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sil님의 블로그 http://blog.kcmusa.org/somsil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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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종말론적 공동체

종말이라는 말은 “에스카톤”으로 “마지막 때에 관한 이야기”라는 뜻의 말이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종말에 일어나야 할 것인데 그것이, 현재(부활의 순간), 곧 오늘 우리들에게는 과거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종말을 단순하게 미래적인 사건만으로 이해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신학에서 이 사건을 “선취된 미래의 사건”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일어난 사건” “카이로스적(종말론적) 사건”이라 말한다. 그래서 종말론적인 삶이란 절망적인 삶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종말,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삶을”을 뜻한다.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의 삶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동시에 미래를 현재의 삶에서 경험하는 삶, 곧 미레 있을 나의 부활, 종말 때문에 오늘 내가 나를 말씀으로 죽이면서, 말씀 안에 오늘도 부활을 체험하면서 살게 된다. 결국 종말론적인 삶이란 종말을 오늘 경험하면서 사는 삶으로 이 삶은 바울처럼 매일 내가 죽고 다시 사는 성도의 삶인 것이다.

원시 교회의 성도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종말에 일어나야 할 부활을 오늘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로 , 종말을 현재에 경험하게 된 성도들이었다. 그래서 저들은 하로 하로의 삶이 부활을 믿는, 그래서 오늘 내가 죽어도 좋은 종말론적인 삶을 살았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또 받고 있다.

골1장 13-14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받은 구원)

롬8장 23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받을 구원)

고후5장 4-10절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 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받는 구원-종말론적인 삶)

교회는 종말론적인 삶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불러냄을 받은 무리, 곧 “에클레시아”로 공동체인 것이다.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들로 생명의 공동체인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에게 생명으로 붙어 있는 몸, 공동체의 일부분이 된 것은 아주 놀라운 축복이다. 이 몸을 건강하게 세워야 한다. 성도는 각기 이 몸을 건강하게 하는 지체(창조적 소수)가 되어야 한다. 이 몸을 병들게 하는 암적 지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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