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rs in GetInsertSQL. Connection or SQL invalid. Try using $connection->debug=true;

somsil님의 블로그 http://blog.kcmusa.org/somsil11
   2019년 1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전체보기
월별로 보는 포스트
자주 가는 링크
메모박스
새로운 포스트 새로운 덧글 새로운 트랙백
사이드바
본문 제목 2019년 1월
거룩한 교제, 사랑의 공동체

원시 예루살렘 교회는 유무상통하는 사랑의 공동체였다.

행2장 43-45절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4장 32-35절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그런데 이런 사랑은 세상에서 사람을 불러 거룩을 주심으로 사람이 성도가 되게 하신 거룩성이 그 기초가 된다.

고전1장 1-2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살전4장 7절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엡5장 25-27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도는 부르심을 받고 구원 받을 때부터 거룩을 입는 것이다. 성도의 교제는 거룩한 사랑의 교제인 것이다.

교회는 거룩한 사랑의 공동체이다. 사랑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한다. 그러나 여기의 사랑은 용서와 인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 아내와 남편의 사랑 같은 사랑이다.(고전13장, 엡 5장, 빌2:3)

신약성서에서는 교제가 강조된다. 교제에 해당하는 말은 <코이노니아>로 이 말에서 <쉰 코이노노스> <코이네오> <쉰 코이노네오> <코이노니코스>등 다수의 파생어가 사용된다. 이 코이노니아는 신학적 의미로 은사를 다른 성도들과 나누어가진 다는 뜻이다. 빌1:7, 고전 9:23, 10:10,16. 고후 13:14. 벧후1:4. 히3:14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교제는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와 수평적으로 성도간의 교제가 있다. 이와 같은 성도간의 교제를 말하는 말이, <같이> <함께>를 뜻하는 접두사 <쉰>이라는 말이 <코이노니아>라는 말과 같이 사용된다. 초대 교회는 사람들이 넘을 수 없는 인간간의 장벽, 헬라인과 유대인, 종과 상전, 여자와 남자가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교제하였다.

갈3장 26-29절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성도는 거룩한 사랑으로 교제하는 교회요 교회는 거룩한 사랑의 공동체이다.

4> 증인으로서의 공동체

교회는 성도들로 성도는 부르심을 받을 때 증인으로서 부름을 받은 것이다. 복음서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한다.

요20장 21절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마28장 18-20절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막16장 15-16절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사도행전에서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이렇게 말한다.

행1장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도는 성도가 되는 순간 나를 구원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민에게 증거 할 사명을 받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증인들의 모임으로 교회는 증인의 공동체이다.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핍박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고 핍박으로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5> 종말론적 공동체

종말이라는 말은 <에스카톤>으로 <마지막 때에 관한 이야기>라는 뜻의 말이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종말에 일어나야 할 것인데 그것이, 현재(부활의 순간), 곧 오늘 우리들에게는 과거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종말을 단순하게 미래적인 사건만으로 이해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신학에서 이 사건을 <선취된 미래의 사건>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일어난 사건> <카이로스적(종말론적) 사건>이라 말한다. 그래서 종말론적인 삶이란 절망적인 삶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종말,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삶을>을 뜻한다.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의 삶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동시에 미래를 현재의 삶에서 경험하는 삶, 곧 미레 있을 나의 부활, 종말 때문에 오늘 내가 나를 말씀으로 죽이면서, 말씀 안에 오늘도 부활을 체험하면서 살게 된다. 결국 종말론적인 삶이란 종말을 오늘 경험하면서 사는 삶으로 이 삶은 바울 처럼 매일 내가 죽고 다시 사는 성도의 삶인 것이다.

원시 교회의 성도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종말에 일어나야 할 부활을 오늘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로 , 종말을 현재에 경험하게 된 성도들이었다. 그래서 저들은 하로 하로의 삶이 부활을 믿는, 그래서 오늘 내가 죽어도 좋은 종말론적인 삶을 살았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또 받고 있다.

골1장 13-14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받은 구원)

롬8장 23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받을 구원)

고후5장 4-10절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 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받는 구원-종말론적인 삶)

교회는 종말론적인 삶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불러냄을 받은 무리, 곧 “에클레시아”로 공동체인 것이다.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들로 생명의 공동체인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에게 생명으로 붙어 있는 몸, 공동체의 일부분이 된 것은 아주 놀라운 축복이다. 이 몸을 건강하게 세워야 한다. 성도는 각기 이 몸을 건강하게 하는 지체(창조적 소수)가 되어야 한다. 이 몸을 병들게 하는 암적 지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트랙백 주소 : http://blog.kcmusa.org/blog/trackback.php?article_id=5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