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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하 교수의 영화로 보는 신학담론 http://blog.kcmusa.org/ryusiha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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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운전사> (장훈 감독, 2017) 포스터

2017년에 개봉한 영화 중에 송강호 주연의 <택시 운전사>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발생한 광주 민중 항쟁이라는 비극적 역사를 한 개인의 눈으로 바라본, 코믹하면서도 사실성 있고 감동적으로 그려낸 영화입니다.

5·18 광주 민중 항쟁은 역사적 의미를 넘어 인도주의 차원에서 6·25 남북전쟁 이후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는 안 되는 또 한 번의 민족적 아픔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도 아닌 같은 나라 사람을 개인, 또는 정치적 단체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희생시킨 잔혹한 범죄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유도 모르는 채 희생을 당한 아픔이었습니다. 부끄러운 한국의 위정자들이 역사에 남긴 흔적입니다. 그래서 많은 예술가나 극작가들이 이것을 조명하고 흔적을 남기려 했지만, 정치적 편향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광주 민중 항쟁 자체가 정치적 조치였기에 정치적 이해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인도주의적으로 해석될 수 없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왜 시민들이, 약자들이 위정자와 같은 강자들의 자기 목적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되어야 하는가? 전쟁을 왜 해야 하는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이전에 이러한 현실이 우리 개인에게 발생했을 때 지극히 평범한 한 개인으로서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영화 <택시운전사>는 나름의 답을 제시합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자기의 친구 집에서 월세를 살며 아내 없이 딸을 키우는 개인택시 운전기사의 이야기입니다. 김만석이라는 운전기사는 우연히, 아니 의도적으로 다른 택시기사가 광주까지 모시고 다녀올 예정인 한 외국 손님을 가로채, 일당치곤 꽤 많은 택시비를 받기로 하고 광주로 떠납니다.

의외로 많은 일당을 받기로 해서 만석은 들뜬 마음으로 차비를 받으면 그것으로 밀린 월세도 내고, 딸에게 예쁜 구두도 사주려고 신나는 마음으로 장거리 손님을 태우고 광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뉴스나 주변 사람들에게서 전해 듣지 못했던 알 수 없는 일들이 광주에서는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냥 장거리 택시비나 벌어보고자 광주로 떠난 만석은 거리를 지나면서 시위 군중들을 보게 됩니다. 할 일 없는 대학생들이 하는 데모려니 생각하며, 무심히 지나치려는 만석은 어느 덧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적 사건과 현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택시 운전사>는 돈을 벌려고 광주로 갔다가 그곳에서 일어난 참혹한 비극을 목격하게 된 택시 운전기사의 눈으로 본 5·18광주 민중 항쟁과 그의 개인적 삶에 일어난 변화의 과정이 담겨 있는 영화입니다.

여기서 앞서 제시한 신학적 담론의 주제를 나눠 볼까 합니다. 아주 평범한 한 개인에게 엄청난 일이 닥쳤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역사를 논하고 나라를 구하거나 인류를 구원할 만한 어떤 선택이 우리 앞에 놓였을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우리가 교회에서 너무나 자주 듣는 답은 이렇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義), 즉 대의(大義)를 선택하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실제적인 질문은 “우리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는 도대체 어떻게 이루는가?”라는 것입니다.

때론 정치가나 위정자들처럼, 교회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라는 이름으로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최대 다수를 위한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선택을 하게 됩니다. 99마리의 양의 안전을 위해 길 잃은 양을 포기하고 버리는 선택을 최선이라고 가르치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라 해석할 때가 있습니다.

아흔아홉 마리냐, 한 마리냐, 이 선택에서 우리는 성경적 논리- 예수님의 직접적인 답변과 선택을 따를 수밖에 없음에도, 실제에서는 인간의 보편적 논리와 공리를 선택하게 됩니다. 공리, 그것을 대의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이냐, 나라냐? 성경도 개인의 사사로운 유익이 아니라 그의 나라를 택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나라가 잘 되면 개인도 잘 되지 않느냐는 논리에 우리는 순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나라인가? 개인이냐? 아흔 아홉인가, 한 명인가? 사실, 이 모순적인 두 말씀이 한 분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하나를 성취할 수 있다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둘 다 가능하기에 이렇게 제시합니다. 논리가 안 될 때는 기적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법 아래서 통치되기를 바라시기에 전격적인 기적에 앞서, 섭리와 순리를 제시합니다. 그것이 운행되도록 역사를 이끌어가는 사실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이 신학적 딜레마 아니, 신학적 담론의 주제인 질문에 답하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 한 사람, 한 사람, 자신의 소명을 다하므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구하는 위대한 영웅은 예수님 한 분으로 족하다는 것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두 분의 예수는 우리에겐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시기 전 사사시대의 삼손처럼 나라를 구하기 위해, 그렇게 위대한 일을 이루기 위해 대단한 능력과 힘이 요구되는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시대를 사사시대가 아니라 은혜의 시대라고 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부르신 소명과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나처럼 아들 낳기를 소망한 여인이 아들을 낳기 위해 눈물로 기도한 것은 나라를 구하는 것과 같은 위대한 간구는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한 개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바람과 간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바랐던 왕정시대를 열어준 마지막 사사이자 제사장인 사무엘을 탄생시키고 나라를 구합니다.

택시 운전기사는 돈을 벌기 위해 손님이 가고자 하는 곳까지 다 가지 못했을지라도 갈 수 있는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 주고 손님을 두고 와도 그만큼만 돈을 받으면 이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석은 달랐습니다. 그는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광주에서 사정기관에 쫓기게 된 외국인 손님을 광주 민중 항쟁의 한복판에 내버려두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다가 딸에게 전화합니다. “미안하게 되었다”고, “늦을 것 같다”고, “손님을 모시고 와야 하는데 두고 왔다”고. 그리고 다시 불바다인 광주로 손님을 데리러 갑니다.

영화는 그 결말을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만석이 멋모르고 광주로 데리고 갔다가 가까스로 서울로 데려온 그 독일 기자로 말미암아 광주의 소식이 전 세계에 알려지고, 많은 사람이 광주 사태의 숨겨진 진실에 대해서 소리를 내면서 광주사태는 한국 민주화의 시발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화 끝에 실제 독일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이 있습니다. 왜 광주에 가게 되었냐고? 독일 제1공영방송 기자인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의 대답은 “그냥 기자이기 때문에 갔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를 구하겠다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냥 기자이기 때문에……. 그것이 다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주어진 사명을 다하고자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그분 뜻대로 이루어간다는 성경의 메시지를 이 영화가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직업에 충실할 때 그 일은 소중한 전문직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영화는 <택시운전기사>라 하지 않고 <택시운전사>라고 제목을 정한 것 같습니다.


류시하(월드미션 대학 성서학 교수)
우리는 여기서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선택받지 못한 자'의 아픔과 사연을 통해 하나의 신학적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택하시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누구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시는가?" 이것은 오랜 세월 신학이 다루어 온 문제이자, 주제였습니다. 칼빈과 같은 신학자는 하나님의 선택에는 조건이 없다면서, 무조건적 선택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무조건적 은혜의 선택은 하나님의 작정에 달렸지, 선택받는 자의 의지와는 상관없다고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의지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한 행실도, 믿음을 선택하는 그 바람도 선택받는 구원과는 직접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너진 건물의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 있던 아이들처럼 엄마의 선택에 따라 택해지는 것입니다. 아이가 스스로 살아나올 수도 없고 자기를 택해 달라고 말할 수없는 것처럼 구원 앞에서 인간은 받아들임, 그 외에는 선택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택함 받지 못한 자의 아픔과 상처는 누구의 몫이며, 책임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예정된 자만이 택함을 받는다는 것이 그 답이며, 개혁주의 기독교의 교리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시는가? 이 질문은 칼빈의 예정설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질문되어온 신학사의 한 담론이었습니다.

이 담론을 목회의 현장에서 신학적 답변을 이끌어낸 청교도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드는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은 조건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사실 그분께 가까이 있는 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더 있다"라는 것입니다. 마치 비 오는 날 벼락이 임의로 땅에 내리치지만 높은 탑, 뾰족한 곳이 벼락 맞을 확률이 더 높은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높은 곳이어서가 아니라, 높은 곳이기에 천둥 번개가 내리칠 확률이 높다는 뜻입니다.

예정론이란 고난으로 점철된 부조리한 현실에서는 하나를 먼저 구원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하나님의 섭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난과 종말의 메타 나레이티브가 시사하는 것입니다. 영화에서처럼 둘 다 구원하기를 원하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현실이나, 미래의 종말이나 삶에는 선택이 항상 존재합니다. 그 선택에 대한 섭리와 예정은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과 작정이라고 설명하기보다는 누가 그분의 곁에, 그분의 눈앞에 가까이 있는가의 사실이 엄마의 마음을,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원인이라 생각해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유업을 받을 자이기에 먼저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가족의 미래를 위한 소망을 이룰 자를 먼저 택했다는 현실입니다. 이 영화에서 아들을 택하는 엄마의 선택을 같은 동양인으로서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딸아이에게는 더 깊은 상처를 줍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습니다. 어쩌면 이보다 더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기에 부모는 끝까지, 아니 평생 그것에 대한 자책과 아픔을 지고 삽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도 이와 같은 마음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구원은 조건 없는 선택이지만 제한적이라고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 다른 장에서 택함 받은 자와 택함 받지 못한 자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라고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머리로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읽는 것입니다. 이 모순적인 표현은 아버지로서 부모의 마음을 말씀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 후반절의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이 마치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어머니 마음, 두 아이 모두 살리기를 원하지만 결국 한 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의 어머니의 뜻과 마음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의 결말처럼 간절히 구원을 바라는 자들에게도 마침내 구원이 있다고 믿습니다. 다시 사는 삶과 그 삶의 회복과 화해가 먼저 선택받지 못했지만,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먼저 택함 받지 못해서, 하나님의 계획과 뜻, 그리고 그 마음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과 화해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우리가 찾아가면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사랑과 기다림으로 반기실 것입니다. 혹 하나님께서 선택과 운명, 현실과 한계라는 상황에서 나와 당신이 먼저가 아니어서 우릴 두고 가셨다면, 아직도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저 그분께 가면 됩니다.




류시하 (월드미션 대학 성서학 교수)
많은 영화는 재난을 소재로 다룹니다.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실존과 부조리를 다룹니다. 이런 이야기는 영화보다 성경이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이 지진, 지구의 종말, 인류의 종말에 관한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재난과 종말의 이야기는 결국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는가 하는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에는 구속사를 이야기하기 전에 인간의 재난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래서 재난과 종말은 인류의 메타 나레이티브의 일부입니다. 재난은 인간의 긴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삶의 일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중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중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고 감동을 전하는 영화 가운데 빠질 수 없는 장르가 바로 재난 영화입니다.

1976년 7월 28일에 일어난 탕산 지진으로 헤어진 가족의 이별과 재회를 그린 대지진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83회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 부문 중국 대표 작품입니다. 현장감을 아주 잘 살린 중국 최초의 70mm IMAX라고 영화로 소개됩니다. 이 영화를 예로 택한 이유는 재난의 참혹함에 대한 신학적 담론이 아니라, 이 영화의 핵심 스토리 라인이 선택과 선택받지 못한 자 사이의 상처와 아픔을 통해 신의 섭리, 하나님의 구원과 예정에 관한 신학적 담론을 나누기 위함입니다.

1976년 무더운 여름, 이란성 쌍둥이인 아들과 딸과 함께 여느 가정처럼 단란하게 살아가던 한 평범한 가정에 예기치 않은 재난이 닥칩니다. 엄마와 아빠는 일을 하러 가고, 쌍둥이들만 자고 있던 그 밤에 강도 7.8의 대지진이 일어납니다. 한순간에 온 마을과 도시가 무너지고 집들이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부부는 집으로 급히 달려가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아파트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아이들을 구하려고 아버지는 달려가지만, 아이들과 함께 아버지도 무너진 건물 밑에 깔리고, 이 세 가족은 순식간에 엄마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실제 당시 대지진 23초에 27만 명이 죽거나 사라졌다고 합니다.

가족을 잃은 엄마는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찾습니다. 이미 남편은 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엄마는 건물 잔해인 콘크리트 더미에 깔렸지만 아직 살아 있는 두 아이를 발견합니다. 엄마는 사람들과 구조대의 도움으로 아이들을 구하려 하지만 콘크리트 더미의 한 쪽을 들면 다른 한 쪽이 무너져, 두 아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둘 다 구해야 한다!"고, "둘 다 구해야 한다!"고 외치지만 결국, 한 아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 엄마는 "그럼 아들을 살려 달라!"고 합니다. 그 한마디의 말을 딸아이는 듣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 그리고 한 방울의 눈물과 함께 딸은 죽어갔습니다. 시신들을 수습하는 장소에서 엄마는 죽은 딸아이를 업어다 남편 곁에 눕힙니다.

그리고 얼마 후 비가 내리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죽은 줄로 알았던 딸아이가 살아났습니다. 딸아이는 보호소를 통해서 중년 부부에게 입양되고, 그들에게서 양육됩니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딸아이는 엄마를 찾을 수 있었지만 찾지 않습니다. 그리고 엄마와 아들은 죽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어느 날 다시 중국 쓰촨성에 지진이 일어나고 자원봉사자로 딸아이는 참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엄마가 처했던 상황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한 어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건물 잔해에 깔려있는 자녀를 살리기 위해서 아이의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그 어머니를 통해 딸은 자신의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극적으로 엄마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엄마는 무릎을 꿇고 눈물로 딸에게 용서를 빕니다. 딸아이도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엄마가 수십 년 동안 딸아이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 속에서 고통 받으며 살아가도록 내버려 둔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뒷편에서 계속 됩니다>


류시하 (월드미션 대학 성서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