다. 그렇게 대형, 초대형 교회가 생기는 것은 재앙이다. 묵은 포도주를 먹은 사람은 새 포도주를 찾지 않기 때문이다(눅 5:39). 이들은 변화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들을 떠나시는 것이다. 이들은 바른 복음이 전해질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증오심을 나타낸다.

이러한 교세를 바탕으로 목회의 성패를 말하는 것은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이런 교회 아닌 교회들이, 교회가 성장을 멈추었다고 한탄한다. 이들은 성장이 멈춘 원인을 분석하지만 복음의 본질이나 초월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으로 분석한다. 올바른 해답이 나올 리 없다.

기독교는 초월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내재하시는 종교다.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내재)한다.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 땅에 작용(내재)한다. 그 절정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다(요 1:14). 초월이 전제되지 않은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하나님이 초월하신 분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우상숭배와 전혀 다름없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초월을 잃어버렸다.

더글라스 웹스터(Douglas D. Webster)는 그의 책 Selling Jesus(「기업을 닮아가는 교회」, 기독교문사 역간)에서 미국의 베이비 붐 세대에 대해 “미국인들은 구원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고 눈에 보이는 유형적이고 물질적인 관심사에 치중한 나머지 죄책과 은혜, 죄와 구원, 천국과 지옥 등에 관해 생각하는 법까지 잊어버렸다. 이제 그들은 그런 문제들을 다룰 만한 사고의 카테고리 조차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윌리엄 던니스(William Dyrness)의 말을 인용한다.

미국인들이 어떤 초월적 관점에서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힘든 것은 그들의 심성이 특별히 뒤틀어져 있거나 다른 사람들보다 덜 똑똑해서가 아니라, 그런 방면의 문제들을 논의할 어휘 또는 용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그저 초월적인 필요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해할 능력이 없는 것일 뿐이다. 육체적인 욕구들은 즉각 느껴지고 또 쉽게 충족이 되기 때문에 그 보다 더 심원하고 충족시키기 더 힘든 정서적 혹은 영적 욕구들은 그냥 간과되기 쉽다.(후략)

“그런 방면의 문제들을 논의할 어휘 또는 용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은 ‘초월’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미국의 베이비 붐 세대에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이 문제는 베이비 붐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미국 역사가 청교도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미국이 기독교 전통위에 세워졌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마이클 호튼(Michael Scott Horton)에 의하면,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Made in America)에서 미국 기독교가 거의 초기부터 종교 개혁의 전통을 버리고 세속의 물결, 즉 실용주의, 소비자 중심주의, 개인주의, 감정 중심 등과 혼합되었다고 말한다. 그 결과 미국제 복음주의는 초월을 잃어버렸다.

그가 규정하는 ‘미국제 복음주의’는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이다. 번영신학을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기복신앙이다. 번영신학은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에 전파되었고 1970년대 이후 한국 교회의 급속한 성장을 기반으로 남미와 아프리카 등 제 3 세계를 오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