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정 박사의 정신건강 칼럼 http://blog.kcmusa.org/park297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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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외과 대학의 동창회 및 학술 대회가 서른 번째의 모임을 엘에이에서 가졌다. 월남 전쟁이 극도에 달했던 60-70년대에 군의관으로 고국을 떠나 월남전 중에 일해야 했던 자국인 의사들의 빈 자리를 미국 정부는 E.M.F.M.G(Educational Council for Foreign Medical Graduate)라는 방법을 통하여 외국 의과대학 출신의 의사들로 채웠었다.

한국, 인도, 필립핀, 캐나다, 영국 등의 자격을 구비한 의과 대학 졸업생 중, 의학 부문과 영어 부분에 합격한 의사들은 미국에 와서 수련의로 일할 수 있는 이민 자격(제6호)이 주어졌다. 그러나 1975년에 월남전이 끝난 후에, 자국 의사들이 돌아온 후에 이 제도는 없어졌다. 따라서 미국에서 수련을 끝내고, 각 방면에서 일하고 있는 1세대 한인 의사들의 수는 줄어들고 있다. 따라서 1973년에 이민을 온 나의 경우는 어린 세대에 속한다.

비의학 부문 연사로서 우리는 한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두 명의 선교사를 초대하였다. 첫번 강사는 현재 세브란스 병원 외래에서 외국인 환자들의 진료를 담당하고 있는 가정 주치의, 인요한 박사(John Linton, MD)로 그는 우리 모교를 졸업하고, 한국 의사 면허를 획득한 첫번째 외국인이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전라도에서 선교활동을 한 덕분에 그의 전라도 사투리는 아주 유창하였다. 그의 형제들과 함께 유진 벨 사업을 하며 북한에 있는 결핵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그는 북한을 29번 다녀왔다고 한다. 그가 최근에 찍어온 비디오 테입을 보며, 우리 모두는 가슴이 아파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병실을 밝히느라, 창문을 열어놓아서 환자는 추위에 떨고, 천정에는 아무 전구가 없이 밋밋하게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사이다 병에 증류수를 넣어서 환자에게 정맥 주사를 주는 모습도 사진에 보였다. X-ray 필름을 못 쓰고 의사가 환자의 가슴을 들여다 보는 fluoroscope로 하루에 80명을 진찰하기 때문에 이들은 10년 내에 사망을 한다며, 따라서 고기 같은 고단백 배급을 조금 더 받는단다.

함경도 회령 지방의 보건소를 가려면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가느라 일주일이 걸린다고 했다. 따라서 인요한 박사는 다섯 가지의 구체적이고 체계가 있는 도움을 주는 것이, 개인이 따로 따로 하는 것보다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의료 진단방법의 구축, 예를 들어 방사선이나 피검사 등을 할 수 있는 기구와 이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훈련 등이다.

두 번째 강사는 토리 목사님(Rev. Ben Torrey)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루벤 트리 장로교 선교사는 중국에서 수십년간 사역을 하는 동안 숱한 전쟁, 혁명, 일본의 침략, 그리고 공산당의 점령 등을 경험하였다. 그러다가 1945년에 교통사고로 한쪽 팔을 잃게 된다. 그의 나이 58세 때였다.

그는 한국으로 선교지를 옮겨서 대전에 있는 의수와 의족을 만드는 병원에서 일하게 된다. 그는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과 전주의 예수 병원 등과 함께 팔과 다리를 잃은 불구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제공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 아쳐 토리(Archer Torrey)가 강원도 태백산에 예수원을 건축할 때에 그를 도왔던 소수의 신도 중에는 두 다리를 의족으로 한 채 산을 오르는 한국인이 보였다. 당시 16세의 벤 토리(Ben Torry) 목사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지금 태백에서 Four River Project를 계속하고 있다.

본래 삼수령이라 이름 짓고 그들이 산에 집을 건축할 때에는 강원도에서 동쪽으로는 동해로, 서쪽으로는 서해, 그리고 남쪽으로 흘러서 남해에 닿는 강들의 근원이 태백이라 보았단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북쪽으로 향하는 강, 즉 북한과 남한이 통일되는 미래에 서로가 평화적으로 같이 살아날 수 있는 준비를 위한 또 하나의 강을 위한 일을 한단다.

그러기 위해서 젊은이들이 어떻게 미움과 증오 대신에 서로를 이해하고 친목할 수 있을지를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는데, 목사님의 부인이 학교 교장으로 일하고 있단다. 미움의 장벽을 어떻게 없앨지 최근 한국의 젊은이들은 경제적인 부담 때문에서인지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며, 토리 목사님은 많은 염려를 하였다. 그래서 자신은 통일 후 미래의 지도자를 지금 교육하고 있단다. 두 명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이토록 진정으로 걱정하고 있는 통일의 날에 대해, 참석한 260명이 많은 생각을 하게 된 모임이었다.


수잔정 박사(카이저병원 소아정신과 전문의)
옛날 어느 지방에 기운이 무척 세고 덩치가 큰 젊은이가 살았다. 그는 좋은 규수와 결혼하여서 두 아들을 갖게 되었는데 , 첫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서 장대한 체구에 용감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 지역에서 세력을 기르던 영주가 자신을 부르자, 그는 이를 거절하였다. 왜냐하면 전국을 힘으로 제압하여 왕이 되려는 야심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아들이 그의 휘하에 들어가서 충성을 맹세하려는 것은 막지 못하였다.

그의 아내가 사망하자 젊은이는 두 번째 부인을 맞아들였고 다시 두 아들이 태어났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의 첫아들은 많은 공을 세워서 사방에 명성이 높아졌고 재산도 늘었다. 영주의 총애를 받는 그를 무척이나 미워하며 시기를 한 것은 배다른 그의 이복동생들이었다.

영토 확장과 세력을 늘리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던 영주에게, 두 이복동생들은 그들의 맏형이 영주를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려 한다는 거짓을 고하였다. 분격한 어리석은 영주의 명에 의해 살해된 첫아들의 슬픈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가족과 노비들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항해를 시작하였다.

아무도 살지 않는 새로운 땅을 찾아가는 그들을 뒤쫓아, 영주가 보낸 배가 가까이 다가왔다. 분노에 불이 붙은 그는 이미 노구의 몸인데에도 불구하고 마치 커다란 야수처럼 변하고 힘이 세어져서, 상대방의 배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도끼를 휘날려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영주의 부하들을 차례로 살해하였다. 그러나 적이 없어진 순간, 그의 기운도 쇠퇴되었다. 야수처럼 기운이 왕성하던 그는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음을 알고서 동행하던 둘째 아들 그림(Grim)에게 자신의 시체를 바닷물에 던져서 장사 지내 달라고 부탁했다.

며칠 후 새로운 육지를 발견해서 해안가에 이른 후에 아버지의 관이 떠내려 온 땅에 그들은 정착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살아가며, 이룬 새 나라가 발틱 제국들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섬나라, 아이슬란드이다.

이상의 전래 설화는 에길의 사가(Egils Saga)라 불리는데 노르웨이의 첫 번째 왕의 탄압을 피해서 새로운 땅을 찾아온 바이킹 족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건국 설화 중 하나이다. AD 892년경에 세워졌다는 이 바이킹의 나라 이야기에서 나는 두 가지 흥미있는 점을 발견하였다.

첫 번째는 남성 위주의 족보였다. 남성인 나에게 어떤 일이 생겼을 때에 나의 재산을 물려받는 첫 번째 상속자는 아버지, 두 번째는 아들, 그 다음으로 삼촌,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순이다. 그런데 이 순서는 재산 상속만이 아니라 원수를 갚아줄 의무를 이행할 때도 해당된다. 즉 아들의 원수를 갚는 것이 아버지의 첫째 의무이다. 그러니 늙은 아버지는 야수처럼 변해야 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나의 흥미를 이끈 것은 바로 감정이 고조되고 이성을 잃는 경우 인간은 동물같이 변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바로 보았다는 사실이다.

우리 일행들이 방문한 이 나라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안내를 맡은 삼십대의 남성은 부모를 따라 중국에서 이주한 이민자이고 그의 부인은 월남 태생이란다. 우리나라보다 약간 크지만 거의 비슷한 땅덩어리 안에 삼십 삼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단다.

그런데 설화에서 본 남성 위주의 과거와는 달리 전 세계에서 가장 여성 존중의 경제제도를 갖고 있었다. 즉 남성과 여성 직장인이 받는 보수가 1:1로 정확하게 동등하다는 것이다. 문명이 발달되었다고 자처하는 미국에서도 똑같은 일을 하는 남성의 봉급에 비해 여성은 70센트에 불과한 현실에서….

현재 이 나라의 대통령은 여성이다. 팔월의 한여름인데 산에는 눈이 하얗게 쌓여 있고, 바닷가 벌판에는 가축 사료용 풀들만이 자라고 있었다. 주업이 어업인데, 동태가 많이 잡혀서, 햇볕에 말리는 모습이 강원도에서 본 그대로이다.

세 번째 갔던 작은 도시에서 만난 농부는 자신의 집을 보여 주었다. 세 아이를 모두 교육시키며 길러내느라 수도인 레이캬비크까지 눈길을 수없이 다녔는데, 한 번은 앞에 가던 아내의 차와 자신의 차 사이에 눈사태가 발생하여서 큰 고생을 한 적도 있었단다.

그의 집에는 소가 16마리, 양이 백 마리가 있는데 주요 수입원은 5월에 이곳으로 날아오는 철새들이 지은 새 둥지에서 주워 모으는 새털들이란다. 보글보글하게 뭉쳐져 있는 털들을 깨끗하게 세탁하면 따뜻한 다운 이불이나 외투 속에 넣어서 큰 이익을 남기게 되는데, 8월 초순이면 남쪽 나라로 돌아가 버려서 짧은 세 달 동안에 열심히 모아야 한다.

이제 8월이 지나면 더욱 추워지고 비가 많이 오며 어둠에 쌓인 이 땅에서 가축들을 돌보며 고기잡이로 살아가는 이들의 국민 개인당 GDP가 5만 9천 달러라니, 그들의 근면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고, 남한의 2만 7천5백 달러와 비교가 되었다.

비록 해적들의 후예이며, 화가 나면 짐승같이 되는 조상들이었지만 집안의 가계를 존경하고 족보를 가졌던, 그리고 여성을 존중하는 이 민족에게 앞으로도 계속된 번영을 빈다.


수잔정 박사(카이저병원 소아정신과 전문의)
제인은 성격이 명랑하고 외향적인 적극성 때문에 근무하는 크루즈 여행사에서 누구에게나 호감을 받는 젊은 아르메니안 직장여성이다.

그런데 그녀가 아이를 분만한 후에 많은 문제가 생겼다. 우선 잠을 잘 수가 없게 되었다. 물론 아기가 밤에 자주 깨기 때문에 젖을 주려면 엄마도 잠을 깨게 되지만, 아기가 잠이 든 후에도 본인은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는단다. 혹시 자신이 잠이 든 사이에 아기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입맛이 없어지고, 아기에게 줄 젖이 줄어들어서, 억지로라도 먹으려 하지만 구역질이 심하단다. 화장실 가는 시간에도 아기만 혼자 놓아두면 불안해서, 변비가 되었다.

직장에서 온 남편에게 아기를 맡기고 좀 쉬고 싶지만 그것도 어렵다. 남편은 아기가 조금이라도 불편해 하거나 울면, 금방 엄마에게 되돌려주며, 자신도 직장 일 때문에 피곤해서 쉬어야 된단다. 엄마의 불안을 눈치 챘는지 아기도 예민해지며 한시도 엄마로부터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아기 출산 후 거의 사오 개월을 그녀는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였다.

친정어머니는 본인의 직장 일로 바쁘기 때문에 아기를 맡길 수가 없었다. 아기 출생 후에 받는 3개월의 출산 휴가 기간이 지나서 직장에 돌아갈 날짜가 가까워올수록 제인은 점점 자신을 잃어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기와 떨어져서 하루 종일을 지낼 일이 두려웠다.

산부인과 의사의 권고로 정신과를 찾아 온 그녀에게 나는 과거에 우울증이나 불안 증세가 있었는지 물었다. 많은 소녀들이 초경 당시에 경험하는 우울이나 불안 증상도 경험한 적이 없고, 비교적 순탄한 청소년기를 거쳐서 대학교에서 만나 현재의 남편과 결혼 생활을 하였단다. 그리고 아기도 두 사람이 같이 계획하여서 임신 합병증이나 다른 문제없이 분만하였는데 왜 본인이 이토록 아이에 대해서 걱정을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고 말하며 울었다. 이런 자신의 불안감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남편이 야속해서 가끔은 결혼한 것이 후회된단다. 그녀는 과거에 가지고 있던 자신감을 모두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직장에 나가는 것이 두렵다며, 자꾸 병가를 연기해 달라고 졸랐다.

“그러다가는 아마 다시 직장 생활하기가 힘들어질 거예요.”

그리고 내가 과거에 만났던 일본인 친구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남부 도시인 뉴올리언스에 살 때에 우리 아파트에 이웃으로 살던 미쯔꼬는 실력이 있는 사회사업가였다. 그녀는 박사학위를 공부하는 백인 남자와 결혼하여 예쁜 여자 아이를 낳은 후에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자신의 갓난둥이 아기를 맡기에는 주위 사람들은 너무나 생소했었단다. 그렇다고 일본에 계신 부모님을 모셔올 처지도 못 되었고 남편의 부모님은 동양인인 자신과 결혼한 아들을 못마땅해 했단다.

그녀의 마음이 자꾸 초조해 가고 아이와 떨어져서 직장에 나갈 장면을 상상할 때면 죄의식이 커져서 그만 울어 버렸단다. 불안하고 우울한 엄마를 지켜보는 어린 아기도 자연히 심신이 날카로워 질 수밖에…. 아이는 점점 엄마에게만 붙어 있으려 하고 저녁에 돌아 온 아빠에게 가는 것 마저 피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자신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직장을 단념하고 집에서 이제는 네 살이 된 딸과 다른 아이들의 베이비 씨팅을 하며 간신히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기들하고만 있다 보면, 산후 우울증 치료가 더딜 수가 있지요. 왜냐하면 어른들과 달리 아기들은 엄마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것도, 엄마를 칭찬하는 것도 못하니까요. 워낙 아기들은 백퍼센트 어른에게 기대어 살아야만, 생명을 유지하게 되니 엄마의 가진 것을 모두 소진하게 되지요. 반면에 적당한 보모를 구해 놓고 직장에 나가게 되면 주위의 어른들은 자신들과 같이 일할 동지가 나왔으니 얼마나 반갑고 기쁘겠어요? 그러니 엄마의 잃었던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는 어른들이 있는 직장으로 나가는 것이 빠를수록 좋고 기분 좋게 돌아온 엄마는 오랜만에 만난 아기에게 더 큰 기쁨을 줄 수 있고, 지쳐있는 남편에게도 활력소가 되겠지요. 항우울제 약물 복용을 시작하려면 우선 그간 사오 개월 주었던 모유 대신에 질이 좋은 우유를 소아과 의사와 상의해서 주도록 하세요. 기쁘게 웃는 엄마가 먹여주는 우유는 불안하고 우울한 엄마가 억지로 짜내어주는 모유보다 아기의 심신을 더욱 건강하게 지켜 줄 겁니다. 그리고 규칙적 운동으로 과거의 몸매와 활발한 성격을 되찾으시면, 남편과의 결혼생활도 한걸음 더욱 성숙한 단계로 올라가게 될 겁니다. 부모가 되었으니 이제 팀이 되어서 건강한 아기를 기를 터전을 닦으셔야겠죠. 모유를 안 먹이면 아기에게 해로울 거라고요? 천만에요. 아기는 이미 출생할 때에 엄마로부터 받은 면역 항체를 일 년 간 지니고 있고 명한 엄마와 행복한 아빠 사이에서 무럭무럭 클 거예요.”


수잔정 박사(카이저병원 소아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