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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구약 산책 http://blog.kcmusa.org/kwakgunyong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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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목사는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신일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한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해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에서 마쳐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1985년에서 1993년까지 서울향린교회에서 전도사, 부목사로 일하며 소중한 두 분의 스승인 고 안병무 선생님과 홍근수 목사님을 만나 신학과 목회의 방향을 정했습니다. 1993년 미국으로 건너와 줄곧 나성향린교회(전 선한사마리아인교회)를 목회하면서 클레몬트대학원에서 구약학 박사과정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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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목 2006년 3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세기 6:5-8 개역개정판).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8:20-22 개역개정판).

 The LORD saw that the wickedness of man was great in the earth, and that every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continually.  And the LORD was sorry that he had made man on the earth, and it grieved him to his heart.  So the LORD said, "I will blot out man whom I have created from the face of the ground, man and beast and creeping things and birds of the air, for I am sorry that I have made them."  But Noah found favor in the eyes of the LORD. (창세기 6:5-8, RSV).

Then Noah built an altar to the LORD, and took of every clean animal and of every clean bi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on the altar.  And when the LORD smelled the pleasing odor, the LORD said in his heart, "I will never again curse the ground because of man, for the imagination of man's heart is evil from his youth; neither will I ever again destroy every living creature as I have done.  While the earth remains, seedtime and harvest, cold and heat, summer and winter, day and night, shall not cease." (창세기 8:20-22, RSV)

 

 

1

 

노아 시대에 있었던 홍수 이야기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들 하나일 것입니다. 이야기는 잊혀질 만하면 노아가 만든 방주 조각이 어딘가에서 발견됐다는 식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곤 했습니다. 아라랏 꼭대기에서 조각으로 보이는 물건을 발견했다면서 이로써 성경의 역사적 사실성이 입증됐다고 흥분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봐왔습니다.

저도 신앙인의 사람으로서 성경의 역사성이 어떻게든지 입증됐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건전한 이성 가진 상식인으로서, 어디서 무엇이 발견됐다고 해서 성경이 전하는 사건의 역사적 사실성이 입증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합니다. 우리는 노아가 어느 시대 사람인지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딘가에서 배의 파편으로 보이는 나무조각이 발견됐다고 해서 그것이 노아가 만든 방주의 파편이었음을 어떻게 증명할 있겠습니까. 물론 나무조각이 노아가 만든 방주의 파편이 아니었다고도 증명할 없습니다. 정도의 발견으로는 성경의 역사적 사실성을 증명하거나 반박하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성경의 역사적 사실성을 입증하려는 사람들의 태도에는 문제가 숨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성을 입증해야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있다고 그들이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이 역사적 사실성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는 말할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은 역사적으로 일어난 일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전하는 전심전력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간단히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규정해버리고 맙니다 (시편 14:1). 물론 성경이 쓰여질 당시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의 신앙심과는 상관없이 사회, 문화적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던 사회적 실재 (social reality)였으므로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다른 사건들의 역사적 사실성을 입증하느라 성경이 애를 리가 있겠습니까?

성경이 쓰였던 때와 시대적 맥락은 크게 달라졌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노력은 오늘날에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나 성경의 진리성을 입증하려고 애를 쓰는 기독교인들이 오늘날에도 많습니다. 노력이 가상하기는 하지만 그분들이 내세우는 증거들은 기왕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필요가 없는 것들이고, 반대로 기왕에 하나님을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는 아무 효과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말하는 책이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에 관한 얘기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피조물 중에서도 특별히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성경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해 말할 때도 관심은 사건의 역사적, 객관적 사실성을 말하려는 있지 않고 사건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말하는 있습니다. 여기에 집중하기 위해서 성경은 때로 역사성을 과감하게 무시하기도 합니다.

관심사에 따라 얘기가 얼마나 달라질 있는지는 우리가 매일 읽는 신문 기사만 봐도 압니다. 똑같은 사건을 전하는데 신문마다 논조가 모두 다르지 않습니까. 사실 보도를 생명처럼 여긴다는 신문 기사조차 이럴진대 하물며 역사가의 눈과 성경의 신앙인의 눈이 같을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고 기록한 책입니다. 따라서 신앙에 중요하다고 여겨진 측면이 강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중요한 사건일지라도 그것이 신앙과 크게 관련되어 있지 않으면 과감하게 무시하는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2

 

노아 시대 홍수 사건의 역사성과 신앙에 대해서 얘기하다 글이 길어졌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노아 홍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제가 금방 노아 홍수 이야기라는 말을 썼지만 과연 말이 창세기 6-9장의 적절한 제목인가는 의심스럽습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불려왔으므로 편의상 그렇게 썼지만 내용을 읽어보면 정작 창세기 6-9장이 말하려는 바는 홍수 사건 자체가 아님을 있습니다. 40 동안 폭우가 쏟아졌으니 위가 어떻게 됐을까요? 위를 가득 채운 때문에 뭍과 물의 구분이 없어졌을 아니라 물은 바람이 부는 대로 사정없이 출렁댔겠지요. 위에서 숨쉬던 생명이 때문에 죽어갔지만 위를 가득 덮은 물이 바람에 따라 출렁거렸을 광경을 상상해보면 매우 장엄했을 같습니다. 그런데 이때 땅을 뒤덮은 못지않게 사납게 출렁거렸던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창세기 6-9장은 이렇게 출렁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텍스트입니다. 노아 홍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마음의 홍수이야기라고나 할까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 들여다볼 있겠습니까? 사람은 없는 일을 성경은 수시로 합니다. 성경은 수시로 하나님 마음을 들락거리며 안에 들어 있는 생각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노아 홍수 이야기는 하나님 마음 속에 있던 생각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

 

하나님은 지금 사람이 지은 죄악 때문에 지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들을 쓸어버리기로 작정하고 계십니다. 제가 간단하게 사람이 지은 죄악 때문에라고 말했지만 성경은 이에 대해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합니다. 개역성경은 이 대목을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세기 6:5) 라고 번역했고, 개역개정판 성경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번역했으며, 공동번역 성경은 세상이 사람의 죄악으로 가득차고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을 보시고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를 개정표준역 영어성경(Revised Standard Version)The LORD saw that the wickedness of man was great in the earth, and that every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continually.” 라고 번역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만 빼고는 인용한 모든 번역본이 히브리어 원어를 그대로 번역하려고 애썼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원문에 쓰여진 단어들을 그대로 번역하면 매끄럽지 않다고 보고  몇 단어를 생략해서 사람마다 못된 생각만 하는 것을 보시고라고 줄여버렸습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한글로는 자연스럽지만  텍스트가 의도적으로 반복하여 사용하는 단어가 있는데 이를 알아채지 못하게 만들어버립니다. 개역성경은 구판이나 개정판이나 히브리 원문에 사용된 단어들을 나름대로 제대로 옮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란 말은 한글로는 어색하기 짝이 없지만 히브리 원문에 있는 세 단어를 각각 마음’ ‘생각’ ‘계획으로 옮겼다는 점에서는 칭찬할 만합니다. 개정판은 구판을 따르되 문장을 좀더 부드럽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개역성경이 마음’ ‘생각’ ‘계획으로 번역한 단어들을 개정표준역 영어 성경은 각각 ‘heart’ ‘thoughts’ ‘imagination’ 으로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각각 요쩨르’ ‘마하샤바’ ‘레브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들이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더 깊이 파고들지 않겠습니다.  다만 한글로 계획으로, 영어로는 ‘imagination’ 으로 번역한 요쩨르라는 단어에 대해서 한 마디만 덧붙이면, 이 말은 본래 만들다’ ‘형성하다라는 뜻의 야짜르라는 동사에서 온 명사로서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 쓰는 말인데 이것이 추상명사의 뜻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영어로는 ‘’purpose’ ‘device’ 의 의미를 갖는데 우리말로는 요량이라고 번역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종합하면 본문은 사람이 마음에서 생각하고 꾸며내는 것마다 악했다는 뜻으로 읽으면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인간을 평가하고 판단하여 앞으로 그들을 어떻게 대하실까를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평가는 한 마디로 악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악으로 인해 온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회개할 가능성은 0 %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악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하셨고 결론적으로 지상에서 숨쉬는 모든 생물을 쓸어 없애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모진 놈 옆에 있다가 정 맞는다더니 죄 없는 동식물들은 인간과 더불어 지상에 살고 있었다는 죄 아닌 죄 때문에 동반 멸망할 처지에 놓이게 됐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노아만은 여호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고 그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하셨습니다.

노아는 기나긴 세월 동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 동안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조롱했겠습니까. 비가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앞으로 큰 홍수가 닥친다면서 생업도 내팽개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방주를 만들고 있는 노아를 사람들은 대놓고 조롱했겠지요. 뉴올리언즈의 제방이 위험하니 긴급히 보수하지 않으면 홍수에 무너질 것이라고 누군가가 부시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올렸는데 부시 대통령은 그 보고서를 무시했다지요. 테러와 전쟁 하느라 오죽 바빴겠냐 마는 인간이 막을 수 있거나 적어도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변고를 막지 않아 그 피해를 극대화한 미국 대통령의 태도는 하나님을 경외하여 매일 아침에 성경을 읽고 기도한다는 신앙인답지 않아 보입니다. 뉴올리언즈 사태 이후에는 창세기 6-9장을 읽을 때마다 노아를 조롱했을 세상 사람들의 얼굴에 미국 대통령과 네오콘의 얼굴들이 겹쳐지곤 합니다.

방주를 완성하자 노아는 종족 보존을 위해 짐승들을 방주에 집어 넣었습니다. 드디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비는 하늘에서만 내리지 않았습니다. 땅 속에서도 물이 솟아나왔다고 했습니다. “땅 밑에 있는 큰 물줄기가 모두 터지고 하늘을 구멍이 뚫렸다” (창세기 7:11, 공동번역).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갈라놓았던 물과 뭍의 경계가 무너졌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새나 집짐승이나 들짐승이나 땅 위를 기던 벌레나 사람 등 땅 위에서 움직이던 모든 생물이숨지고 말았습니다. “마른 땅에서 코로 숨쉬며 살던 것들이 다 죽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7:21-22).

 

 

3

 

폭우는 40일 동안 쏟아졌습니다. 비가 멎은 후 물이 빠지는 데만도 150일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그 동안 피조세계는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겁니다. 물고기들과 방주에 있던 노아 가족 및 동물들 외에는 지상에 살아 있는 생물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께서 노아와 방주 속의 짐승들을 기억해내시어바람을 일으키시자 물이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방주는 아라랏 산 등마루에 머물렀고 그로부터 다시 40일이 지나자 산봉우리가 드러났습니다. 노아는 두 차례에 걸쳐서 비둘기를 날려 땅이 말랐음을 확인하고 나서 하나님의 명을 받아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노아가 밖으로 나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신앙인답게 하나님께 번제를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노아가 바친 번제물의 향긋한 냄새를 맡으시고 속으로 이렇게 다짐하셨습니다. 성경은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 속으로 안내합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창세기 8:21-22).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판단하고 계십니다. ‘마음이란 말과 계획이란 말이 눈에 익지 않습니까? ‘생각이란 말이 빠지긴 했지만 앞에서 읽었던 창세기 6 5절에서 읽은 내용과 매우 비슷합니다. 창세기 6 5절은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했고 여기서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고 했으니 글자 그대로 반복하지는 않았지만 텍스트를 쓴 분이 6 5절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히브리 원어로도 확인됩니다. 8 21절에는 6 5절에 쓰였던 세 단어들 중에서 마하샤바라는 단어를 제외하고 다른 두 단어를 그대로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것이 뭐 대단한 일이냐고요? 이 정도의 반복은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이 정도의 반복은 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표현이 정 반대의 결과를 초래한 원인이 됐다면 그래도 그 반복을 대수롭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계획이 항상 악하기 때문에 인간과 피조세계 전체를 심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곧 심판을 초래한 원인이 바로 인간의 악함이었습니다. 그런데 8 21절에서는 똑같은 판단, 곧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판단이 이제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결심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똑같은 판단이 정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는데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한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지극히 의도적인 반복이란 말씀입니다. 우리 텍스트는 뭔가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의도적으로 같은 단어들을 반복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4

 

옛 어른들은 사람마다 타고난 성격이 있는데 그것을 고치기는 매우 힘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맞다는 사실을 저는 자주 확인합니다. 남 얘기는 그만두고 저 자신이 그렇습니다. 저는 제 성격 중에 고치고 싶은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연히 고치려고 노력했지요. 꽤 긴 세월 동안 제 나쁜 성격을 고쳐보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아직도 고치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평생 고치지 못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은혜 받았다는 사람들 중에도 옛날부터 갖고 있던 못된 성격을 그대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못된 성격이 다 고쳐지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우리의 텍스트는 사람의 악한 성질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악함은 홍수 심판을 받고 나서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는 심판 이전이나 심판 이후나 악하게 마련이랍니다. 악으로 치닫는 인간의 경향이 홍수 심판 후에도 고쳐지지 않았음을 텍스트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끈질기게 악한 경향을 갖고 있는 인간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이런 인간과 하나님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합니까? 에덴 동산에서 맺었던 관계는 사람이 선악과를 따 먹은 후로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결국 창세기 6장에 와서는 싹쓸이가 불가피할 지경이 됐습니다. 세상은 처음 창조됐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가 깨졌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에게 벌인 살인극은 이 현실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더 나아가서 사람 때문에 피조세계 전체가 죄악으로 물들었습니다. 부분적인 치료로는 완치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환부를 모조리 들어내는 대수술을 하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홍수 심판은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대수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대수술에도 불구하고 고쳐지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악으로 치닫는 인간의 마음이었습니다. 곪아 터진 육체를 잘라낸 칼로 마음까지 잘라내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택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인간의 죄악이 피조세계라는 그릇에 차고 넘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한번 홍수든 지진이든 천재지변으로 심판하실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런 일은 끊임없이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보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해결책을 강구하셨습니다. 그 해결책이 노아와 언약’ (covenant)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물로 사람을 심판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등장하는데 이것이 성경에서 처음으로 이 말이 사용된 예입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창세기 6:18]). 이 언약은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서 구체화되었습니다 (창세기 9:1-17).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는 창세기 1 28절의 명령을 반복하신 후 사람에게 육식을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짐승의 피는 먹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동물 뿐 아니라 사람의 피도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후 하나님은 모든 생물을 다시는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는 다짐하시면서 무지개를 다짐의 증거로 세우셨습니다.

언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됐음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곧 기존의 관계가 변했음을 상징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추방된 이후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달라졌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및 사람과 다른 피조물 사이에 평화로운 관계가 깨진 것은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맺어졌던 관계가 변화됨에 따라 초래된 결과였습니다. 그 궁극적인 결과는 인간을 창조하셨던 데 대한 하나님의 후회와 홍수를 통해 지상의 생물을 싹쓸이하신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이렇게 악화일로를 치닫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언약맺음을 통해서 달라졌던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무엇이 새로워졌습니까? 첫째로, 인간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홍수라는 대수술을 받기 전이나 받은 후나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는 여전히 악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칼은 육신의 환부만 도려냈을 뿐 깊고 깊은 영혼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피조세계에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홍수로 잠시 질서가 흔들리기는 했지만 하나님은 다시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셨습니다. 그래서 땅이 있는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않을 것입니다 (창세기 7:22).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홍수 이전에는 심판을 불가피하게 만든 원인이었던 사람의 악함이 홍수 이후에는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게 만든 원인이 된 것은 하나님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사실이 정 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면 이는 평가자의 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달리 볼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마음의 변화를 우리는 은총’ (grace)이라고 부릅니다. ‘싸구려 은총’ (cheap grace)이라는 말을 쓴 사람은 독일의 순교자 본회퍼였습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변해서 심판하는 대신 은총을 주셨다고 해서 이를 공짜로 횡재했다고 여기고 좋아서 날뛰는 사람은 은총이라는 말은 입안에 물고 있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 격렬하게 출렁거렸던 풍랑의 산물입니다. 먹다 남은 빵 조각을 개에게 던져주듯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은 아니란 말씀입니다. 은총을 주기 위해 하나님은 아픔을 견뎌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홍수라는 칼로 인간의 환부를 도려내려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자 그 칼로 스스로의 가슴을 도려내신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을 알아주지 않는 인간의 악행을 아파하시며 악행에 대해 벌 주시는 것으로는 인간이 당신 마음의 아픔을 알아주지 않자 스스로의 가슴에 칼을 들이대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아픔을 우리가 알아드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총은 값비싼 은총이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저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 아니 홍수로 인류를 심판하시며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 출렁거렸던 풍랑 속에서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를 봅니다.

2006 2 26 / 주현절 여덟째 주일


거룩한 떡을 먹다

사무엘상 21:1-6


곽건용 목사


‘풍운아’ 다윗

제가 어 렸을 때는 만화나 영화 제목에 ‘풍운아(風雲兒)’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풍운아는 ‘좋은 때를 타고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매사에 일이 순탄하게 풀려 출세한 사람을 풍운아라고 부르지는 않았던 같습 니다.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소기의 목적을 이룬 사람을 그렇게 불렀던 같습니다.

다윗은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뜻을 이뤘다는 의미에서 전형적인 ‘풍운아’였습니다. 이새의 여덟 아들로 태어난 다윗은 집안에서 대수롭지 않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들 많은 집에 여덟 아들이었으니 가족들 눈에 띠기나 했겠습니까. 마디로 그는 태어나서부터 ‘주변인’이었습니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볼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우연히 전쟁터에 나갔다가 골리앗이란 블레셋 장수가 야훼 하느님을 능멸하는 것을 보고 분기탱천하여 물맷돌로 그를 죽임으로써 사울 왕실의 군인으로 발탁됐습니다. 그는 승승장구하여 사울의 가장 신임 받는 장수가 됐고 사울 왕의 총애를 몸에 받아 나중에는 그의 사위가 됐습니다. 그러나 천심(天心) 민심(民心) 다윗에게 기우는 것을 사울은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인생은 고달파지기 시작합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그의 친구였지만 그조차도 다윗을 향한 아버지 사울 왕의 미움을 없애지 못했고 다윗은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도망길에 오른 다윗은 놉에 사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갔습니다. 미리 전갈도 없이 다윗을 당황하며 맞은 아히멜렉에게 다윗은 왕명을 받아 이를 수행하러 가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는 배가 고프니 먹을 것 을 없겠느냐고 제사장에게 물었습니다. 제사장은 야훼 하느님께 바친 거룩한 밖에 없다고 말하며 다윗과 그의 군인들이 근래에 여인을 가까이 적이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떡을 먹을 자격이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윗이 그런 적이 없다고 하자 아히멜렉은 야훼 하느님께 바쳐졌던 떡을 다윗에게 주어 다윗은 그것을 먹고 목숨을 부지할 있었습니다. 나중에 사울 왕은 일에 대해 얘기를 듣고 놉의 사제들을 불러들여 모조리 죽여 버렸습니다. 아히멜렉의 아들 에비아달만 간신히 도망쳤는데 훗날 그는 다윗이 왕이 다음에 제사장이 됐습니다.

모든 망 명자의 신세가 그렇듯이 다윗의 망명생활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남의 나라 왕에게 자기 몸을 의탁하러 갔다가 정체가 드러나 오히려 위기에 놓이자 그는 미친 사람 시늉을 함으로써 가까스로 살아남기도 했습니다. 그는 번이나 사울의 손에 죽을 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았습니다. 반대로 사울을 죽일 기회도 있었지만 그는 하느님께서 손수 세우신 자기 손으로 왕을 죽일 없다면서 죽이지 않고 죽일 수도 있었다는 표식만 남겼습니다. 이에 사울은 잠시 감동하여 그의 행위를 후회하지만 후회가 오래 가지는 못하고 다시금 그를 죽이려 혈안이 됩니다. 사울은 이미 심각한 분열증을 앓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망자 다윗은 어떻게 연명했을까?

이렇게 망명생활을 하던 다윗 주변에 그를 따르겠다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했습니다. 언뜻 납득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추스르기도 어려운 망명객에게 많은 사람이 몰려들다니! 하지만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면 일이 전혀 납득 못할 일 은 아닙니다. 다윗을 따르겠다고 몰려든 사람들은 ‘억눌려 지내던 사람들과 빚을 지고 허덕이던 사람들, 밖에 불평을 품은 사람들’이었다고 했습니다(사무엘상 22:1-2). 마디로 말하면 사회에서 버려진 사람들,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다윗에게 몰려들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카드빚 독촉에 이겨 노숙자가 사람들이나 옛날에 빠지게 농사지어도 소작료도 감당하지 못해 산적이 사람들처럼 다윗 시대에도 그렇게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다윗 주변에 몰려들었고 다윗은 이런 사람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던 것입니다. 다윗도 왕에게 쫓기는 처지였으니 그들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생계를 유지했겠습니까? 방법을 보여 주는 얘기가 나발과 아비가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발은 부자였고 아비가일은 그의 아내였습니다. 하루는 다윗이 나발에게 부하를 보내 “ 당신은 우리 덕분에 먹고 살고 있으니 우리가 당신을 돌봐준 대가를 주시오. 라고 전하게 했습니다. 말은 들은 나발은 “도대체 다윗이 누구냐? 요즘은 주인에게서 뛰쳐나온 종놈들이 저마다 우두머리가 되는 세상이거든! 내가 어디서 굴러 왔는지도 모르는 놈들에게 먹을 것을 줘 야 한단 말이냐? 라고 대꾸하며 다윗 부하들을 빈손으로 쫓아 보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화가 나서 부하들을 무장시켜 나발을 죽이러 떠났습니다. 소식을 나발보다 먼저 들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우선 급한 대로 선물을 다윗에게 보내 급한 불 을 끄고 나중에 직접 그를 찾아가 엎드려 자기 남편의 어리석음을 대신 사과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화를 풀고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은 나발이 몸이 굳어 죽어버렸습니다. 심장마비 같은 것이 왔던 모양입니다. 나발이 이렇게 죽자 다윗은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다윗 일행은 이렇듯 무장한 군인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부자들을 보호해준다는 명목으로 그들에게서 재물을 취하는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사울의 추적의 고삐가 점점 강하게 조여들자 다윗은 이상 본국에 머물 없어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 블레셋으로 망명하여 블레셋의 용병이 됐습니다. 블레셋 왕으로부터 작은 하나를 배당받은 다윗은 주변 마을을 침공하여 약탈하는 것으로 연명했습니다. 사실이 블레셋 왕에게 알려질까 그는 부락민을 모조리 죽여 버렸고 약탈한 물건 일부를 유다 지파의 장로들에게 선물로 보내 그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훗날 고국으로 돌아갔을 때를 위한 ‘투자’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요나단을 비롯한 아들들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이제 자기를 죽이려 했던 사울 왕이 죽 었으니 다윗이 이스라엘로 돌아갈 발판이 마련된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사무엘 상권에 나오는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의 성격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개천에서 났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출세를 사람을 가리켜 ‘개천에서 났다’고 말합니다. 개천에서 나는 일이 자주 있으면 이런 말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용이 되기는커녕 평생을 개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다 죽는 사람도 허다합니다. 용이 했다가 되지 못하고 ‘이무기’가 되고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태어나기를 더러운 개천이 아니라 ‘온천’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온천에서 태어나 온천에서 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고 온천에서 태어났지만 개천으로 떨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다양한 환경에서 태어나 자랍니다.

평생 개천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못나고 무가치한 사람일까요? 온천에서 태어났지만 개천으로 떨어진 사람은 지지리도 못난 사람입니까? 개천에서 태어나 용이 사람 은 모든 면에서 본받을만한 사람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습니다. 개천에서 태어나 용이 사람에게 장점과 단점이 있듯이 용이 되지 못하고 이무기가 되어버린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평생을 개천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개천에서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받을 점이 많은 인물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단점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국교회에서는 다윗을 결점 없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다윗을 비판하면 무슨 큰일이나 것처럼 야단입니다. 다윗이 하느님도 아닌데 도대체 다윗을 그렇게 높이는지 수가 없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에게도 예외 없이 단점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이삭, 야곱, 요셉도 그랬습니다. 장점 아니라 단점에서도 배울 것이 있는 법이므로 그것을 배우면 됩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인들은 유독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인물의 단점을 지적하고 배우기를 마다하는지 수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다윗은 너무 마음이 강퍅했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은 다윗 아니라 개천에서 다른 용들에게도 자주 발 견되는 결점입니다. 나발에게 보여준 그의 태도에는 그의 강퍅한 성격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선택됐고 하느님의 지원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을 자신도 알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하느님의 명을 받아 그를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웠으니 자신도 자기가 왕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생존을 위협 받는 처지에 있었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되는 측면도 있지만 그래도 굳이 저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적지 않습니다.

이렇듯 다윗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는 하느님의 백성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생애의 모든 점을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객관적으로 보아서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 마땅한 모습을 자주 보 여줬습니다.


아히멜렉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그러나 다윗은 우리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일화를 여럿 남겼습니다. 그가 연루된 사건 중에는 훗날 신앙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행동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사무엘상 21장에 나오는 이야기도 하나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가다가 놉에 사는 아히멜렉에게 갔습니다. 굶주린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자 아히멜렉은 야훼 하느님께 바쳐졌던 떡을 그 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물론 떡을 먹을 자격이 있는가를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떡을 먹을 사람들이 근래에 여자를 가까이 했던 적이 있느냐고 제사장은 물었습니다. 다윗이 그런 적이 없다고 하자 제사장은 그에게 떡을 주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앞에서도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제단에 바쳐졌던 떡에 대해서 어떻게 규정하고 있습니까? 드려졌던 제사가 어떤 제사인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에서 하느님께 드려졌던 제단의 떡은 오로지 제사장만 먹을 있었습니다. 말은, 다윗 일행이 근래에 여자를 가까이 했든 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그들은 먹을 자격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아히멜렉은 엉뚱한 질문을 다윗에 했던 것입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떡을 먹으라고 줘서는 됐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다윗에게 떡을 줬을까요? 그가 무식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하느님께 바쳐진 떡에 대한 율법 규정을 잠시 헷갈려서 그랬을까요? 율법을 무시해서 그랬을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 침 묵하고 있지만 저는 아히멜렉이 착각했거나 실수했다고는 생각 하지 않습니다. 아히멜렉은 제물에 관한 율법 규정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그런 중요한 규정을 모르고 어떻게 제사장 노릇을 했겠습니까! 그러면 그랬을까요? 그는 어렴풋이나마 다윗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루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는 다윗이 왕이 되면 자리 차지하겠다는 계산에서 나온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사울의 기세가 등등할 때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을 차기 왕으로 낙점하셨다는사실을 아히멜렉은 전혀 눈치채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가던 도망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히멜렉이 율법 규정을 어겨가면서까지 제단에 바쳐졌던 떡을 다윗에게 주어 그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은 그가 어렴풋이나마 하느님의 계획을 인지하고 뜻을 실현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했다고 밖에는 없습니다.

그로부터 1 년쯤 지난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분이 바로 사건에 대해 얘기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장을 보면 하루는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하도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안식일에 금지되어 있는 일을 당신 제자들이 하고 있다. 라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바로 일을 예로 드셨습니다. 다윗도 배가 고팠을 제사 장 외에는 먹을 없었던 떡을 먹 었다고 말입니다.

이야기는 하느님의 율법의 기본성격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율법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입니다. 율법은 도구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수단도 중요하지만 목적에 앞설 수는 없습니다. 수단은 활용 될 때만 가치 있는 것이 됩니다. 그것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태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기에 때로는 그것을 깨뜨리고 넘어서야 때도 있습니다. 거기에 너무 집착해서는 된다는 얘기입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것을 깨야 필요가 있을 때는 과감하게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럴 절대로 잊어서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율법 규정을 깨뜨리거나 넘어설 때는 행동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히멜렉은 제사장만 먹을 있는 떡을 다윗에게 행동 때문에 사울 왕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대가치고는 얼마나 대가입니까! 예수님은 어땠습니까? 예수님도 안식일 법을 넘어서는 행동 때문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 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 ”는 진리를 몸으로 실천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야 했습니다. 물론 다른 여러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예수님 사역의 근본정신은 마디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아히멜렉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그리고 예수님 같은 분이 있었기에 우리는 안식일 법의 참뜻을 알게 되고 정신을 존중하고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율법 규정들을 넘어선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무작정 틀을 깨려 하고 규정들을 무시하려는 태도는 크게 잘 못된 태도입니다. 그러나 목적과 근본 의미는 생각하지도 않고 무조건 전통과 규정을 따르겠다는 태도도 잘못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내가 전통과 규정을 따라야 하는가, 내가 그것들을 깨뜨리고 넘어서야 하는가, 무엇을 실현하려고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확신을 갖는 일입니다. 그리고 확신을 따라 살아갈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됩니다. 그러나 정작 절대 잊지 말아야 진실은, 대가가 결코 값 없는 대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