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길의 신약산책 http://blog.kcmusa.org/sky2on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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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은 현시대를 ‘아버지 상실 시대’라고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다. 실제로 요즘 아버지들은 돈버는 기계, 기러기 아빠, 사오정 등으로 불리며 아버지 노릇하기 어렵고 권위마저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를 힘겹게 살고 있다. 거실에서도 안방에서도 TV 리모콘을 아내와 자녀들에게 빼앗긴 채 말붙일 곳 없이 서먹하게 앉아있다 잠자리를 찾는 어색한 아버지들, 엄격하고 당당했던 어른의 모습은 오간데 없고 어느새 뒷모습마저 쓸쓸한 슬픈 영웅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아들과 아버지, 아버지와 아들

성경에서 아버지로서 가장 큰 낭패를 본 사람을 들라면 단연 다윗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용맹한 전사로 유명해졌고, 후엔 나라의 번영을 일군 왕으로 존경받았으며, 평생을 시와 기도로 하나님을 찬양하던 그야말로 문무와 영력을 동시에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배반으로 내내 성공가도를 달려온 자신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당대의 패권을 움켜쥔 채 천하를 호령하던 다윗도 물불 가리지 않는 아들 압살롬을 피해 목숨을 부지하려 산과 들과 동굴 속을 헤맬 때엔 영락없는 인생실패자였다. 압살롬은 그런 아버지의 한가닥 자존심마저 짓밟고 수모를 안기려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계모를 욕보이는 패륜도 서슴지 않았다(삼하16:22). 인생의 그 쓴 맛을 홀로 경험할 때 다윗의 회한과 고통이 오죽했을까? 그 때 주님 앞에서 눈물로 쓴 시가 바로 시편 3편이다. 못된 아들의 배신으로 아버지로서는 완전히 실패한 인생, 이제 고통스런 호소를 들어줄 하나님 아버지의 참 아들이 되는 것 외에 무슨 좋은 길이 있을까?

 

탕자, 아버지, 그리고 하나님(눅 15:11-32)

아버지로서 좌절을 겪을 때 상심하지만 말고 거꾸로 순진한 아들이 되어 자신을 위로할 아버지를 찾아보자. 성경에서 하나님을 좋은 아버지로 묘사한 이야기가 곧 “탕자의 비유”다. 이 비유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버리고 매정하게 집 떠났던 자식과 그 철부지를 학수고대하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철없는 아들은 죄를 짓느라 가진 돈을 순식간에 탕진하고 말았다. 돈 때문에 모였던 친구들마저 다 떠나버리자 이제 더 이상 갈 곳도 의지할 사람도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예고된 실패였다. 할 수 없이 돼지농장에 들어가 종으로 일하면서 돼지가 먹는 더러운 음식으로 연명해야 했다.

 

이 비유는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말씀이다(15:1-3). 율법에 철저한 그들에게 돼지는 극도로 부정한 짐승이다. 유대인들이 돼지를 먹는 것은 상상못할 죄였다. 돼지를 직접 키우는 것은 물론, 접촉도 금지되었고 심지어 돼지라는 말도 율법의 모독이었다. 이처럼, 돼지라는 짐승 자체가 부정하기 이를 데 없는데, 한 술 더 떠 그 돼지의 음식을 먹으며 돼지들과 한 우리에서 살던 인간이 바로 탕자였다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종교적으로 구원의 여지가 없는 부정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구제불능의 탕아, 그러나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를 당당한 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이가 있으니 바로 그의 아버지였다. 이 비유는 그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죄인이라도 언젠가 돌아와 구원받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인간을 향한 용서와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세상이 다 버린다 해도 아버지는

보통의 유대인에게 이 비유는 그야말로 충격이요 걸림돌이다. 어떻게 부정한 인간을 거룩한 하나님이 애타게 기다려 구원을 베푸신단 말인가? 일벌백계, 저주를 내리시면 그만인 것을. 이해하고 싶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아들의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다니!(15:22) 그를 어엿한 상속자로 인정했다는 뜻 아닌가? 결국 곁에서 열심히 일했던 큰 아들의 극렬한 반발을 사고야 말았다. 큰 아들은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을 잘 섬겼다고 자부하는 자들을 일컫는다. 본디 이 비유는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1-3절). 그들의 눈엔 하나님 곁에서 율법을 잘 지킨 위인들과 타락한 탕자와는 비교 자체가 불합리요 어불성설이다.

 

정작 금전적 손해는 아버지가 보았는데 화를 내는 자는 큰 아들이다. 그에겐 돌아온 동생이 반가울 턱이 없다. 그 동생이 이미 율법의 경계를 벗어난 부정한 인간이라 가까이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때문이었다. 그래서 큰 아들은 동생이라는 호칭을 거부하고 대신 “아버지의 아들”이라 돌려 부르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에게 분노를 폭발시켰다(30절). 탕자를 대하는 아버지와 큰형, 같은 피붙이인데 어떻게 이처럼 다를 수 있을까? 죄인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분노하는 유대인의 배타적 선민사상의 한계가 자기 목숨을 버려 만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새 시대의 복음 앞에 적나라하게 모순으로 드러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율법이 사람의 죄를 드러내기는 해도 치료할 수 없음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큰 아들은 동생을 절대로 용납하지 못해도 아버지는 다르다. 아들은 돌아온 식구에게 과거를 기초로 무정한 심판과 아픈 정죄를 가하지만, 그러나 불쌍한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사랑과 감격은 점점 커져만 갔다.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짓고 상심해 있는 아들이지만 벌은 고사하고, 더 조심스럽게 보살펴야 하는 어린 아들이다. 결코 아들의 죄가 가벼워서가 아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깊어서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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