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하 교수의 영화로 보는 신학담론 http://blog.kcmusa.org/ryusiha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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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라는 단어는 모든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은 욕망이며 갈망입니다. 주체할 수 없는 생명력을 가진 존재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그 것입니다. 자유를 그것이라고 하는 이유는 어떤 이에게는 꿈이기도, 어떤 이에게는 본성이며,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작과 새 생명이기도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목숨과 전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모양과 이름은 다르지만 그 본질은 하나 ‘자유’입니다. 그래서 ‘자유’는 인간의 역사의 함께 시작된 모티브-이야기의 원형과 뿌리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인간의 무의식의 역사이자 본성입니다.

인간이 가진 자유를 향한 갈망을, 그 본질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1995년 스코틀랜드 역사를 소재로 삼은 헐리우드 영화로 폭발적인 흥행과 동시에 이제 하나의 고전이 된 영화인 <브레이브 하트(Brave Heart), 1995>입니다. 영국 역사에 있었던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을 다룬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제시하는 이유는 이 영화만큼 전쟁을 통해 죽음과 자유의 주제를 잘 다룬 영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쟁 영화는 별도의 장르에서 좀 더 깊게 다루어야 합니다. 전쟁은 인간의 금지된 장난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전쟁을 통해 사람들의 피와 목숨을 아낌이 없이 쏟아 부을 수 있는 목적과 대상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것입니다.

<브레이브 하트>는 영화의 소재를 역사에서 따온 것입니다. 스토리는 픽션에 가깝습니다. 픽션으로 다루는 이유는 역사적 고증의 결여 때문이 아닙니다. 헐리우드 영화의 특징은 사실주의에 입각한 역사물에 가깝기보다는, 사실에 근거한 표현주의에 입각해서 대중의 흥행코드에 초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 흥행코드가 바로 우리가 탐구하고 있는 공감 모티브입니다.

이 영화의 핵심 흥행 코드, 공감 모티브가 무엇일까요? 영화의 최고의 극적인 장면인 주인공 월레스가 처형 직전에 고통 속에 외친 그 한마디에 극적으로 담아냅니다. 자유(Freedom)! 프리덤…. 이 순간 아마도 영화를 본 청중들은 극장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한 남자의 외침이 쿵하고 심장에 치고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 저렇게 자신의 고통과 목숨까지도 바꿀 수 있는 자유와 독립이라면 나도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감동을 받게 하고, 아마도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면 우리도 죽으러 전쟁에 나아가게 할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기 전 사람들은 예수께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하려 했으나 예수께서는 맛을 보시고 거절하시며 마시고자 아니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마27:34). 사실 쓸개 탄 포도주는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손이나 발에 못을 박을 때, 못이 생살을 뚫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사형수에게 특별히 주는 마취제와 같은 것이었고, 예수께서는 그 고통까지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거절하셨습니다.

<브레이브 하트>의 마지막 부분의 플롯상 절정에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 장면을 미메시스(Mimesis-모방)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월레스는 스코틀랜드 민병 대장으로 같은 민족의 한 귀족의 배신으로 잉글랜드 군에 잡혀서 재판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반역행위에 대한 벌로 사지를 잡아당겨 몸이 찢겨져 나가는 고통의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반역을 인정하면 고통 없이 자결할 수 있는 기회를 받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아니면 고통을 느끼지 않게 마취약을 먹으라고 권하지만 월레스는 당당히 죽기를 위해 거절합니다. “고통 속에 자비(Mercy!)”이라고 외쳐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자신의 소리를 외치기 위해 머금은 마취약조차도 뱉어버리고 “자유(Freedom)”를 외치며 절규합니다. 이 절규에 담긴 한마디 자유 이것이 <브레이브 하트>의 공감 모티브입니다.

스코틀랜드의 독립 운동의 전설이 된 이 이야기는 자유를 위해 신대륙에 이주한 미국인들의 마음의 저변에 담긴 그들의 모티브, 그들의 이야기입니다. 나아가 삶과 노동,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 현대인의 마음 저 밑에 있는 자유를 향한 무의식의 이야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가진 모티브의 힘은 굉장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가 죽음과도 바꿀 수 있는 가치임을 영화는 말하고자 합니다.


류시하(월드미션 대학 성서학 교수)


2018년에 7월에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변산, 2018>이라는 영화는 “고향”이라는 모티브와 “아버지”라는 모티브, 그리고 “나쁜 남자” 모티브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서 하나의 모티브로 자연스럽게 통합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찾아가고픈 그리운 고향이 아니라 잊어버리고 싶은 고향, 그리운 어머니가 있는 고향이 아니라, 나쁜 남자인 아버지가 있는 고향에서 영화는 전개됩니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어머니가 죽고 고향 시골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온 문학소년 학수는 그의 시적 재능을 살려 아마추어 래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삶이 그렇게 녹록치 않고 뜻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낮에는 주차장 관리인으로, 밤에는 편의점 알바로 생활을 하며 그래도 꺼지지 않는 문학적 소질을 살려 그의 고된 삶과 인생을 랩으로 만듭니다.

학수는 최고의 래퍼가 되기 위해, 그리고 많은 상금을 따기 위해 래퍼 경연대회에 나갑니다. 하지만 번번이 결선에서 탈락합니다. 6회에 걸쳐 아깝게 떨어집니다. 그러던 중 학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고향의 한 병원에서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졌다고 연락을 받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한편 안쓰러움을 가지고 있던 학수는 친구들의 강권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좋은 게 없었던 학수에겐 고향은 가난, 집 나간 아버지, 난봉꾼 아버지, 엄마의 장례식에도 올 수 없었던 건달인 아버지, 그래서 가난해서 보여줄 것이 노을밖에 없는 폐항이었습니다. 그래도 학수에게도 학창시절 백일장에서 문학상을 받을 만큼 촉망받는 시절이 있었고, 풋풋한 고교시절 그가 좋아하는 여학생도 그를 좋아했던 아련한 추억도 있었습니다.

그가 고향에 내려온 것은 사실은 문학소년이었던 시절, 그를 좋아했던 선미가 자기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같은 병실에 계시는 학수 아버지의 부탁으로 고향으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시한부라는 진단을 받은 건달 아버지가 자신의 사정을 속이고 아들 학수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자 학수와 시간을 가집니다. 학수는 마음으로는 미워하지만 어쩔 수 없이 병원에서 같이 지내는 가운데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아버지를 향한 원망과 애증의 상처를 치유하고, 가족애를 회복합니다. 그 과정을 코믹한 사건들과 랩과 시로 그려 넣은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많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흥행에는 그렇게 성공했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영화라는 단편성 미디어에 많은 메시지와 모티브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였다면 아마도 더 좋았을 것입니다. 고시원 생활을 하는 오늘날 청년들의 아픔, 알바를 하면서 취직을 준비하는 청년, 고향을 떠나 꿈과 성공을 찾아 나선 이들의 마음, 기억하기 싫은 사람들, 실망, 가족애, 아버지, 어머니, 첫사랑, 그리움, 친구, 고향, 아름다운 풍광, 시, 래퍼의 삶, 등 많은 이야기의 모티브를 안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모티브는 나쁜 남자와 아버지입니다. 영화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의 결말처럼 세상엔 나쁜 남자는 있어도 나쁜 아버지는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집 나간 건달이었던 아버지가 고향으로 돌아오고, 죽기 전이라도 비록 건달이라도 자식에게는 진실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음을 보여줍니다.

세상에는 나쁜 아버지들이 있습니다. 자녀를 학대하고 가정을 버리고 상처주기를 넘어 자녀와 가정을 파괴하기까지 하는 아버지도 있습니다. 그래서 간혹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어렵고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아버지는 아버지이기를 거부하는 아직 나쁜 남자일 뿐입니다.

아버지는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그의 아이들을 자녀로서 사랑하면서 아버지가 되어갑니다. 자녀에게는 아버지의 사랑과 생명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아버지에게는 자녀를 향한 사랑이 심겨져 있습니다. 나쁜 아버지는 나쁜 남자의 껍질 속에 그 사랑의 씨앗이 움터나지 못했을 뿐입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나쁜 남자든 좋은 남자든 아버지의 사랑이 남자의 껍질을 뚫고 나올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버지는 남자가 아니라 아버지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라고 계시합니다. 그래서 간혹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왜 하나님께서 남자여야만 하는가? 여자는 아닌가?라고 질문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남자라고, 그리고 여자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라고 가르칠 뿐입니다.


류시하(월드미션 대학 성서학 교수)


2014년 한국 영화로 1400만 관객을 돌파하며 가족영화로서 흥행에 대성공한 작품이 있었습니다. 국제시장이라는 영화입니다.

피난민들의 정착지이자 삶의 터전이었던 부산의 국제시장이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 무대로 한 영화입니다. 국제시장에서 꽃분이네라는 조그마한 수입품을 운영하는 가게주인 윤덕수라는 이의 삶과 사연을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야기합니다.

그는 1·4후퇴 때 이북 함흥에서 피난을 온 사람입니다. 그의 가족은 흥남부두에서 구조선을 타게 되었는데, 덕수는 손을 잡고 있던 여동생을 놓치게 되고, 결국 잃어버리게 됩니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여동생을 찾으러 배에서 내리면서, 덕수에게 부산 국제시장에 있는 고모네가 하는 [꽃분이네] 가게를 찾아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자고, 만날 때까지 아버지 대신 네가 가장 노릇해야 하고, 장남과 가장은 가족을 잘 돌보는 것이라고 그에게 엄마와 동생을 당부하고 헤어집니다.

동생을 잃어버렸다는 죄책감과 아버지가 당부하신 장남이자 가장으로서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그의 운명이 되어 버립니다. 가족을 돌보기 위해 그리고 잃어버린 동생과 아버지를 기다리며, 그는 국제시장 그곳 장터를 떠나지 못합니다. 남동생의 등록금 마련을 위해 파독 광부로 독일로 떠나고 탄광 붕괴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고, [꽃분이네] 가게를 지키기 위해 돈을 벌려고 다시 베트남 전쟁까지 참여합니다.

긴 세월이 흐르고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통해서 잃어버린 여동생을 마침내 찾아 온 가족이 함께 모여 행복한 명절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행복한 그곳엔 아직도 보고 싶은 아버지는 없습니다. 그는 사진 속의 아버지와 힘들어도 힘들다고 못했던 그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영화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그 시대의 짤막한 일부라도 살았던 사람이라면, 그리고 아버지의 말없는 사랑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기 시작하는 나이가 된 이들이라면 아마도 분명히 마음을 울렸던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하며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영화를 보며 가족에 대한 훈훈한 감동과 감성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극장에는 가족들이 함께 보러 온 이들이 많았습니다. 자녀들에게 가족의 소중함과 사랑을 이야기로 전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서일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일으킨 이 영화의 모티브는 ‘아버지’입니다. 감독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버지이며 그 메시지는 아버지의 희생과 사랑에 대한 감사입니다. 많은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흥행 영화의 공통된 흥행 코드가 있습니다. 그 하나가 가족애입니다. 그 가족애 한가운데 있는 것이 아버지입니다. 어머니가 따뜻한 사랑과 보호의 이미지라면, 아버지는 땀과 피를 흘린 구원자로서 사랑의 모티브입니다. <국제시장>은 이를 잘 담고 있습니다. 가족을 위한 아버지의 희생과 사랑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이야기합니다.

한 편 이 영화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희생에 담긴 아버지의 잃어버린 자유를 말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신학적 담론의 주제입니다. 나쁜 남자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나쁜 남자와 같은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에 가깝다고 봅니다. 우리가 누리는 많은 것들이 그저 얻어진 것같이 여길 때가 많습니다. 너무나 당연히 받아들일 때가 많습니다. 아니면 내가 노력했기에 얻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혹 지금 누리는 우리의 누림과 자유는 우리를 위한 누군가의 포기와 잃어버린 자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질문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태어나 보니 그저 주어진 자유와 생명도 있습니다. 소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인간들의 자녀들처럼…. 하지만 이런 자유와 생명은 또한 쉽게 사라진다는 것이 진리인 듯합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처럼 그저 주어진 생명과 자유이기에 그들은 그들의 욕심으로 쉽게 그 자유와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의 자유와 생명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는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생명을 희생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구원자입니다. 독일 탄광에서 갱도가 무너져 내릴 때 영화에서 주인공 덕수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갱도의 흙더미 속에 갇혀 버립니다.

덕수의 아버지는 잃어버린 자녀를 찾기 위해 구조선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자녀를 찾아 떠납니다. 아이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구원자입니다. 이런 아버지를 기억하는 자는 그 자유와 생명을 잃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희생과 구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삶 속에 당신 자신의 삶이 없기에 자녀들에게 삶이 있는 것입니다. 힘든 시절에 태어나 이 고생과 희생을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어서 다행이라고 믿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그래서 힘들어도 힘들다고 못하는 그것이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자식은 그 사랑을 잘 모릅니다. 말을 하지 않는 사랑이기에 자녀들은 아버지와는 소통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은 감추어진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버지의 사랑의 형상이자 이 세상의 그 그림자입니다. 독생자를 희생하기까지 사랑하면서도 그것을 말할 수 없는 사랑이기에 인간은 쉽게 알지 못하고 알아도 쉽게 잊어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침묵 속에 감추어진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말하지 않는다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보여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가슴으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와 대화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아버지만큼 어깨가 벌어지고, 그리고 다시 아버지만큼 어깨가 좁아질 무렵에야 아버지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때는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됩니다.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신 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나 자유를 찾게 되는 것이 아니라 희생이라는,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진정한 가치는 진정한 희생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나치와 싸우며 기독교의 양심을 지키려 했던 신학자이자 목회자였던 본회퍼의 “기독교 교회 안의 값싼 은혜”에 대한 비판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보편화시키면 “가치는 희생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또 다른 희생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국제시장>의 마지막 장면은 덕수가 사진 속의 아버지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사진 속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함을 인정하고, 그 수고를 위로함으로 영화의 막을 내립니다.

현대 정신분석학에서도 아버지는 하나의 중요한 모티브의 역할을 합니다.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 신드롬입니다. 프로이드는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한 아버지와 경쟁하는 아들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향한 아들로서의 인간의 마음은 어쩌면 아버지와 경쟁하는 프로이드의 주장처럼 오이디푸스 신드롬의 본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극 중의 덕수처럼 아들로서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고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본성을 지녔다고 봅니다. 그것이 만족되지 않을 때 오이디푸스 신드롬처럼 아버지와 경쟁하는 본성으로 아버지를 파괴하는 자아로 왜곡되어 나타나는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특히나 맏아들에게 나타나는 하나의 심리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유를 잃어버림으로서 가족의 자유를 찾아주는 자입니다. 자신의 자유와 생명을 희생함으로 자식에게 주어진 생명과 자유를 찾아줌으로써 그 가족을 통해서 자신의 생명과 자유를 보고 누리게 되는 존재입니다. 소년에게 꿈이 있는 자유가 있다면, 우리의 아버지에게 자유를 희생한 꿈이 있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혈기 방장한 그의 젊은 제자 베드로의 미래 모습,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고 하셨는데, 이 베드로의 모습이 아버지의 모습이라 봅니다. 원하지 아니하는 곳에 가는 이유는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대중 영화의 흥행의 산실이라 불리는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서 역시 액션에 감동을 덧입히기 위해 아버지의 모티브를 사용합니다. 액션물로 너무나 잘 알려진 다이하드 시리즈에서도 랜섬처럼 많은 영화는 납치된 가족, 딸 혹은 아들을 찾기 위해 혈투를 버리는 아버지들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담아내기 바빴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영화는 인간의 본성에 담긴 모티브일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 그렇게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역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제시장>에서의 아버지의 모티브는 분명히 지금 우리가 누리는 행복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희생하신 아버지를 말합니다.

이 영화를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인상파의 작품으로 볼 수 있습니다. 1·4후퇴와 베트남 전쟁, 남북이산가족 찾기 등 한국의 근현대 시기에 일어났었던 실제 역사적 사실과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버지의 삶과 모습을 부각해서 조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작가의 상상이 담긴 이야기이지만, 그 이야기는 가상이 아닌 실제였던 아버지들의 마음과 감성을 담아냈기 때문입니다.

모티브 이외에 이 영화를 대중들에게 흥행할 수 있게 한 요소 중 하나는 극 중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상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실제 국제시장에 존재하는 “꽃분이네 가게”를 극 중 내러티브의 일부로 그리고, 이야기의 배경의 하나로 배치함으로 영화에서 극적 상징성과 사실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미장센의 역할과 힘을 잘 보여줬습니다.

영화의 흥행과 더불어 국제시장 특히 “꽃분이네 가게”에 몰려드는 수많은 관광객으로 당시 국제시장은 연일 시사뉴스가 되었습니다. “꽃분이네 가게”는 영화에서 단순한 배경이나 소품 그 이상입니다. 만남, 약속, 기다림, 아버지, 기억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상징입니다. 공감할 수 있는 상징은 대중화와 유행을 만들어내는 기폭제로 티핑포인트를 쉽게 만듭니다. 많은 유행과 흥행에는 간단하지만 상징성 있는 행동이나 이미지, 혹은 슬로건 등이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단순성이 상징을 만들고, 상징은 유행과 나아가 종교를 만들기까지 합니다. 기독교의 십자가도 그 중 하나라 볼 수 있습니다.


류시하(월드미션 대학 성서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