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정 박사의 정신건강 칼럼 http://blog.kcmusa.org/park297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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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십 고개는 아리랑 고개보다도 높고 험준한 산길인가 보다. 그 전해 성탄절에 급하게 입원을 하셨던 이래로, 금년 90이 되신 어머니는 호흡곤란 증세로 다섯 번이나 응급실을 통해서 입원을 하셨었다.

참을성 있게 인내하시며 담당 의사나 간호사 및 보조 의료원들에게 고통 중에도 감사를 표시하시며 열심히 치료에 협력하시는 덕분인지 빠르면 5일, 길면 2-3주간의 입원기간 이후에는 많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계신 노인 아파트에 되돌아 오셨었다. 지난 연말은 그래서 특히 매일이 삶의 선물이신 듯하다.

평안남도 개천은 이즈음 북한의 핵무기 생산이 많이 이루어지는 영변 근처의 작은 도시인 듯한데, 어머니와 내가 모두 태어난 곳이다. 세 살 때 홍역을 앓은 후, 합병증으로 온 천식과 만성 기관지염을 어머니는 일생 동안 앓으시면서도 89세가 될 때까지 몸져 누워 앓으실 여유가 없으셨다.

한 살짜리 큰딸인 나를 업고서 혼자서 이남으로 피난 오셨다가, 두 살 밑의 여동생과 셋이서 배로 6·25사변을 피하셨고, 눈이 쌓인 산골길을 1·4 후퇴 당시에 걸어서 중공군을 피해서 들어간 공주 피난소에서 할머니를 잃으셨다. 그때마다 일찍 혼자서 몸을 피했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되셨었다. 어머니는 늘 “죽어서 썩을 몸 아껴서 무엇하니?”를 우리 네 자녀에게 조용히 일러주시며, 전쟁 후의 가난 속에서 열심히 벌어 네 자녀 모두 대학 교육을 시켜 주셨다.

아버지의 건축업을 도와 주셔서 튼튼하고 멋진 집을 지어서 재빨리 팔아치우셨다. 내가 의과대학을 가도록 마련해 주셨던 스코필드 박사님의 장학금도, 더욱 도움이 필요한 다른 학생에게 양보하도록 주선한 것도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많이 웃으셨다. 대화 중에도 활짝 웃으셨고, 연속 방송극을 볼 때에도 안방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면 나는 편안하게 잠이 들었었다.

38살 된 나의 막내가 탄생했을 때, 미국에 오신 후, 어머니가 든든하게 옆에 계셨기에 나는 삶이 별로 어렵거나 겁이 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모든 일이 잘 될거야!’, ‘그렇게 애썼는데 안 될 일이 없지!’라며 완전히 믿어주셨다. 늘 걱정이 많고 불안해서 주위를 힘들게 하던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는 이처럼 우리를 완벽하게 보호해 주셨다.

정신과 의사를 하다보면, 가끔 이해하기 어려운 요구를 하는 환자도 있어서 나를 힘들게 하였다. 어머니에게 하소연을 하다보면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어라”는 충고를 해주셨는데, 이것은 소아 정신과 의사, 스텔라 체쓰(Stella Chess)의 자녀 양육 이론과도 일치하는 듯했다. 모든 것이 공정(fair)해야 하고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된다는 서양식 사고 식과는 맞지 않지만, 인생이란 원래가 이렇듯 각양각색이고, 변화무쌍한 게 아니던가?

최소한의 수치가 90은 넘어야 하는 산소의 혈중 농도가 86밑으로 떨어진 응급 상태를 발견하여서 911을 통해 구급차가 와서 기적적으로 어머니를 구해 낸 것은 어머니의 친한 친구, 천사 사모님이다. 갑자기 하루 사이에 폐렴이 악화되어서 호흡 불능과 곤란이 온 것을 직장에서 일하고 있던 의사나 간호사 딸들이나 두 아들들은 몰랐었다.

이제 어머니는 자신의 천식 재발을 막기 위해서 스테로이드 약품을 매일 드시며 필요하면 의사와 상의하셔서 당분간 용량을 올릴 줄도 아신다. 이 때문에 악화되는 당뇨증상을 막기 위해서는 본인이 인슐린 주사도 손수 놓으신다. 주사 외에도 두 가지의 당뇨병 치료제를 잊지 않고 복용하신다. 아침 직전과 취침 전에 혈당을 재고 반드시 기록하셨다가 본인의 의사를 만나는 날 챙겨 가신다. 숨이 가빠지면 산소통을 끌어다가 코를 통해서 백퍼센트의 산소를 지친 본인의 허파 안으로 흡입시키신다. 혈압 치료약 두 가지, 관절통 약, 코 안으로 불어서 치료하는 천식 약 두 가지 등등에다 최근에는 이뇨제 두 가지가 첨가되었지만 어머니는 시간에 맞추어서 꼭꼭 드시며 전혀 불평하지 않으신다. 담당 의사들을 믿기 때문이다.

죽고 싶다를 되뇌는 많은 노인 환자들과 달리 나의 어머니는 “내 손자와 손녀가 모두 결혼할 때까지 살아야 되니 적어도 삼년은 더 살아야겠지?”라고 말씀하셔서 우리를 기쁘게 만드신다. 아무래도 내 아들과 동생 딸의 결혼을 서두르지 말아야겠다. 육체의 온갖 고통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어머니의 생명의 풍요로움과 삶의 지혜를 좀 더 음미하며 배울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기에….


수잔정 박사(카이저병원 소아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