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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하 교수의 영화로 보는 신학담론 http://blog.kcmusa.org/ryusiha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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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친구, 2001”의 포스터. 출처: m.blog.daum.net

학교 뒷골목 이야기에서부터 대부(God Father) 같은 마피아와 갱단을 소재로 다루는 영화의 장르로 폭력을 느와르 영화라고 합니다. 이러한 영화는 아시아에서는 홍콩 느와르로 주윤발의 “영웅본색” 시리즈를 통해 일찍 알려져 있었습니다.

느와르 영화의 일반적 형식은 권선징악의 윤리적 결말을 대체로 가지고 있지만, 주인공과 갱들 간에 벌어지는 싸움과 폭력을 가장 미학적으로 성화시켜 스토리보다 감각적 쾌감과 스릴로 관중을 압도하는 도구로 더 사용하는 영화입니다. 느와르 영화는 인간의 저변에 있는 폭력성 파괴성의 욕망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요소를 갖추고 있기에 흥행에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영화는 대중적인 흥행에 성공을 못할지라도 적어도 기본적인 관객의 수요를 가지고 있는 영화의 장르입니다. 느와르 영화의 주인공은 권선징악의 도덕이나 윤리를 만족하지 못하는 영웅일 경우가 많습니다. 멋있는 나쁜 남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입니다. 이러한 느와르 영화는 누구에게나 있을 범한 추억 속의 미성숙한 골목대장의 경험을 사회에 표현한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비루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는 도다” 시편 12:8절 말씀입니다. 비루함이란 불량한 사람들의 저속한 감정을 지칭합니다. 성경에 비루한 자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품격이 없고 성격이나 행동이 너절하고 더러운 사람들 깡패와 같은 자들을 칭할 때 사용합니다.

“비루함이 인생 중에 높아질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다”는 말을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폭력적이고 야만스러움과 품격이 없는 행동들이 오히려 자랑이 되고 높아질 때 악인이 사방에 비일비재할 것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의 일면을 지적하는 말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느와르 영화가 흥행하는 시대는 이러한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증상(症狀)으로 보입니다.

“친구, 2001”는 2001년 개봉된 영화로 그 당시까지 최대의 200만 이상의 흥행 기록을 깨며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았습니다. 전교 1, 2등을 하던 상태, 큰형처럼 친구들을 다독거려주는 준석, 준석에게 열등감을 가진 동수, 촐싹대지만 없으면 심심한 중호,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친구, 2001”은 아마도 1987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이문열씨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창작의 모티브를 갖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정치와 시대를 풍유하기 보다는 급속히 성장하는 한국 사회의 키만큼 커져버린 그늘진 세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한편으로 나름 순수했던 그 시절을 회고하는 사실적 낭만주의의 영화이기 때문에 뭔가 아닌 듯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이 끌려가는 것입니다.

부산 영도 앞 바다에서 고무 튜브에 매달려 수영을 하면서 놀던 꼬마들이 고등학교에 같이 다니지만 학교에서 통, 부통이라는 명칭으로 싸움꾼이던 둘은 징계를 먹고 퇴학을 하고, 둘은 대학을 진학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화 속의 주인공인 준석과 동수는 건달의 길을 갑니다. 서로를 믿고 신뢰하지만 서로에 대한 오해로 결국 건달 조직들에 의해 동수는 죽게 되는데, 준수는 자기가 사주해서 친구를 죽인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면회에서 상태와 중호에게 자신이 친구 동수를 죽였다고 자백하지만 “친구, 아이가~”라는 말과 함께 친구, 의리, 오해, 미성숙, 그리움, 우정이 뒤섞여 있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그리고 어릴 적 장면으로 돌아갑니다. “바다 거북이와 조오련이 헤엄치기 대결을 하면 누가 이기냐?”는 답에 중호가 이런 말을 합니다. “누가 이기든 그게 뭐가 중요하겠노? 준석이는 항상 동수 편을 들어줬던 것 같다.” 이 말로 준석과 동수의 친구 관계를 설명하며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주로 남자들의 의리를 다루는 홍콩 영화 “영웅본색”과 같은 홍콩 느와르 시대에서 “친구, 2001”은 한국 느와르의 장르의 문을 열었다고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 영화 이후로 한국 영화에서도 깡패와 폭력 범죄조직 영화들이 흥행을 주도하게 됩니다. 이러한 문화적인 현상이 2000년대 초반에 등장하기 시작하며 음지에 있어야 했던 비루함의 문화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됩니다. 사실주의 윤리가 낭만적 이상적 윤리를 대체해 버립니다.

2000년대를 지나면서 이제는 윤리와 도덕적 지탄되어야 할 가치와 대상이 문화적인 유행에서 나와 실제 삶 속에 투영되어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현대 사회는 비루함이 당당함이 되었습니다. 사회에서는 ‘갑질’이라는 용어가 생겨날 정도로 돈만 있으면 없는 자를 무시해도 되고, 돈으로 변상하고 보상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성경의 말씀대로라면 비루함이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한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2000년 이후로 한국 사회는 경제 사회 정치에서 많은 사건 사고의 주인공들이 이름난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고나 범죄를 당연시하는 풍조에서 비리가 일반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이러한 사회의 부조리를 적폐라고하기까지 했습니다. 힘 있는 정치인과 재벌들 고위 공무원들의 비리들이 지면에 난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작은 어떤 특정한 정치인도 재벌도 아닙니다. 우리의 문화 속에 비루함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친구와 같은 느와르 영화가 이런 세상을 가속화하는 촉매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우리의 단면을 반영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흥행도는 공감의 수치를 알리는 문화적인 계기판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런 느와르 영화의 흥행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화에 윤리적 적신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동안 학교도, 교회도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학교는 어떻게 어떤 실력으로 남과 다르게 뛰어날 수 있는가에, 교회는 어떻게 남과 다른 믿음으로 성공할 수 있는가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학교나 교회가 세상을 계도하기보다는 세상의 가치관의 흔들림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들의 가치관을 높여줬다고 봅니다. 그래서 결국 비루함이 높아져 악인이 당당한 시대가 되게 된 것입니다.

세상을 이렇게 변질시킨 것이 원인이라면 이러한 세상을 바람직한 제자리로, 그리고 올바른 가치관으로 돌려놓아야 할 때입니다. 비루함이 높아짐이 아니라 거룩함과 존귀함이 그 어느 가치보다 귀할 때 세상은 또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도대체 거룩이 무엇이며, 존귀함이 무엇이며, 영광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그렇게 많이 배우지 못한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도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 고루함과 진부한 것으로 들려지면서, 오히려 삶에 실제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필요를 채우기에 바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분명히 세상이 구하는 것처럼 너희도 그런 것을 구하는 갈망과 욕망으로 기도를 채우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기도는 어떤 이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선물이 주어지는 통로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가야 하는 길임을 되새기는 것임을 성경은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무엇을 채우느냐가 곧 그것을 향해 가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이나 존귀함이 인간의 속성의 일부인가를 묻는다면 성경은 당연히 아니라고 말합니다. 죄인 된 인간이나 자연인으로서 인간은 그렇게 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한 인간에겐 거룩함과 존귀함은 당연히 일부입니다. 인간에 담긴 자유를 향한 열망이 있는 것처럼 신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에게는 거룩함의 실제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채워지지 않을 때 인간에게 진정한 만족은 없습니다.

참 자유를 아는 자는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먹고 마심보다 더 중요함을 알기에 그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거룩함의 본성을 우리가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 무엇보다 그것을 소중히 여길 것이며, 그것을 지키고, 찾기 위해 싸우게 될 것입니다. 거룩함, 존귀함, 영광, 그것을 갈망하기에 인간은 적어도 신과의 대화를 통해 찾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보다 발전된 종교와 기도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룩함을 신적인 아름다움이 종교에 그려 놓은 것이라 생각하고, 거룩함을 종교적으로, 그리고 신비적인 어떤 것으로 삶과 분리합니다. 그러나 거룩은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신비로, 생명의 꽃으로 아우라(Aura)와 같이 피어나는 실제입니다.


류시하(월드미션 대학 성서학 교수)

▲영화 “범죄의 도시 Outlaw, 2017” 포스터. 출처: IMDb

영웅주의 영화가 대체로 폭력과 액션을 다루고, 폭력 영화는 그 안에 징벌적 폭력을 행하는 주인공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액션영화를 흥행하게 하는 하나의 분명한 원인과 이유라 앞서 설명했습니다. 영웅주의 영화와 액션 장르의 영화는 많은 사람들의 내면의 억압된 파괴적 욕구와 권선징악이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질문을 영화의 고유의 방식을 통해 해결해 갑니다.

“범죄의 도시”는 2017년에 100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한국에 밀입국해서 시장 상인들을 괴롭히는 조선족 조직폭력배를 폭력조직들보다 더 파괴적인 액션으로 시원하게 싹 쓸어버리는 강력계 형사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관객이 매료되는 것은 권선징악이라는 윤리 아래 펼쳐지는 폭력의 정당성 그리고 쇳덩이 같은 강력계 형사의 팔뚝과 주먹이 만드는 폭력의 미학적 쾌감입니다.

이와 같은 영화에서 액션은 영웅의 스토리를 강화시키기도 하지만 독자적인 역할로 폭력의 미학을 통해 청중의 무의식과 대화를 합니다. 폭력을 감히 미학이라고 이름 하는 것에 대해서 이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폭력은 나쁜 것인데 아름다움의 표현이라는 뜻으로 폭력을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냐?는 것이지요.

인간의 파괴적 본성을 만족시키는 폭력을 소위 액션장르가 흥행의 요소로 선택하는 이유는 폭력이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폭력은 파괴를 통해서 새로운 창조를 시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파괴는 새로운 창조의 시작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미화시킬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새 창조는 심판과 파괴를 통해서 이루어짐을 성경은 계시하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종말에 하나님께서 공의와 심판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겠다는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폭력은 나쁜 것이다. 심판은 나쁜 것이다”, “복수나 정의는 바람직하지 않다”, “폭력은 비성경적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개인적인 성경적 입장은 폭력은 하나님의 바람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러나 새 창조를 위한 파괴도 비 성경적인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인간의 타락이 없었다면 심판도 징계도 인간에게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간은 마지막 날 심판을 받습니다. 죄와 벌, 권선징악이라는 선험적인 진리가 인간에게 존재하는 이유는 이러한 파괴를 통한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이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벌, 그것을 인간의 입장에서만 보자면 폭력의 다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선 죄를 범한 인간들이 자기들 힘으로 그 죄로 쌓아 올린 소돔성과 바벨탑과 고모라와 여리고 성을 부수고 파괴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파괴 폭력이라 하지 않고 심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폭력이 아닌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공의와 정의가 빛이라면 폭력은 그 실체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온 세상에 광명한 날이 오기 전까지는 빛과 그림자가 이 세상에 공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폭력은 심판의 도구로 억울한 약자와 소자들의 원통함을 풀어줍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앞에서 심판하시지 않기에 누군가가 대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폭력은 받아져야 하는가? 안 됩니다. 심판의 주권자는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심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윤리적 입장이 있습니다. 절대적 윤리의 심판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뿐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반면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대리자로 인간은 얼마든지 하나님이 주신 선험적 윤리나 자연법에 반하는 것에 대해서 저항하고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멈추기를 거절할 때는 파괴와 폭력도 용납할 수 있다는 상대적인 입장도 공존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치 히틀러의 압제와 독주를 막기 위해 암살 테러를 시도한 독일 신학자 본회퍼의 신학적입장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악인에게는 심판이 존재해야 합니다. 악인의 독주를 멈추고 새로운 세상을 재건축하기 위한 시도로서 파괴는 필요악일 수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또한 악인에 대한 심판이 이 땅에서 그 집행이 유예되는 이유는 신의 자비,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그 크기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착한 소시민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악당과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집행유예, 그것을 우리가 참지 못한다면 소자(小子)인 개인도 하나님의 긍휼을 마땅한 은혜로 기대한다는 것 또한 자기모순일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폭력의 미학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심판할 수 없기에 상상의 날개를 펴서 악인의 미래를 그려내는 것입니다.


류시하(월드미션 대학 성서학 교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Bohemian Rhapsody, 2018”의 한 장면. 출처: The San Francisco Examiner

나라마다 군인과 군대가 존재한다는 말은 아직도 세상에는 전쟁의 위험성과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세상 어디 선가에서는 실제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쟁과 폭력은 사라질 수 없는 모티브이며 역사 속의 사실입니다. 전쟁과 격변 속에서 약자로 자신을 지키고 구원하는 영웅을 기다리고 바랍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영웅을 만들어냅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전쟁이 있는 한 영웅은 계속 존재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시대는 전쟁을 두려워하며 전쟁을 아는 세대와 전쟁을 알지만 느끼지 못하는 두 세대가 공존합니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나 전쟁을 알지만 느끼지 못하는 시대를 사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싸우고 변화시켜야 할 대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속에도 사실 영웅에 대한 바람은 존재합니다.

이들은 흙탕물 속에서 피는 꽃과 같은 존재의 영웅 대신 이들은 밤하늘에 스스로 빛을 발하는 별을 선택합니다. 멋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나약함에 좌절하여 누군가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빛을 발하는 멋있고 아름다운 존재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80년대 영국 록그룹 Rock Group 퀸을 소재로 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2018> 가 그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보헤미안 랩소디 Bohemian rhapsody”는 2018년 10월에 세계에 전역에 동시 상영되어 최근까지 흥행 리에 상영되었습니다. 1970-80년대 세계를 풍미했던 영국 록그룹 Rock 그룹 퀸 Queen의 이야기를 리드 싱어 프레디 머큐리를 중심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기대 이상의 폭발적인 흥행으로 극장 측은 일반적인 영화극장 상영 기간보다 더 연장하며 퀸 열풍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한국에서 더 흥행했다는 이 사실도 주목할 점입니다.

무엇이 “보헤미안 랩소디, 2018”에 열광하게 했을까? 상영극장에서 마케팅 전략으로 퀸의 노래를 합창할 수 있도록 영화관을 공연장의 분위로 바꾼 것도 어쩌면 한국 시장의 흥행에 한몫했다고 봅니다. 그보다는 중요하는 것은 그룹 퀸 Queen이 40년이 훨씬 지난 지금 관객들에게 록스타 Rock Star로 다시 록 Rock의 전설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사람들은 영웅이 아니라 스타를 발견했습니다. 스타는 오늘날 세대에게는 자신들을 스스로 구원하게 하는 스스로의 영웅인 것입니다.

퀸의 노래의 특징이자 그리고 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특징은 스토리입니다. 청중들은 퀸의 노래가 담긴 멜로디만이 아니라 스토리에 반응합니다. 퀸의 리드 싱어 프레디 머큐리의 전기 영화 같지만 이 영화는 사실 “보헤미안 랩소디, 2018”이라는 영화로 봐야 합니다. 사실을 근거로 한 음악영화이지 다큐영화가 아닙니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는 사실을 바탕으로 했지만 관객의 감동을 위해 스토리 편집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소 사실과 다른 점을 발견합니다. 프레디 머큐리가 AIDS에 걸린 것을 알고 라이브 에드 Live Aid 공연을 위해 마지막 혼신의 열연을 하는 전개에는 영화의 극적 감동의 플롯을 위한 편집이 있었다고 봅니다. 머큐리가 자신이 AIDS를 가졌다는 사실을 공개하는 것이 라이브 에드 공연 이전이 아니라 그 이후라는 점에서 그렇게 해석합니다.

우리는 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2018”을 한 인물의 전기가 아니라 영화로서 청중의 감동과 소통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영화는 사실이 아니어도 사실을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감동은 퀸의 노래에 담긴 메시지입니다. 프레디 머큐리가 퀸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을 소개할 때 그들은 사회 부적응자(misfit)들을 위해 그들의 노래를 하는 사회 부적응자들의 그룹이라고 합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 특별한 사람이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 자신을 노래하는 자신 있는 모습에 열광하는 것입니다. 나도 저렇게 당당하게 멋있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공유하게 하는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스타의 성취와 성공에 대리 만족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제목이 말하듯 영화는 유랑민을 대표하는 보헤미안(Bohemian)의 광시곡이라는 의미에서 이미 이 영화의 제목은 스토리를 품고 있습니다. 강을 건넌 민족 히브리인의 서사시처럼 출애굽 이야기가 세상의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를 향한 여정이 수많은 성경의 독자들의 마음을 끌어안은 것처럼 사회 부적응자의 마음을 노래하는 퀸의 노래에 사람들은 세월을 초월해서 감동하고 영웅이 부재하는 이 시대에 다시 떠오르는 별이 된 것입니다.

동성애와 양성애를 반대하는 성경적 그리고 개인적인 입장에서 주인공 머큐리의 양성애적인 성향의 선포(coming out)가 가수로서 그의 멋있는 모습에 포장되어 미화될 것 같아 우려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묘사되면서 너무나 존경하는 믿음의 왕이기에 다윗의 범죄가 분별력이 떨어지는 성도들에게 사람과 죄를 구분하지 않고 함께 쉽게 용납하는 실수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을 사랑하되 그 사람의 죄까지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라이브 에드 공연 실황을 통해 막을 내립니다. 그리고 “We are the champions...” 노래로 메시지와 공감의 절정을 만들어 갑니다. “남들이 범죄자라고 나에게 모래를 뿌렸지만 나는 이겨내고 승리자가 되었다고, 우리가 그렇다”고 노래하며 We are the Champions를 관중과 청중 모두가 함께 노래하며 스타를 바라보며 자신도 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메시지에 사람들은 열광하는 것입니다.

스타의 탄생은 메시아닉 또는 구원의 신앙을 파괴하는 영웅주의 위험한 이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타의 탄생은 실제에 있어서 영웅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자기감정에 충실한 추종자를 만들어내지만 이상을 제시하며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을 부정해 가는 단계입니다. 스타(Star)는 우상(Idol)이 되고 우상은 인간이 근접하기 힘들었던 하나님을 대체합니다. 그리고 우상을 만든 인간은 결국 우상을 파괴하는 인간이 됩니다. 결국에는 인간은 하나님으로 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됩니다. 정치 사회 종교에서 스타를 주의해야 하는 이유가 이점입니다.


류시하(월드미션 대학 성서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