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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정 박사의 정신건강 칼럼 http://blog.kcmusa.org/park297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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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해 있는 사람의 일대기가 기록 영화로 나온 지 2년이 안 되어서, 할리우드를 통해 영화로 제작되어 나오기는 쉽지가 않다. 유명한 래퍼 Notorious B.I.G.에서 따온 그녀의 별명을 보면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도 짐작이 간다.

미대법관 판사 중의 한 명인 현 85세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판사의 이야기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미국에서 흑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운 영웅이라면, "R.B.G."야말로 여성의 평등한 권리를 위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힘들게 걸어 나간 개척자이다.

1973년에 그녀가 대법원에까지 올라가서 쟁취한 여성을 위한 싸움은 45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시대에 뒤진 것이 아닐 수 없다. 어느 젊은 여성이 공군에 입대한 뒤에 다른 남성 공군들이 다 받고 있는 주택 수당을 자신만 여자라고 주지 않는 불평등을 법에 호소하였다. 가만히 돌이켜보니 1973년은 내가 이 나라에 이민을 온 해가 아닌가!

남녀의 구별 없이 동등한 권리를 받으리라고 믿고 온 바로 이 나라에서 그 해에 긴즈버그 판사의 도움으로 여성 군인도 주택 수당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조롱하는 다른 남자 변호사나 법관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하버드 법대에 입학한 후에 보니, 여성용 화장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에 대해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1975년에 승리한 케이스는 아기를 낳는 과정에서 사망한 아내를 떠나보낸 후에 어린 자식을 직접 키우는 어느 젊은 아빠의 경우였다. 아기를 키우느라 직장 일을 할 수 없었던, 그는 사회보장비를 청구했다. 대부분의 아기 엄마들이 자신이 일을 못하는 경우에 정부에서 받는 생활보장비인데 그의 경우에는 남성이라는, 아니면 아빠라는 이유로 거절되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성(gender/sex) 때문에 받는 차별대우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처럼 이 나라의 문화와 생활 속에 깊숙이 박혀져 있는 성의 차별을 그녀는 천천히 사람들의 인식변화와 발을 맞추며 함께 법을 고쳐 나갔던 듯하다.

조지타운 법대에서 공부하던 도중에 나의 둘째 딸 카니가 R.B.G.를 만난 적이 있었단다. 그때 들은 말이 무척 인상 깊었단다. “

내가 17살에 돌아가셨던 저의 어머니는 항상 여자는 화를 겉으로 나타내지 말고 여성다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녀는 따라서 말씨도 조용하고 절대로 크게 화를 내는 적도 없다는 카니의 말이었다. "On the basis of sex"라는 제목으로 상영되고 있는 그녀에 관한 영화를 함께 보고 난 후에 딸이 내게 한 말이다.

어떤 점에서 그녀는 동양에서 중요시하는 여성에 대한 가치관, 즉 화를 밖으로 나타내지 않지만 자신이 믿는 일을 끝까지 해내는 외유내강의 소유자인 듯하다는 것이다.

나를 감동시킨 또 다른 사람은 그녀의 오늘이 있도록 그토록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북돋아 준 그녀의 남편 마티 긴즈버그 세법 전문 변호사였다. 하버드 법대 시절에 만났던 그들은 숱한 역경을 같이 물리쳐 나가며 두 아이를 키웠다.

학생인 처지에 암에 걸려서 투병해야 하는 남편을 위해 일 년 상급생인 마티의 강의를 들은 후에 숙제 논문을 써주며, 갓 태어난 딸을 양육하며 자신의 공부를 하였다. 남편이 뉴욕으로 취직이 되자 그녀는 하버드를 떠나 콜롬비아 법대로 적을 옮기며 남편의 건강을 살폈다.

그리고 일등으로 법과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여자이기 때문에 너무 감정적이라, 여자이기 때문에 내 아내가 싫어해서, 여자이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어서, 등등의 이유로 어떤 법률회사에서도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어떤 사람은 친절하게, 비서직을 권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Rutgers 법대의 교수로 일하며 젊은이들과 같이 성장해 나갔다.

고집불통인 엄마를 닮아서 똑같이 자기주장이 강했던 15살짜리 첫 딸, 제인과의 심리적 투쟁이 심하게 벌어진 적이 있었다. 다니던 고등학교를 결석하고 당시 여성해방 운동의 전사였던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집회에 참석했던 딸을 야단친 후였다.

감정의 노도에 휩싸여있는 딸의 방을 찾아간 마티는 딸을 꼭 안아주면서 제인의 외할머니가 어떻게 그녀의 엄마를 키웠는가?를 이야기해 준다. 그래서 제인이 엄마를 이해하고 다시 학교에 돌아와서 충실한 학생이 되어 나중에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하버드 법대에 진학하는 계기가 된다.

클린턴이 대통령이 된 후에 대법과 판사를 찾고 있을 때, 모든 법조계의 인맥을 통해서 R.B.G.를 임명하도록 애를 쓴 것도 마티였다. 이 자그마한 키의 여성과 15분의 대화를 한 후에 클린턴은 그녀를 대법관 후보로 지명하는 데 아무 의심이 없었단다.

대장암과 췌장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그녀는 한 번도 직장을 빠진 적이 없다고 한다. 한 번에 스무 번씩 하는 push up 체조를 일 주일에 세 번씩 하며 그녀는 몸을 강하게 지키며, 오페라 감상을 동료들과 즐긴다.

점점 혼돈스러워지는 이 나라에서 그녀의 밝은 빛이 오랫동안 밝혀져 있기를 새해 초에 기원해 본다.


수잔정 박사(카이저병원 소아정신과 전문의)
호세를 내가 처음 만났을 때에 그는 오십대 중반의 시공무원이었다.

도로관리 일을 착실하게 하느라 무릎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일에 만족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멕시칸 이세였다. 젊은 시절에 시작된 불안증세와 가끔 경험하는 공황장애 발작 때문에 나를 찾아왔다면서 그는 수줍게 웃었다.

지난 몇 년 간 자신을 열심히 상담해 주던 치료사, 크리스티나가 결혼 때문에 타주로 떠나면서, 꼭 나를 찾아가라고 했다면서도 약물복용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혹시 약에 중독될까봐 겁나고 또한 여러 가지 부작용들에 대해서 많은 나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란다.

가족 사항을 알아보니 멕시코에서 가난을 견디지 못한 그의 아버지가 혈혈단신 미국으로 오셔서 열심히 일을 하여 자신의 어머니를 모셔왔고, 자신을 비롯한 9남매가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모두 행복한 생활을 누린다고 했다.

“아마 우리가 그대로 멕시코에 있었다면, 저는 마약을 다루는 범죄자가 되었거나 굶어죽었을 거예요.”

그런데 본인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그는 “저 혼자 살아가는데도 스트레스 때문에 불안증이 심한데 결혼까지 하면 그걸 어떻게 감당하겠어요?”라며 되묻는다.

“우리가 살면서 부딪치는 모든 일이나 변화가 스트레스이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 중에는 좋은 스트레스도 있지 않을까요? 가령 새 집을 장만한다든가, 직장에서 승진을 하는 경우 등이 좋은 예지요. 아파트에서 편히 살던 분이 큰돈을 마련해서 새 집을 사는 순간부터 가구 마련, 마당의 잔디 깎기, 페인트 칠 등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이 많아집니까? 그러나 이런 것들이 나의 인생을 발전시키고 행복을 향한 첫 걸음이라고 다짐한다면, 보람되게 느끼겠죠? 만일 스트레스 걱정 때문에 승급을 거부한다면 직장 생활도 차차 재미없어지겠지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책상 위에 있는 두뇌 모형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우리 몸 안에 있는 심장, 폐, 간 같은 장기들과 마찬가지로 두뇌도 하나의 장기입니다. 이 장기 내부에 있는 각종 신경 세포들에 의해서 우리는 공부, 기억, 판단 등 고도의 사고 기능도 하지만 위험을 느끼는 순간, 도망치거나 싸워야 한다는 종족보존의 동물적 반응도 일으키게 하지요. 그런 순간에는 마음이 불안해지고, 심장이 마구 뛰며, 호흡이 빨라지고, 근육이 강직되며 눈동자도 커지는 현상이 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체질적으로 이런 현상이 남보다 훨씬 자주 옵니다. 뇌 세포끼리 정보를 전해주는 화학 물질을 뇌전파 물질(neurotransmitter)이라고 하는데, 엔돌핀, 도파민, 쎄로토닌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우리가 신나게 춤을 추거나 아름다운 음악에 심취하게 되면 이런 물질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따라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든(가족력, 또는 태양의 양이 감소되는 겨울철 등) 쎄로토닌의 양이 감소되는 경우에 우울이나 불안증상이 온다고 추측됩니다. 그래서 쎄로토닌의 균형을 맞추어주는 프로잭이나 졸로프트 같은 항우울제를 쓰게 되면 불안 증상의 치료는 물론 작은 양을 계속하는 동안 예방이 가능해집니다. 이런 항우울제 약물은 중독되기 쉬운 아티반이나 제넥스 같은 안정제들과는 다른 것들이라 절대로 중독이 되지 않습니다.”

“우선 그간 믿고, 의지했던 크리스타나 만큼 유능하고 스페인어나 남미 문화에 익숙한 상담자를 찾아드리겠습니다. 또한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과의 환경을 더욱 즐겁고 여유 있게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간 열심히 성당 일에 봉사하시던 것도 계속하시고요.”

호세가 나의 충고대로 항우울제 약물을 쓰기 시작하면서 상담 치료와 환경의 개선, 영적 도움을 받은 지 이, 삼 년이 되던 어느 날 그는 젊은 여성의 사진을 들고 왔다.

“몇 달 전에 멕시코에서 저의 부모님 댁으로 놀러 온 이 처녀를 만났는데 저처럼 수줍음이 많지만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39세의 신부는 곧장 아기를 갖기 원했고 육십이 가까워 오는 남편과 자주 언쟁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각종 검사는 물론, 배란기에 맞추어 열심히 아기 만드는 작업을 하다가 지친 이 신혼부부는 위기에 빠졌다. 임신에 실패한 신부의 우울증상이 심해지자, 호세는 그녀에게 정신과 치료를 권하였다.

‘내가 미쳤느냐?’고 화를 내는 젊은 아내를 그는 간곡히 타일러서 자신처럼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게 하며 친정 식구와 그녀의 친구들도 불러와서 주위 환경을 즐겁게 하였다. 그간 계속했던 기도 생활도 더욱 열심히 하였다.

오늘 호세는 활짝 웃으며 나를 찾아왔다.

“35년간 일했던 직장에서 은퇴를 하니 아주 기쁘네요, 최근 저의 아버님이 사망하시기 전에 저와 아내가 열심히 돌보아 드려서인지 아주 평안하게 숨을 거두시었어요. 저는 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컸었는데, 이제는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가 웃으며 나서는 나의 방 창문으로 보이는 노을이 오늘 따라 아름답다.


수잔정 박사(카이저병원 소아정신과 전문의)
연세대 외과 대학의 동창회 및 학술 대회가 서른 번째의 모임을 엘에이에서 가졌다. 월남 전쟁이 극도에 달했던 60-70년대에 군의관으로 고국을 떠나 월남전 중에 일해야 했던 자국인 의사들의 빈 자리를 미국 정부는 E.M.F.M.G(Educational Council for Foreign Medical Graduate)라는 방법을 통하여 외국 의과대학 출신의 의사들로 채웠었다.

한국, 인도, 필립핀, 캐나다, 영국 등의 자격을 구비한 의과 대학 졸업생 중, 의학 부문과 영어 부분에 합격한 의사들은 미국에 와서 수련의로 일할 수 있는 이민 자격(제6호)이 주어졌다. 그러나 1975년에 월남전이 끝난 후에, 자국 의사들이 돌아온 후에 이 제도는 없어졌다. 따라서 미국에서 수련을 끝내고, 각 방면에서 일하고 있는 1세대 한인 의사들의 수는 줄어들고 있다. 따라서 1973년에 이민을 온 나의 경우는 어린 세대에 속한다.

비의학 부문 연사로서 우리는 한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두 명의 선교사를 초대하였다. 첫번 강사는 현재 세브란스 병원 외래에서 외국인 환자들의 진료를 담당하고 있는 가정 주치의, 인요한 박사(John Linton, MD)로 그는 우리 모교를 졸업하고, 한국 의사 면허를 획득한 첫번째 외국인이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전라도에서 선교활동을 한 덕분에 그의 전라도 사투리는 아주 유창하였다. 그의 형제들과 함께 유진 벨 사업을 하며 북한에 있는 결핵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그는 북한을 29번 다녀왔다고 한다. 그가 최근에 찍어온 비디오 테입을 보며, 우리 모두는 가슴이 아파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병실을 밝히느라, 창문을 열어놓아서 환자는 추위에 떨고, 천정에는 아무 전구가 없이 밋밋하게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사이다 병에 증류수를 넣어서 환자에게 정맥 주사를 주는 모습도 사진에 보였다. X-ray 필름을 못 쓰고 의사가 환자의 가슴을 들여다 보는 fluoroscope로 하루에 80명을 진찰하기 때문에 이들은 10년 내에 사망을 한다며, 따라서 고기 같은 고단백 배급을 조금 더 받는단다.

함경도 회령 지방의 보건소를 가려면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가느라 일주일이 걸린다고 했다. 따라서 인요한 박사는 다섯 가지의 구체적이고 체계가 있는 도움을 주는 것이, 개인이 따로 따로 하는 것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의료 진단방법의 구축, 예를 들어 방사선이나 피검사 등을 할 수 있는 기구와 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훈련 등이다.

두 번째 강사는 토리 목사님(Rev. Ben Torrey)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루벤 트리 장로교 선교사는 중국에서 수십년간 사역을 하는 동안 숱한 전쟁, 혁명, 일본의 침략, 그리고 공산당의 점령 등을 경험하였다. 그러다가 1945년에 교통사고로 한쪽 팔을 잃게 된다. 그의 나이 58세 때였다.

그는 한국으로 선교지를 옮겨서 대전에 있는 의수와 의족을 만드는 병원에서 일하게 된다. 그는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과 전주의 예수 병원 등과 함께 팔과 다리를 잃은 불구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제공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 아쳐 토리(Archer Torrey)가 강원도 태백산에 예수원을 건축할 때에 그를 도왔던 소수의 신도 중에는 두 다리를 의족으로 한 채 산을 오르는 한국인이 보였다. 당시 16세의 벤 토리(Ben Torry) 목사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지금 태백에서 Four River Project를 계속하고 있다.

본래 삼수령이라 이름 짓고 그들이 산에 집을 건축할 때에는 강원도에서 동쪽으로는 동해로, 서쪽으로는 서해, 그리고 남쪽으로 흘러서 남해에 닿는 강들의 근원이 태백이라 보았단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북쪽으로 향하는 강, 즉 북한과 남한이 통일되는 미래에 서로가 평화적으로 같이 살아날 수 있는 준비를 위한 또 하나의 강을 위한 일을 한단다.

그러기 위해서 젊은이들이 어떻게 미움과 증오 대신에 서로를 이해하고 친목할 수 있을지를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는데, 목사님의 부인이 학교 교장으로 일하고 있단다. 미움의 장벽을 어떻게 없앨지 최근 한국의 젊은이들은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서인지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며, 토리 목사님은 많은 염려를 하였다. 그래서 자신은 통일 후 미래의 지도자를 지금 교육하고 있단다. 두 명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이토록 진정으로 걱정하고 있는 통일의 날에 대해, 참석한 260명이 많은 생각을 하게 된 모임이었다.


수잔정 박사(카이저병원 소아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