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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구약 산책 http://blog.kcmusa.org/kwakgunyong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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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목사는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신일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한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해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에서 마쳐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1985년에서 1993년까지 서울향린교회에서 전도사, 부목사로 일하며 소중한 두 분의 스승인 고 안병무 선생님과 홍근수 목사님을 만나 신학과 목회의 방향을 정했습니다. 1993년 미국으로 건너와 줄곧 나성향린교회(전 선한사마리아인교회)를 목회하면서 클레몬트대학원에서 구약학 박사과정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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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목 2012년 6월

2012년 6월 24일 / 졸업예배

 

새로운 피조물

고린도후서 5;16-17

 

곽건용 목사

 

지금 뭔가 새 일을 해볼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오십 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면 그는 어떻게 됐을까요? 지금은 사정이 어떤지 정확하게 모르지만 제가 한국에 있을 때는 사상전향을 거부한 양심수들 중에 삼사십 년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분들이 있습니다. 사람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고 해서 그토록 긴 세월을 신체의 자유를 박탈하고 감금한다는 사실은 매우 부끄러운 얘기입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 The Shawshank Redemption>을 보면 50년 동안 감옥생활을 한 브룩스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만기출소일이 다가오자 그는 동료죄수에게 칼을 휘두릅니다. 그는 출소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출소하는 게 두려웠습니다. 1905년에 감옥에 들어와서 오십 년이나 바깥세상과 격리되어 있었으니 그는 두 번의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이 치러지는 동안 감옥에 갇혀있었던 셈입니다. 그는 변화된 바깥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두려웠고 그래서 감옥에 머물러 있으려고 사건을 벌였던 것입니다. 이 영화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브룩스가 칼을 휘두르는 장면도 제게는 그 중 하나입니다. 제 나이가 오십을 갓 넘었으니 브룩스는 거의 제 나이만큼 감옥에서 산 셈입니다. 그런 다음에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했던 브룩스가 느꼈을 두려움을 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는 출소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오십 대 초반인 저더러 지금 목사 일 말고 뭔가 새 일을 해보라고 하면 선뜻 나서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 나이 스물여섯에 어떤 자리에서 반 농담으로 ‘의대에 편입해서 의사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제 말을 진지하게 듣고 학교에 알아보았더니 편입할 수는 있지만 예과 1학년부터 다녀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 편입 얘기가 별로 진지하지도 않았지만 그때 제 나이 고작 스물여섯이었는데도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겠다고 결단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때 편입했어야 했을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옛것은 ‘모두’ 지나가버렸고 ‘모든 것’이 새로워졌기 때문이랍니다. 번역 상의 문제 하나만 지적하면 희랍어 본문에는 엄연히 들어 있는 ‘모든’이란 단어를 왜 우리말 번역 성경을 빼뜨렸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모든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모든 것이 새로워졌습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옛것’은 무엇이고 ‘새것’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옛것은 지나갔고 새것이 왔다고 했을까요?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 정도는 물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들이 내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가리키는지, 내 ‘바깥’에 있는 무엇인가를 가리키는지, 그것도 아니면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과 관점 같은 것을 가리키는지 정도는 말입니다. 이 전부는 가리킬 수도 있겠습니다.

 

 

오십 대가 되어보니…….

 

지난 주일에 새길교회와 야외예배를 마치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교인들이 저희 집에 모여서 뒤풀이를 했는데 거기서 한 분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분이 이십 대 중반에 시집가서 처음 시집살이했을 때는 시어머니가 말도 못하게 무서웠답니다. 그 나이에 시집살이하는 ‘어린’ 신부가 오죽했겠습니까. 그런데 계산해보니 그때 시어머니 나이가 지금 자기보다 젊은 사십대 후반이더랍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 시어머니도 생전 처음 해보는 시어머니 노릇이 얼마나 두려웠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많은 걸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제가 눈길부터 많이 부드러워졌지만(?) 이삼십 대 때는 지금보다 훨씬 눈초리도 날카로웠고 말투도 무섭고 공격적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재수 없는(!) 사람이었지요. 그때 제 눈에 오십대 아저씨들은 거의 예외 없이 개념 없는 ‘보수꼴통’이었습니다.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내 한 몸 편하면 된다고, 내 가족만 무탈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희망 없는 사람들로 보였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좀 교양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좀 더 직접적이고 막무가내였지만 내용인즉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습니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해야 하고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 같은 것은 전혀 없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지금 제가 오십 대가 됐습니다. 나는 누군가? 나도 희망 없는 보수꼴통인가? 나도 세상이야 어찌 돌아가든 내 한 몸 편하면 된다, 내 가족만 무탈하면 그만인 그런 사람이 되어 버렸을까? 지금 이삼십 대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볼까? 나도 지금 보수꼴통이 된 것은 아닐까? 나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남들 특히 젊은이들 눈에도 내가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언젠가도 몇 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은 “당신 참 보수적이야.”라는 말인데 싫든 좋든 젊은이들이 저를 그렇게 보는 것이야 어떻게 막겠습니까.

 

지금 나이 오십이 되어 돌이켜보니 젊었을 때는 제가 기성세대에 대해 지나치게 가혹했습니다. 지금은 반성합니다. 기성세대를 이해해보려 하지는 않고 그들을 비판하기만 했습니다. 그분들과 저는 살아온 세월이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분들은 이삼십 대에 한국전쟁을 겪었던 분들이고 저희 세대는 이십 대에 1980년 광주항쟁과 1987년 민주화항쟁을 겪은 세대입니다. 다른 것 다 그만두고 이것만 봐도 두 세대가 비슷한 역사의식과 가치관을 가질 수 없는데 그걸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신앙을 두고 생각해 봐도 두 세대는 비슷한 신앙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한국 개신교가 본격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전까지는 기독교는 한국 사회발전에 대단히 긍정적인 역할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처럼 사회의 암적인 존재(!)도 아니었습니다. 이전에는 별 존재감이 없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그때는 기독교가 ‘개독교’ 소리는 듣지 않았습니다. ‘개독교’ 소리를 듣기 시작한 때는 불과 10여 년 전부터입니다. 지금 사오십 대, 그러니까 저희 세대가 사회의 주류가 됐을 때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타락한 것이지요. 한국 개신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맘몬의 교회가 된 때, 곧 돈의 신, 자본의 신을 떠받드는 집단으로 타락한 때는 그분들 세대가 아니라 바로 우리 세대입니다. 지구가 엄청나게 망가지기 시작한 때도 이즈음이 아닙니까? 그때 우리가 기성세대에게 책임을 물었다면 지금은 우리가 책임추궁을 당해야 하게 됐습니다.

 

 

젊었을 때의 치열함을 되찾으면 새로워지지 않을까?

 

오늘은 제 얘기를 많이 합니다. 우리 교우들이 대부분이 저와 같은 세대이므로 공유하는 기억이 적지 않기도 하거니와 다른 사람 얘기를 하는 것보다는 제 얘기 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 그러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십대 초반까지는 말도 못하게 보수적인 교인이었습니다. 주말마다 기도원 가서 밤새 나무뿌리 잡고 누가 이기나 보자는 식으로 기도하곤 했습니다. 글래서 저는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얘기(창세기 32장)를 좋아하나 봅니다. 그때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만 바로 서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었습니다. 남, 이웃, 사회, 역사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요. 지금 생각해봐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신앙 바깥으로 나가면 남도 이웃도 사회도 역사도 눈에 들어오는데 왜 신앙 안에만 들어오면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비록 색깔은 달랐지만 삶은 매우 치열하게 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습니다. 가슴에는 늘 뜨거운 것이 불타고 있었고 그것을 토해내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십대 중반에 제 신앙의 색깔이 변했습니다. 남, 이웃, 역사, 사회에 대한 생각과 관점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과 무관하지 않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비록 색깔은 달라졌지만 치열함과 열정만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기도원에 올라가 나무뿌리 붙잡고 기도하는 것은 그쳤지만 그때와 똑같은 치열함과 열정으로 사람들을 만났고 일했고 설교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부르면 어디든 달려갔습니다. 그때는 믿기 어렵겠지만(!) 설교를 정말 잘 했습니다. 잘 했다는 것이 다른 뜻이 아니라 가슴이 터질 것 같이 뜨거운 상태에서 설교했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좀 과장하자면 설교하다가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이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금 저 자신을 돌아봤을 때 가장 아픈 것은 그때의 치열함과 열정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했습니다. 모든 옛것은 지나갔고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말을 젊었을 때의 치열함과 열정을 되찾는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고 그 안에 머물러 있거나 숨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힘들고 어려울 때, 세상에서 피하고 싶을 때 피하는 피난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눈을 갖는다.’는 말이고 더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뜻이고 제 방식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와 심장을 나눠 갖는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 모든 옛것을 지나보낼 수 있고 모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강력한 갱신과 변혁의 에너지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세상에서 도피하게 만들어주는 아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이란 말은 피난처로 받아들이면 아편이 되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와 심장을 나눠 가질 수 있다면 갱신과 변혁의 에너지가 됩니다. 옛것도 새것도 내 안에 있습니다. 동시에 그것들은 내 밖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려면 내 안과 밖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럴 때 내 안과 바깥을 동시에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 교우들 대부분이 사오십 대입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는 이삼십 대에 가졌던 열정과 치열함을 간직하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때가 됐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과거의 그 열정과 치열함을 다 잃어버리고 이삼십 대에게 개념 없고 희망 없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습니까? 그걸 염려하면 아직 희망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리에서부터 시작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세대 사람 대부분은 열정과 치열함을 잃어버린 것을 안타까워하지도 아쉬워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치기(稚氣)’로 간주하고 술자리의 안주로 웃어넘겨버립니다. 정말 그것을 한때의 치기로 치부해버리는 게 옳습니까? 치기로 넘겨서는 안 되는 것을 치기로 넘기는 걸 성숙의 상징으로 치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요? 그 열정과 치열함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가 아닌가 말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말대로 우리는 낙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질지라도 우리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고린도후서 4:16). 낡아지느냐 새로워지느냐는 결국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결단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젊은 날의 열정과 치열함으로 치기로 간주하고 웃어넘길 것인가, 아니면 그때 그 열정을 지금과 이후에도 계속 갖고 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할 것인가에 우리 속사람의 나이가 달려 있습니다. ♣

 

 

2012년 6월 10일 / 성령강림절 셋째 주일

 

자유로운 종 되기

갈라디아 5:13-14

 

곽건용 목사

 

사람 사랑하기는 힘들어!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부를 정도로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세상 그 어떤 종교가 사랑을 말하지 않겠냐마는 기독교는 유난히 사랑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립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쉽게들 얘기하지만 실제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을 그리 쉽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사랑에 대해서 복잡하게 얘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사랑의 이론이 어렵다는 뜻도 아닙니다. 실제 생활에서 사랑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청춘남녀를 모아 놓고 짝짓기 하는 TV 예능프로그램에서도 쉽게 짝이 지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어느 정도는 각본을 만들어놓고 하는 것 같은데도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유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떤 ‘물건’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데는 골치 아플 일이 없습니다. 사랑을 받은 대상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그것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생각이 있고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사랑했다가도 마음이 변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무조건 나를 사랑해줬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상대방의 재산이나 지위를 보고 결혼하는 걸 보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거기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을 겁니다. 하물며 사람이 인형이나 기계가 아닌데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무조건’ 사랑한다면 그게 기쁘고 행복할 리가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해서 행복해지려면 내게 사랑을 선택하고 결정할 자유가 있어야 하는 만큼 상대방에게도 사랑을 선택하고 결정할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을 해서 행복해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 또는 ‘자유의사’라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바울도 갈라디아 5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자유가 만만한 것이었다면 굳이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다짐하듯 말하진 않았겠지요.

 

구속받기 싫어하는 철학교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결혼은 자유를 속박하는 미친 짓이라고 생각해서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생리적이고 성적인 고독을 극복할 수 없어 밤마다 한 소녀의 침실을 드나들었는데 그만 그녀가 덜컥 임신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아기를 낳는다면 그 때문에 겪어야 할 속박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그래서 유산시키기로 했는데 가난한 철학교수 봉급으로는 수술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아 그는 할 수 없이 파트타임 일을 하나 더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자기가 일의 노예, 돈의 노예가 되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에게 당하는 속박이 싫어서 독신으로 살았는데 지금은 사람도 아닌 일의 노예, 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때서야 그는 철학교수로 돌아와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자유란 무엇인가? 나는 과연 자유로운가?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기로 선택하고 결단한 두 자유로운 영혼이 만나서 이루는 일입니다. 자유롭지 않고 무엇인가에 메어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도 진정 ‘사랑의 종교’가 되려면 먼저 스스로 자유로워야 하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주어야 합니다. 기독교 스스로 자유롭지 않은데 어떻게 그것을 믿는 사람이 자유로울 수 있으며 그들더러 자유로워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있는 존재는 자극에 반응한다

 

저는 ‘기독교가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기독교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인 듯 말입니다. 저는 기독교를 생명체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살아있는 사람들이 만나서 만들어나가는 변화무쌍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다는 게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살아 있는 겁니까? 조건이 많겠지만 저는 한 가지에 집중하겠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굼벵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했습니다. 살아있는 생물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외부에서 오는 자극에 반응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도 살아 있다면 외부의 자극에 반응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기독교는 외부의 자극에 거의 반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높은 벽을 쌓고 외부의 자극을 차단하려고 합니다. 거북이가 갑옷 속에 머리와 다리를 집어넣고 밖으로 안 나오는 것처럼 외부로부터 자극받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이번에 한국개신교회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진화론을 개정하고 심지어 삭제하려는 운동을 벌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소식만으로도 놀랄 지경인데 엊그제 성서학당에서 한 분이 개신교 라디오방송을 들으니 그 소식에 방송하는 사람들이 ‘할렐루야!’ 외치며 좋아하더란 얘기를 전했을 때 저는 정말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습니다. 교회는 진화론과 관련해서는 거의 2세기 동안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고 있는 셈입니다. 세상의 변화에 이렇게 무감각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고도 도태당하지 않고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외부의 자극에 반응합니다. 살아있다면 좋은 자극에만 반응하는 게 아니라 나쁜 자극에도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도 결국은 자극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계속 신호를 보내는데 상대방은 이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사랑하려면 자유로워야 하고 자유로우려면 살아있어야 한다고 했으며 살아있다는 것은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자유와 사랑에 대해 얘기할 차례인데 고맙게도 바울이 둘을 한 묶음으로 묶어 말하니 그의 얘기에 귀 기울여 보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속박은 내 안에서도 반응해야 가능하다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자유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자유롭게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자유롭게 하셨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주일 예배마칠 때마다 ‘자유인으로 살라’는 권고를 듣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른다는 분이 있습니다. 저도 이 말을 할 때마다 가슴이 떨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종으로 부리려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자녀를 종으로 삼고 싶은 부모는 세상에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자유로워지기를 바라게 되어 있지요. 우리 부모들은 때로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식을 자기 욕심대로 키우려고 하고 자기가 못 이룬 꿈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당신 뜻을 따르기를 바라시지만 징벌이 두려워서 억지로 따르는 것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는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그 무엇에도 속박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속박당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당장 ‘아니, 내가 속박당하고 싶어서 속박당하는 줄 아십니까? 속박당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겁니다. 속박에 맞설 힘이 부족해서 당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속박당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현실을 모르는 말이란 얘기죠. 얼핏 들으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속박은 내 안에 동조자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세상의 모든 속박과 유혹은 안팎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란 얘기입니다. 속박당하는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는 속박당하고 싶기 때문에 속박당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려면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70년대 유신시절 한국인은 엄청난 독재에 시달렸습니다. 그 속박은 전적으로 외부에서 온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때 한국인들은 ‘잘 살게 해준다.’는 정권의 감언이설에 안에서부터 반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신이라는 혹독한 속박을 용인했지요. 지난 2007년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과거에 비해서 살림살이가 비교할 수 없이 나아졌지만 한국인들은 여전히 ‘부자 만들어준다’는 말에 내면에서 반응해서 현 대통령에게 표를 몰아줬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속박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럴 줄 몰랐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저 모른 척 했을 뿐입니다.

 

모든 속박은 내 안에 동조자가 있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니 말입니다. 사람에게는 이런 성향이 있습니다. 하와가 오로지 뱀이 유혹했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아닙니다. 그녀에게 뱀의 유혹에 반응하는 성향이 있었습니다. 사람에게는 적당히 속박당하고 타협해서 쉽게 살아가고 싶어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속박은 이렇듯 안팎의 협공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자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이 생각이 있고 자유롭고 자유의지가 있기에 매사에 자유롭게 결정하고 결단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을 내가 이루고픈 목적을 이룰 수단으로 삼게 됩니다. 내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는 것이지요. 바울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강하게 권고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타인의 자유를 짓밟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자유도 던져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자유를 짓밟고 얻을 수 있는 나의 자유는 없습니다. 나의 자유는 남의 자유를 긍정하고 인정하고 높일 때 비로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고 권면하면서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한 마디에 다 들어 있다고 결론짓습니다. ‘섬기라’는 번역은 원문을 지나치게 순화한 번역입니다.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종이 되라’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서로 종이 되는 것’이 자유와 사랑의 최종 종착역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언어 습관에서 큰 문제들 중 하나는 ‘종이 되는 것’을 너무 쉽게 말하는 것입니다. 종이 되는 것은 그저 남을 존경하고 높이고 받드는 정도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종’(slave)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합법적으로 존재했던 바로 그 노예 말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든 노예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러니 바울의 마지막 권고는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미래에나 이루어질 일로 남겨둘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에게 종이 되는 것이 자유와 사랑의 최종 종착역임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거기도 도달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죽기 전에 거기 도달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외부의 자극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면서 살아 있는 것처럼 살아가고, 남의 자유를 나의 자유처럼 소중히 여기면서 살며, 남을 사랑하되 내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 고귀한 목적과 의미를 가진 인격체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면 언젠가는 서로에게 종이 되는 종착역에 도달하리라는 믿음과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종은 자유로울 때 될 수 있고 진정한 자유는 종이 됐을 때 누릴 수 있습니다. ♣

2012년 6월 3일 / 성령강림절 둘째 주일

첫사랑

요한계시록 2:1-7

곽건용 목사

청춘이 아니니까 청춘을 예찬한다?

“청춘(靑春)!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鼓動)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汽罐)과 같이 힘 있다.” 이 글은 제가 중학생 때 국어교과서에서 배운 민태원의 수필 <청춘예찬>의 첫 구절입니다. 그때는 크게 감동해서 거의 외우다시피 했는데 어제 다시 읽어보고 씁쓸하게 웃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글을 읽었는데 심장이 뛰지도 않고 별 감동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다시 읽고 그때와는 다른 뜻으로 감탄했습니다. 저자가 이 글을 썼을 때는 청춘이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청춘에 대해 생동감 넘치는 글을 썼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니 그가 청춘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청춘이 아니라 청춘에 대한 추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청춘의 나이를 살면서 ‘아, 내 청춘은 정말 아름답구나! 미치도록 아름답구나!’하며 감탄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청춘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게 아니라 청춘에 대한 추억이 아름답고 첫사랑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추억으로 남아 있기에 애절하며 맺어지지 않고 스쳐간 인연도 그 자체가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 인연에 애태웠던 자신이 그리운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설교제목이 ‘첫사랑’입니다. 제 첫사랑 얘기하려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 첫사랑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라는 뜻도 아닙니다. 저는 신앙의 첫사랑에 대해 얘기하려 합니다. 신앙에도 ‘첫사랑’이란 것이 있나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신앙에도 그런 게 있습니다. 처음 믿었을 때 느끼고 경험했던 뜨거운 감격과 감사, 기쁨 같은 것 말입니다. 엊그제 성서학당 시간에도 참석자 한 분이 처음 믿었을 때의 감격과 은혜 받은 얘기를 잠시 했는데 오늘 제가 얘기하려는 내용과 비슷해서 놀랐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계시록 2장은 신앙의 첫사랑에 대해 얘기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에베소교회에 주는 말씀입니다. 이 교회는 대체로 칭찬을 받았지만 한 가지 책망을 받았는데 그것은 ‘첫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너는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어내고 낙심한 적이 없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당사자인 에베소교인들은 ‘처음 사랑’이 뭘 가리키는지 알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해서 짐작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이란 영혼의 밑바닥까지 뒤집어 놓는 일

신앙은 어떤 신학적, 신앙적 진술에 대해 옳다고 머리로 동의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른바 영적인 체험이라고 부르는 강렬한 감정적 체험이 사로잡히는데 그치지도 않습니다. 신앙은 지성과 감성과 영성 등 사람의 모든 정신적 능력이, 한 마디로 전인격이 관여하는 정신적, 영적 활동입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던 진실을 확인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의 경험을 반복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더 강렬하게 체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란 전에는 전혀 몰랐고 알고자 하지도 않았고 알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진실을 느닷없이 깨닫게 되는 것이고,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고 경험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겠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간절히 바란다고 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시작은 한 순간 느닷없이 다가와서 사람을 뿌리에서부터 확 뒤집어엎어 버리는 경험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이게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지 느낌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달리 풀어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무엇인가를 배웁니다. 이것을 흔히 ‘배움’이나 ‘교육’이란 말로 표현하지만 사회학에서는 ‘사회화’라고도 부르고 일차사회화와 이차사회화로 구별합니다. 일차사회화는 주로 부모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이가 스스로 판단할 능력을 갖지 못했을 때는 부모가 참이라고 믿고 그렇게 표현하는 것을 그대로 참으로 믿어버립니다. 이것을 일차사회화라고 부르지요. 반면 이차사회화는 학습을 통해서 배워나가는 과정으로서 주로 학교나 교회 같은 데서 이루어집니다. 일차사회화와 이차사회화를 통해 얻는 각각의 앎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차사회화를 통해 습득한 참은 의문을 제기하고 의심하고 새로운 학습을 통해 교정해나가지만 일차사회화를 통해 주어진 진리는 일평생 거의 변하지 않고 간직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이차사회화를 통해 학습된 진리를 교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경험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일차사회화를 통해 주어진 진리까지 뒤흔들어버립니다. 자기 삶이 근거하고 있는 근본적인 진리와 전제들까지 뒤흔들어버리는 사건이 바로 신앙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그 예를 바울에게서 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토라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보여주셨다고 믿었기 때문에 토라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이요 하나님 믿는 사람이 마땅히 걸어갈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이차사회화를 통해 습득한 진리일 뿐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진리, 곧 일차사회화를 통해서 주어진 진리이기도 했습니다. 일차사회화를 통해 주어진 진리가 이차사회화를 통해 더욱 확고하게 굳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런 확신은 다메섹으로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와 만나는 경험으로 송두리째 흔들렸습니다. 이 경험은 학습된 진리만 흔들어놓은 것이 아니라 일차사회화를 통해 주어져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들까지 뒤흔들어놓았습니다. 그는 머리를 망치로 크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는 ‘어, 이게 뭐지?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 엄청난 충격은 도대체 뭐지?’하며 한동안 정신 못 차리고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이 경험 후에 바울에게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그 후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돌아갔으며 3년 후에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그가 이 3년을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긴 하지만 저는 그 충격적인 경험을 곱씹어보고 의미를 명상함으로써 새로운 일차사회화가 일어난 시간이었다고 짐작합니다. 그동안 자신의 신앙과 삶을 지탱해온 진리를 버리고 새로운 진리 위에 신앙과 삶을 세운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는 복음 전파자로 나설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을 ‘재사회화’(re-socialization)라고 부릅니다.

첫사랑은 잊어버리자!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첫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에베소교인들을 꾸짖으시고 그것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이들이 잃어버렸다는 첫사랑은 무엇일까요? 이들은 무엇을 잃어버렸을까요? 이들은 고난을 견뎌냈고 낙심하지 않았다고 칭찬받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추측해봅니다. 처음 믿었을 때 에베소교인들도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넘쳤을 터이고 내 것 네 것 할 것 없이 서로 나누는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이 전하는 바로 그런 공동체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이들에게 고난과 박해의 시간이 왔습니다. 이들은 이를 악물고 고난을 견뎌야 했겠지요. 그러려니 이들의 마음은 강퍅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상황이 그랬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고는 하나 처음 믿었을 때 경험했던 기쁨과 감사, 감격을 이들은 더 이상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상황을 가리켜 첫사랑을 잃어버렸다고 표현하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만일 저의 추측이 옳다면 여기서 하나님은 첫사랑을 잃어버렸다고 꾸중하신 것이 아니라 그걸 안타까워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가 자식을 꾸중할 때처럼 말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꾸중할 때 한편으로는 꾸중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애처로워하고 안타까워하기 마련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첫사랑을 만나고 싶어 하지만 현명한 사람들은 만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첫사랑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이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정작 만나면 실망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럴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설령 첫사랑과 결혼해서 백년해로한다 해도 일평생을 첫사랑 하듯 사랑하며 살지는 않습니다. 설레던 첫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일상이 되고 맙니다. 가슴 설레던 사랑도 아침에 일어나면 양치하고 씻고 밥 먹고 자동차 타고 일 나가고 일과 관련된 사람들 만나 밀고 당기고, 가끔은 맘이 맞는 친구 만나서 흉금 털어놓고 웃고 울며 얘기 나누는 것 같은 ‘일상’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슬프고 안타깝기도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랑도 결국 일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오래 가지 않겠습니까? 사랑이 언제까지 ‘사건’일 수 있겠습니까? 사랑도 결국은 밥 먹고 차 마시고 화장실 가는 것처럼 일상이 되게 되어 있고 또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첫사랑은 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사랑 할 때 가졌던 가슴 터지는 설렘은 얼른 잊어야 합니다. 처음 믿고 은혜 받았을 때의 기쁨과 감사, 감격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걸 바라고 다시 일어나길 기다리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신앙도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이른바 ‘생활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매일 밥 먹고 물마시고 싸고 씻고 닦고 사람 만나고 웃고 우는 것처럼 신앙도 일상이 되어서 가끔은 까먹을 때도 있어야 합니다. 저는 가끔 양치하는 걸 잊어버리고 집을 나설 때가 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그런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왕년’ 타령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내가 왕년에는......’ 하면서 옛날 자랑하는 사람 말입니다. 신앙도 ‘왕년타령’은 금물입니다. 내가 이래 뵈도 왕년에는 한 가닥 하던 사람이라느니, 왕년에는 은혜 받고 교회 일 다 하던 사람이라느니 하는 왕년타령은 잊어버려야 할 첫사랑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의 일입니다. 신앙은 어쩌다 한 번 일어날까말까 하는 ‘대박’이 아니라 매일 겪는 소소한 일상입니다. 과거의 경험이 아무리 중요해도 거기 매달려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일생일대의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건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꾸며낼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만나는 것이고 닥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올 때 오더라도 우리는 지금 여기서 매일의 일상을 살아야 합니다. 일상을 신앙으로 살지 않으면 신앙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강을 건넜으면 배는 버려야지, 등에 지고 갈 필요 없습니다. 과거에 받은 은혜는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현재가 있을 뿐이고 매일 살아갈 삶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과거에 겪은 놀라운 은총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 사는 일상에 달려 있고 거기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주어져 있는 재료들로 갖고 당장 무엇을 만들어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사건의 신앙’이 아니라 ‘생활신앙’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