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하 교수의 영화로 보는 신학담론 http://blog.kcmusa.org/ryusiha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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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A Beautiful Mind, 2001

19세기 사회를 묘사했다고 평해지는 <지킬박사와 하이드> 이 고전은 영화로 연극으로 많이 연출되며 클래식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와 같은 소설이 고전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마치 오늘날 영화가 흥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너도, 그리고 나도 같은 뭔가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뭔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사람 안에 있는 나아가 사회 안에 있는 선과 악의 공존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학적인 측면을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한 인간이 가지는 속성에 기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특징을 잘 모르고 간과하다가 그러한 증상이 극단적으로 될 때 한 번 생각해 보거나 혹은 그러한 증상을 가진 사람을 이상인으로 취급하고 그 사람을 병적으로 몰아갑니다.

죄와 선이 공존하는 실제로서의 인간, 광인의 마음과 지극히 정상인의 마음이 공존하는 현상은 우리는 모두 가지고 실제입니다. 성경에서 기록된 바울의 고백에서 우리는 쉽게 이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7장 21-24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본성의 분열적 현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죄가 힘을 얻어 극단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때까지 그것을 모르거나 그 존재를 알지만 잊어버립니다. 이것은 귀신들림과는 다른 것입니다. 귀신은 외부의 다른 존재가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죄와 귀신을 악에서 나온 같은 실제로 본다면 우리들의 이해는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과 함께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극단적인 실제의 존재성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선과 악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죽을 수도 다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갈등을 다룰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힌트를 주는 영화가 있습니다.

천재 수학자 존 낸시의 실제 역사적인 인물을 극화하여 만든 영화 <뷰티풀 마인드, 2001>라는 영화입니다. 실제 ‘존 내시’는 게임이론에 대한 새로운 분석으로 제2의 아인슈타인이라 불린 인물이지만, 50년 동안 정신분열 조현증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겨내고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 영화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살아냅니다.

주인공은 천재성으로 MIT 교수가 되고, 그리고 국가 정보기관에 협조하기도 했는데, 영화상에서도 현실과 공상 환상이 구별 안 될 정도로 영화 같은 이야기가 그의 삶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러나 존은 그러한 삶 속에서 점점 황폐해져 가는 자신의 영혼과 그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아내 알리샤의 사랑에 의지합니다. 그들은 함께 존을 그 환상 속에서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존 내시는 자신이 보는 세계 속의 사람들, 조카 마시와 친구 찰스가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먹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이 환상 속 인물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실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내시의 환상 속 인물들은 계속 나타납니다.

현실과 환상 가운데 고통 받지만 내시는 가상의 인격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살아갑니다. 보기도 하고 이야기하는 친구처럼 지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환상 속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거나 대화를 하지는 않습니다. 두 공간을 인정하고 인식하면서 두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정상적인 삶을 만들어 갑니다. 자신을 앎으로 자신의 다른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시는 그의 이상 증상을 극복해서 존경받는 학자로 은퇴하게 됩니다. 동료 교수들은 최고의 학자로서 존경을 표하는 전통으로, 그리고 정말 존경한다는 마음으로 은퇴하는 내시에게 자신들의 만년필을 선물합니다. 이렇게 영화는 끝이 납니다.

악과 선의 공존은 인류가 종말하기 전까지 이 땅과 인간의 마음 속에 끝까지 공존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를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not yet)으로 말합니다. 이 한 마디는 정의하기에는 어렵고 심오한 개념이지만, 성서학자들은 인간을 하나님의 나라의 “이미”와 “아직” 사이에 존재하는 실존으로 설명합니다. 빛과 그림자처럼 선과 악이라는 이 두 영역은 항상 다투듯 우리의 삶을 침노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역동적이고 그 역동성이 생명인가 봅니다.

선과 악, 선한 존재로서의 회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착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삶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삶을 이어가며 결국 그 나라를 누리며 맛보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악/죄를 다스리려야 합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타락했을 때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숨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을 찾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이 말씀은 죄를 완전히 없애버릴 수 없다면, 다스리라는 말입니다. 공중을 나는 새처럼 우리의 악하고 부패하고 음탕한 생각들이 우리들의 마음속을 날아다닐 때, 날아가는 새를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그 새가 우리의 머리에,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둥지를 틀지 않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일반적으로 우리는 공격적인 방법에 익숙합니다. 싸우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하려고 많은 구도자들이 절제도 하고 고행을 하기도 합니다. 지킬 박사나 내시가 겪은 증상을 다루는 정신과 의사처럼 약물로 역동적인 비정상 행동을 죽입니다. 이와 같은 처방은 방사선 항암치료처럼 건강한 세포까지 약하게 만들고, 죽기까지 하게 해서, 정신병동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현상처럼 멍청해지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바로 어떻게 보면 창세기 4장 7절의 말씀처럼 죄가 문 앞에서 있지만 그 문을 넘어 오지 않도록 다스리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그 존재를 인정하지만, 나의 주변의 삶을 넘어 나의 깊은 삶에, 그리고 다른 사람과 나의 관계에 끼어 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할까요, 영화에서처럼? 가능합니다. 영화가 사실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인간이 피조물로서의 사람됨의 본성을 인정하는 것이 회복과 변화 출발점입니다. 자신의 생명과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다면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공존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약함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약함을 인정하고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말씀합니다. 진리란 사실과 원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상의 원리와 그리고 영적인 원리만이 아니라 사실(Facts)을 알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알고 그것을 인정할 때, 그 때문에 야기되는 문제와 사실을 직시할 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앞서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확산되어가는 현대 아바타즘(Avatarism)이라는 문화 속에서 현대인들은 아바타와 같은 나의 인격이 새로운 세계에서 공존함을 인식하고 인정할 때라고 봅니다. <뷰티풀 마인드>에서 존 내시가 환상 속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던 방법처럼 두 공간을 인정하고 인식하면서 두 공간을 독립시켜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봅니다.


류시하(월드미션 대학 성서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