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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하 교수의 영화로 보는 신학담론 http://blog.kcmusa.org/ryusiha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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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과 함께 2- 인과 연>의 한 장면

지금 극장가에 한창 상영 중인 <신과 함께>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017년에 <신과 함께 - 죄와 벌>이라는 제목으로 개봉 16일만에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을 했습니다. 이어서 나온 작품이 지금 상영되고 있는 <신과 함께 2 – 인과 연>이라는 영화입니다. 역시 개봉 14일째 천만 관객을 돌파했습니다(연합뉴스 8.14). 두 편 모두 천만 관객을 동원한 한국 영화는 이 영화가 처음일 것입니다.

<신과 함께>, 이 영화의 무엇이 사람들의 관심을 그렇게 끌 수 있었을까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순히 판타지의 매력인지, 아니면 영화가 담고 있는 스토리의 재미와 감동이 특별한지 하나로 특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하나의 이유는 이 영화의 모티브가 오늘날 현대 한국 관객들의 마음에 담긴 생각과 정서와 일치했다고 봅니다.

여기서 모티브(Motif)란 사람의 생각 저변에 있는 이야기의 기초 단위나 이야기의 알갱이로서 이야기의 창작과 상상의 소재가 되는 것들을 말합니다. 특히 영화의 공감 모티브를 이해하면 영화에서 사람들이 표현하고 싶어 하는 정서나 그 원인들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현대 흥행 영화를 신학적 담론의 소재로 삼는 이유가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흥행 이면에 있는 사람들의 내면의 모습을 조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과 함께>의 흥행의 성공은 오늘날 현대인들의 코드와 영화의 공감 모티브가 일치했다는 말입니다. 영화는 흥행 코드를 찾아 돈을 벌어서 좋지만, 그 흥행이 오늘날 사람들의 욕구나 생각을 잘 대변했다면, 영화가 찾아낸 이 시대의 현대 한국인들의 생각과 정서에는 아무런 문제는 없는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영화는 지옥을 모티브로 삼고 있습니다. 저승차사라든지 염라대왕이라든지 이러한 용어와 지옥의 종류들 때문에 이 영화를 쉽게 불교 영화라고 단정하실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의 내용을 소재로 사용했다고 불교 영화라 말하는 것은 조급한 판단입니다. 지옥이라는 모티브는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종교가 존재하는 곳에는 반드시 존재하는 이야기 - 모티브입니다.

실제 <신과 함께>는 단테의 “신곡”의 지옥 편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차사를 등장시켜 망자의 지옥 심판을 변론하게 하는 모습은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의 대변자와 변론자로 계시하는 기독교의 신앙에 오히려 더 가깝다고 봅니다(롬 8:26; 요 16:7). 불교에는 재판정에서 죄인을 변론하는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화와 같은 이야기를 문화인류학적으로 거대담론(Meta Narrative)이라 합니다. 거대담론(Meta Narrative)이기에 사람들의 생각과 정서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영화 <신과 함께>의 이야기 전개의 전제는 이렇습니다. 저승법에 따라 모든 인간이 심판을 받고, 살인, 나태, 불의, 거짓, 배신, 천륜과 같은 7개의 재판을 통해 지옥문을 통과해야 하는 망자는 환생하여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망자의 심판을 돕는 저승사자이자 변호사 역할을 하는 3명의 차사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은 망자, 소위 “귀인”을 도와서 여러 심판을 무사히 통과하게 해서, 49명을 환생시키면 자신도 환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집니다.

이 영화에는 게임의 원리가 적용되어 있습니다. 7개의 재판과 지옥을 통과해야 하는 것, 승자에 대한 보상 등을 통해서 이야기의 긴장감을 가질 수 있도록 게임의 원리가 적용된 장치가 있습니다. 지옥과 천국, 죄와 벌, 이러한 모티브는 모든 종교가 가지는 종교적 프레임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종교적 색채라기보다는 게임의 요소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작의 특징인 호기심의 원리가 극적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될까라는 호기심, 다음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의도적으로 만들어갑니다. 특히 <신과 함께 -인과 연>의 경우는 스토리 자체에 주인공들의 과거 이야기를 통해 그 정체가 누구인지를, 어떤 사연이 있는지를 조금씩 보여줌으로 관객을 호기심으로 이끌어 갑니다.

게임이든, 호기심이든 궁극적으로 그 목적은 ‘재미’입니다. 결론적으로 영화의 모티브들 가운데 오늘날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낸 원인과 요소는 ‘죄와 벌’, ‘착한 사람’ 모티브를 통해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신파적인 요소라기보다는 ‘재미’와 ‘흥미’라는 요소라고 봅니다. 1, 2편을 통해 연이은 1000만 관객 동원은 기독교인들이 포함해서 종교와 상관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봤다는 증거입니다.

<신과 함께>는 한국, 중국, 일본인들의 세계관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메타 - 내러티브의 하나인 지옥 모티브를 가지고 게임과 같은 드라마를 만든 영화로, 게임과 드라마에 빠져 있는 오늘날 현대인들의 특징을 반영한 것입니다. 게임 문화에 익숙한 젊은 세대, 드라마에 중독되어 있는 중장년 세대의 특징과 기호에 적중했다고 봅니다.

‘게임’과 ‘드라마’, 이것은 오늘날 현대인의 삶과 신앙을 다루어야 할 신학 담론의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이 칼럼에서도 ‘중독’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부정적인 개념과 편견을 먼저 제시했습니다. 이 점이 담론의 주제입니다. 게임과 드라마의 개념과 역할을 재평가해야 합니다. 오늘날 게임과 드라마에 중독된 현대인들, 특히 게임에 푹 빠져 있는 아이들 세대를 바라보는 부모들의 입장은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게임 세대의 미래를 우리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자료와 실제적인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혹, 있다면 부정적인 결론으로만 이끌어가는 사건, 사고, 병리현상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원시시대에 불(火)이 인류에게 주어졌을 때도 부모의 걱정은 동일했을 것입니다. 화상과 화재에 의한 재해에 대한 두려움이 먼저였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 불을 지배하지 못한 동물들은 그 불에 지배당했지만, 그 불을 활용한 인간은 문화와 문명을 발달시켰음을 보여줍니다. 게임과 드라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특징을 거부하다가, 어쩔 수 없어 떠밀려 수용하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현실로 받아들여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도 어쩔 수 없는 신문화의 수용과 비슷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사사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나라처럼 자신들에게도 왕을 세워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왕은 너희를 더 힘들게만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계속 구하자, 하나님께서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사사 시대에서 왕국 시대로 넘어갔지만, 하나님은 그 왕국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 가셨습니다(삼상 8장).

게임이나 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프레임과 요소에 대한 신학적 재조명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4차 산업 시대로 진입하게 되면 사람들의 노동 시간은 급속하게 감소됩니다. 그러면 노동 이외의 시간에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지금의 신학과 철학으로서는 시원한 답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진보적 신학자라 평가되어온 몰트만과 같은 신학자들의 데오 드라마(Theo - Drama)로서의 성경, 놀이의 신학(Theology of Play)과 같은 신학적 화두에 관심을 가져볼 때라고 봅니다. 쉼, 안식은 전통적 신앙과 함께 오늘날 현대인들을 위한 신학적 주제로서 함께 연구해야 할 과제라 봅니다.


류시하(월드미션 대학 성서학 교수)

▲ 영화 <쇼생크 탈출 (Frank Darabont, 1994)>의 한 장면과 <박하사탕, (이창동 감독, 1999)>의 포스터

죽음의 충동에 대해서 생각할 때 떠오른 영화 중에 명장면으로 포스터를 장식하고 있는, < 박하사탕, (이창동 감독,2000)>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마치 <쇼생크 탈출> 에서 주인공 듀플레인이 하수구를 통해서 탈출에 성공했을 때 빗속에서 두 팔을 벌리고 “자유다”를 외치는 듯한 모습입니다. 유사해 보이지만 그러나 <박하사탕>에서는 뭔가 전혀 다른 슬픔이 전해져 옵니다.

<박하사탕>의 주제가 무엇일까요? <박하사탕>이라는 제목이 주는 느낌처럼 시원함과 달콤함이 담긴 순수했던 첫 사랑에 대한 이야기일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 그렇습니다. 하지만 <박하사탕>의 중심 모티브는 결국 죽음을 선택한, 고뇌하는 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입니다. <박하사탕>은 지우고 싶은 한국 현대사의 격동의 시대의 아픔을 겪은 상처받은 중년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특정한 시대에 특별한 경험을 한 사람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각각의 이유는 달라도 평범한 인간의 번뇌와 고뇌를 겪고 있는 한 중년 남성의 죽음에 대한 충동을 모티브로 가지고 있습니다.

<박하사탕>은 한 세기를 마감하는 시점 1999년 10월에 부산국제영화제에 개막작품으로 첫 선을 보였던 영화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2000년 1월 1일에 개봉되었는데,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한 인간의 절규에 담긴, 인간의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룬 영화임에도 당시로서는 아주 많은, 24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흥행작품이자 문화 예술계에 화두가 되었던 영화입니다. 영화에 담긴 상징들이 하나의 문화적인 신드롬이 되었던 영화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인공인 영호는 대학시절 농활을 가서, 우연히 박하사탕 공장에 다니는 한 소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쑥스럽고 풋풋한 사랑이 가슴에 저며들기도 전에 영호는 군에 가게 되고, 소녀는 그를 면회를 갑니다. 서로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이 자랍니다. 그러던 중 광주사태가 발생하고 영호는 그곳에 진압군으로 차출되어 폭력진압에 동원됩니다. 그리고 영호는 진압군을 피해 도망가던 청년을 향해 의도하지 않은 총탄을 발사해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그 후 공안경찰로 수 많은 사상범에게 가혹한 고문을 행하며 폭력을 행사합니다.

결혼을 하고 겉보기엔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었지만, 사실 영호는 가정에도 마음을 두지 못합니다. 그는 군에 가기 전 농활을 가고, 박하사탕 공장 소녀에게서 박하사탕을 받았을 때의 때묻지 않은 시절로 돌아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처음 소녀를 만났던 그 곳 강변에서 달려오는 기차 선로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선로에 서서 다가오는 기차를 향해 마지막 절규를 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이 영화를 생각하면 떠올리는 명장면은 마지막 장면입니다. 흘러가는 강물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철로 위에서 터널을 통과해서 다가오는 기차 앞에 마주선 주인공 영호 역을 맡은 설경구가 고뇌에 찬 모습으로 울며 절규하는 장면입니다. 주인공은 /"나 다시 돌아 갈래!/"라고 하면서 터널에서 나오는 기차에 몸을 맡깁니다. 영화는 한 인간의 죽음의 충동과 다시 시작하고 싶은, 다시 순수했던 과거의 삶에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열망을 영상으로 담아냅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는 죽지는 않았어도 죽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죽으려는 욕망과 그 시도는 사실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파괴하기 위한 것일 경우가 많습니다. 죽음의 충동은 회귀를 갈망하는 꿈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죽음을 영화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박하사탕>은 시작에서 실제가 아닌 영화의 영상 효과로 거꾸로 가는 배경, 거꾸로 달려 가는 기차를 통해 시간을 돌려 놓음으로 과거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현실의 우리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돌아갈 곳은 없고, 가야 할 곳만 있습니다. 가야 할 곳에 가지 않는 것, 성경은 이것을 죽음이라 합니다. 돌아 갈 곳이 없는 죽음, 가야 할 곳이 없는 삶은 거의 같은 것입니다. 삶의 목적지를 잃어 버린 삶은 죽은 삶과 같습니다. 신앙의 목적지, 가야 할 곳을 잃은 삶은 죽은 신앙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잊어버리고 싶은 과거, 지우고 싶은 과거, 돌이키고 싶은 과거가 있을 수밖에 없는 아담의 후예인 인간의 영혼은 "다시 돌아가자"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선포가 “회개하라”는 외침으로 시작하신 것 같습니다. "회개하라, 돌이키라"는 외침엔 길 잃은 영혼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첫 아담의 죄로 죽은 인간의 영혼을 깨우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가기 위해서는 죽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은 생각을 하는 인간의 양심은 결국 죽음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숨겨진 희망이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죽을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일하게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의 좌절과 절망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버릴 수 있기 때문에 결코 그의 삶이 파괴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절망에 대한 영원한 해독제를 가졌다고 합니다.

죽음의 충동은 인간의 본질적인 죄성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인간의 파괴성에 근거한다고 봅니다.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타인에 대한 파괴와 폭력성, 사디즘보다 사실 자기 파괴성, 메조키즘이 더 오래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디즘이든 메조키즘이든 파괴성에서 둘 다 같은 것입니다. 죽음, 특히 자살이라는 것이 얼마나 파괴적인 것인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시작은 자신의 새로운 삶을 위한 파괴이지만, 그것이 곧 타자에 대한 파괴와 폭력으로 변한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한 가정의 가장의 자살은 그 가정의 파괴와 상처를 가져오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폭력의 시작은 순간적인 감정의 충동의 분출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살 충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죽고 다시 시작하고, 다시 태어나는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은 모든 종교가 가지는 특징입니다. 부활의 종교로 알려져 있는 기독교만의 특징은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에 기인하는 바람과 욕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인간이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선험적인 지식의 원형에 담긴 모티브일 수 있습니다.

<박하사탕>은 본의 아니게 폭력에 가담해 가해자로서의 경험과 그로 인해 정신적 피해자가 되어 버린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누가 폭력의 피해자인가? 폭력은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폭력의 피해자에게는 그 독이 온 몸에 퍼져 멍이 되고 피가 되지만, 가해자에겐 정신이 파괴되어 짐승이 되거나, 짐승임을 거절할 때 그 절망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음을 영화는 보여줍니다. 폭력은 모두를 피해자로 만듭니다.

자신에 대한 폭력인 죽음은 아무리 미화해도 결과는 아픔입니다. 가끔 훌륭한 사회운동가나, 노동운동가, 존경받는 정치가가 갑자기 불미스런 행동 때문에 수오지심(羞惡之心)의 마음으로 유언을 남기고 생을 포기하는 기사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희생과 자살, 그 어느 쪽이라고 쉽게 판단할 수 없을 때가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들은 자신의 폭력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폭력은 모두를 피해자로 만들게 되고, 모두에게 아픔을 남기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류시하(월드미션 대학 성서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