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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하 교수의 영화로 보는 신학담론 http://blog.kcmusa.org/ryusiha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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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범죄의 도시 Outlaw, 2017” 포스터. 출처: IMDb

영웅주의 영화가 대체로 폭력과 액션을 다루고, 폭력 영화는 그 안에 징벌적 폭력을 행하는 주인공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액션영화를 흥행하게 하는 하나의 분명한 원인과 이유라 앞서 설명했습니다. 영웅주의 영화와 액션 장르의 영화는 많은 사람들의 내면의 억압된 파괴적 욕구와 권선징악이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질문을 영화의 고유의 방식을 통해 해결해 갑니다.

“범죄의 도시”는 2017년에 100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한국에 밀입국해서 시장 상인들을 괴롭히는 조선족 조직폭력배를 폭력조직들보다 더 파괴적인 액션으로 시원하게 싹 쓸어버리는 강력계 형사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관객이 매료되는 것은 권선징악이라는 윤리 아래 펼쳐지는 폭력의 정당성 그리고 쇳덩이 같은 강력계 형사의 팔뚝과 주먹이 만드는 폭력의 미학적 쾌감입니다.

이와 같은 영화에서 액션은 영웅의 스토리를 강화시키기도 하지만 독자적인 역할로 폭력의 미학을 통해 청중의 무의식과 대화를 합니다. 폭력을 감히 미학이라고 이름 하는 것에 대해서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폭력은 나쁜 것인데 아름다움의 표현이라는 뜻으로 폭력을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냐?는 것이지요.

인간의 파괴적 본성을 만족시키는 폭력을 소위 액션장르가 흥행의 요소로 선택하는 이유는 폭력이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폭력은 파괴를 통해서 새로운 창조를 시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파괴는 새로운 창조의 시작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미화시킬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새 창조는 심판과 파괴를 통해서 이루어짐을 성경은 계시하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종말에 하나님께서 공의와 심판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겠다는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폭력은 나쁜 것이다. 심판은 나쁜 것이다”, “복수나 정의는 바람직하지 않다”, “폭력은 비성경적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개인적인 성경적 입장은 폭력은 하나님의 바람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러나 새 창조를 위한 파괴도 비 성경적인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인간의 타락이 없었다면 심판도 징계도 인간에게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간은 마지막 날 심판을 받습니다. 죄와 벌, 권선징악이라는 선험적인 진리가 인간에게 존재하는 이유는 이러한 파괴를 통한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이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벌, 그것을 인간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폭력의 다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선 죄를 범한 인간들이 자기들 힘으로 그 죄로 쌓아 올린 소돔성과 바벨탑과 고모라와 여리고 성을 부수고 파괴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파괴 폭력이라 하지 않고 심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폭력이 아닌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공의와 정의가 빛이라면 폭력은 그 실체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온 세상에 광명한 날이 오기 전까지는 빛과 그림자가 이 세상에 공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폭력은 심판의 도구로 억울한 약자와 소자들의 원통함을 풀어줍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앞에서 심판하시지 않기에 누군가가 대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폭력은 받아져야 하는가? 안 됩니다. 심판의 주권자는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심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윤리적 입장이 있습니다. 절대적 윤리의 심판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뿐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반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대리자로 인간은 얼마든지 하나님이 주신 선험적 윤리나 자연법에 반하는 것에 대해서 저항하고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멈추기를 거절할 때는 파괴와 폭력도 용납할 수 있다는 상대적인 입장도 공존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치 히틀러의 압제와 독주를 막기 위해 암살 테러를 시도한 독일 신학자 본회퍼의 신학적입장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악인에게는 심판이 존재해야 합니다. 악인의 독주를 멈추고 새로운 세상을 재건축하기 위한 시도로서 파괴는 필요악일 수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또한 악인에 대한 심판이 이 땅에서 그 집행이 유예되는 이유는 신의 자비,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그 크기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착한 소시민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악당과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집행유예, 그것을 우리가 참지 못한다면 소자(小子)인 개인도 하나님의 긍휼을 마땅한 은혜로 기대한다는 것 또한 자기모순일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폭력의 미학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심판할 수 없기에 상상의 날개를 펴서 악인의 미래를 그려내는 것입니다.


류시하(월드미션 대학 성서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