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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구약 산책 http://blog.kcmusa.org/kwakgunyong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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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목사는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신일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한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해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에서 마쳐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1985년에서 1993년까지 서울향린교회에서 전도사, 부목사로 일하며 소중한 두 분의 스승인 고 안병무 선생님과 홍근수 목사님을 만나 신학과 목회의 방향을 정했습니다. 1993년 미국으로 건너와 줄곧 나성향린교회(전 선한사마리아인교회)를 목회하면서 클레몬트대학원에서 구약학 박사과정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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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목 2006년 3월

“…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은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창세기 12:13, 개역 개정판).

Say you are my sister, that it may go well with me because of you, and that my life may be spared on your account (창세기 12;13, RSV).

 

 

1

 

아브람 (후에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지만 아직은 아브람입니다) 은 참으로 독특한 인물이요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인물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어느 정도는 그렇긴 하지만 그는 정말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는 이로 하여금 ! 이 사람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구나. 난 암만 해도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없을 것 같아.” 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가도 금방 애계, 겨우 이 정도의 인물이었어?” 라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참으로 고맙게도 성경은 읽는 이로 하여금 절로 겸손하게 만들기도 하고 또 절로 자신감을 갖게도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양면이 있다는 것이지요.

지난 번 글에서는 아브람이 하나님 말씀 하나만 의지하여 장차 하나님께서 지시하실 땅을 향해 무작정 고향을 등지고 떠난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아브람처럼 응답하려면 대단한 믿음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름에 망설임 없이 즉각 응답했을 정도로 당찬 믿음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가나안 땅에 당도했습니다. 그는 우선 벧엘 근방에 이르러 거기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후 점점 남방으로 이동했습니다 (창세기 12:8-9). 곧 애굽 땅으로 점점 가까이 갔던 것입니다. ‘떠돌이 기질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지만 아브람이 애굽에 내려간 것은 그래서가 아니라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역사 기록을 보면 주전 1900-1700 년 사이에 기근 때문에 가나안을 비롯한 주변 여러 지역 사람들이 식량을 구하려 애굽으로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브람도 이들 중 하나였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아브람은 아내 사래에게 쉬이 납득되지 않는 제안을 하나 했습니다. 이런 제안이었습니다.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은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창세기 12:11-13).

I know that you are a woman beautiful to behold; and when the Egyptians see you, they will say, `This is his wife'; then they will kill me, but they will let you live. Say you are my sister, that it may go well with me because of you, and that my life may be spared on your account.

 

 

하나님의 말씀 하나 붙잡고 고향을 등졌던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치고는 비겁하고 치졸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사래같이 아리따운 여인을 아내로 갖고 있는 것을 애굽 사람이 본다면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남편인 아브람을 죽이려 할 터이니 아내가 아니라 누이인 척 하라는 얘기입니다. 아브람의 처지가 가련하긴 했지만 그래도 남의 아내를 빼앗는 짓을 할 정도면 평민은 아니고 고관이나 왕쯤은 돼야겠지요. 아니나 다를까 아브람 일행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사래의 미모를 보고 그녀를 바로의 궁전으로 끌어들인 사람들은 애굽의 고관들이었습니다 (15). 바로는 사래를 보고 한눈에 반했던 모양입니다. “이에 바로가 그녀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라고 했으니 (16) 얼른 재물을 주고 그녀를 빼앗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얘기는 아니지만 짚고 넘어가고 싶은 얘기는 사래의 미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브람과 사래의 나이 차이는 10년이었고 아브람이 고향을 떠났을 때가 75세였다고 했으니 그때 사래는 65세였습니다. 그러니 애굽에 갔을 때 사래의 나이는 65세에서 70세 사이였겠지요. 그녀는 이삭을 90세에 낳았는데 이는 현대인의 눈에는 말할 것도 없고 고대인의 눈에도 기적이었습니다. 만일 그때 나이가 70이었다 해도 마찬가지로 기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70세가 된 사래의 미모에 온 애굽 사람이 감탄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외모가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이란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온 애굽 사람이 똑같이 사래의 내면의 아름다움에 반했을 리는 없으니 여기서 말하는 미모는 외적인 아름다움을 가리킨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70세가 다 된 노인의 미모에 온 애굽이 감탄할 수 있겠습니까. 마치 창세기 12장은 사래의 나이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수많은 해석자들을 곤혹에 빠뜨렸습니다. 분석적이고 이성적인 유럽의 성경 학자들이 제안해서 지난 1-2 세기 동안 마치 정설처럼 여겨져 왔던 소위 문서가설에 의하면 모세 오경은 쓰여진 연대도 서로 다르고 신학도 서로 다른 네 개의 문서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소위 J, E, D, P라고 하는 문서가 그것인데 이 중에서 연대나 나이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전하려 노력했던 문서는 사제계 문서’ (P, priestly document) 라는 것이지요. 창세기 12장은 P가 아니라 J 계열의 문서로서 아브람과 사래의 나이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이 사래의 미모에 대한 의혹을 해소해줍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나은 대답이 아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가급적 문서가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 가설을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좀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그것조차 하지 않으렵니다. 이 가설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두 가지 점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칼로 이렇게 마음대로 쪼개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문서가설은 제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칼로 난도질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둘째로, 하지만 이 가설을 따르니 그 동안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었기 때문에 사실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말 그럴듯했습니다! 이 가설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천재로 보였고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한 동안 저는 두 번째 충격으로 첫번째 충격을 누르면서 문서가설을 단순한 가설이 아니라 정설로 받아들이고 그 방법을 따라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그 가설이 매우 그럴듯하고 타당성이 있어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가설일 뿐임이 여러 가지 면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텍스트를 잘게 쪼개가면서 읽기보다는 전체적이고 통전적으로 읽어야 텍스트가 전하려는 메시지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가설이 맞더라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은 잘게 쪼개져 있는 성경이 아니라 탄탄하게 엮여 있는 성경입니다. ‘구약산책첫 번째 글에서 저는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믿지 않지만 성경에 있는 글자 하나도, 점 하나도 이유 없이 거기 있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성경이 지금의 형태로 엮여 있는 데 이유가 없겠습니까! 나누고 쪼갤 수 있다는 사실에만 마음을 쓰지 말고 지금 형태로 엮여 있다는 사실에도 똑같이 마음을 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2

 

곁가지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다시 우리의 텍스트로 돌아오겠습니다. 아브람과 사래가 애굽에 내려가서 겪은 이야기는 바로 앞에 나오는 이야기, 곧 아브람과 사래가 하나님 말씀 하나만 붙잡고 고향을 떠난 이야기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이야기입니다. 곧 의도적으로 이 두 이야기가 병렬되어 있다는 이야기인데 그 목적은 아브람의 양면을 모두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굶주림을 모면하려고 애굽에 내려간 아브람은 또 다른 죽음의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사래의 미모에 반한 애굽인이 자기를 죽이고 사래를 아내로 차지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래에게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했습니다. 이에 대한 사래의 반응을 성경은 전하지 않습니다. 침묵은 곧 동의였을까요? 사래가 자발적으로 동의했든 아니면 억지로 그렇게 했든 어쨌든 사래는 바로의 궁전으로 이끌려 들어갔습니다. 바로는 사래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바로는 그녀로 말미암아’ (개역 개정판은 그로 말미암아로 번역하여 의미가 불분명하지만 히브리 원문에는 가 여성으로 되어 있으므로 사래를 가리킴에 분명합니다) 아브람에게 큰 재물을 하사했습니다. 

좀 째째해 보이지만 따져보겠습니다. 성경은 사래가 바로의 궁전에 들어가 며칠을 머물렀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사래를 보자마자 아브람에게 재물을 건넸겠습니까? 물론 17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사래의 일로 인해서 바로의 그의 집안에 큰 재앙을 내렸고 바로는 아브람을 불러 야단을 친 다음에 그와 사래를 풀어줬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풀려났을 때까지 사래는 며칠인지 모르는 불특정 기간을 바로의 궁전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 일어났음직한 일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바로 그 일이 십중팔구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 일은 보통 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여권이 별볼일 없는 시대였다고 해도 훗날 신앙의 조상이 될 아브람이 자기 목숨 하나 부지하기 위해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팔아 넘긴 셈이니 보통 문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브람의 비겁한 행동은 당연히 후대의 해석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아브람의 비겁한 행동의 이유를 설명하려 했고 합리화하여 납득시키려 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선 성경 안에서도 이런 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0장을 보면 이와 똑같은 일이 다시 한 번 벌어집니다. 이번에는 애굽의 바로가 아니라 그랄 왕 아비멜렉이란 점과 흉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경고하셨으므로 아비멜렉이 사래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르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바로의 경우에는 사래를 가까이 했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되지요) 전체적인 사건의 진행은 우리 텍스트와 비슷합니다. 아비멜렉이 다음날 아침에 아브라함을 불러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묻자 아브라함은 사래가 정말로 자기의 이복 누이라고 말합니다 (12). 스파이서 (Speiser) 라는 학자의 주석에 따르면 후리족 사람들에게 아내의 지위를 높여주기 위해서 누이로 입양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로써 아브라함은 이번 사건에서 뿐 아니라 애굽에서의 사건에서도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은 셈이 되고 이로써 실추된 아브라함의 명예 (?) 가 어느 정도는 회복됐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거짓말한 것도 문제긴 하지만 정말 중대한 문제는 자기 한 몸 살겠다고 아내를, 그것도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할 자식을 낳을 아내를 바로에게 넘겨줬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과오는 아브람이 한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해도 씻을 수 없는 중대한 과오였습니다.

후대의 해석자들 중에는 아브람의 행동이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설명하여 그에게 면죄부를 주려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외경 희년서’ (Book of Jubilee) 와 쿰란에서 발견된 창세기 외경’ (Genesis Apocryphon), 그리고 필로 (Philo) 등이 그들입니다. 희년서 13:11에는 아브람은 애굽으로 가서 그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길 때까지 5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고 적혀 있고, 창세기 외경에는 나 아브람과 내 조카 롯은 사라가 강제로 내게서 빼앗긴 날 밤에 엉엉 울었다.” 고 적혀 있습니다. 곧 아브람이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랬던 것이 아니라 힘이 부족해서 강제로 당했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이렇게 해석할 근거가 텍스트에는 터럭만큼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만 갖고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을까요? 더 적극적으로 아브람의 행동을 옹호한 해석자들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아브람의 꿈을 언급한 해석자들입니다. 앞에서 말한 창세기 외경다른 구절에는 아브람이 애굽 땅에 들어가던 날에 한 꿈을 꿨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내용인 즉, 아브람이 백향목 한 그루와 종려나무 한 그루를 보았는데 어떤 사람이 백향목을 자르고 뿌리를 뽑으려 하자 종려나무가 나서서 백향목을 자르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꿈에서 깨어나 사래에게 꿈 얘기를 해줬고 그 의미도 알려줬다고 합니다.

짐작하셨겠지만 백향목은 아브람이고 종려나무는 사래를 가리킵니다. 곧 사래가 아브람을 위험에서 건져줄 것이란 얘기지요. 고대인에게 꿈은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는 수단이었습니다. 곧 애굽에서 일어날 사건은 모두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었다는 말이 되고 하나님은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은 꿈을 통해 미리 아브람에게 알려주셨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람은 자연스럽게 면책이 됩니다. 비겁해 보이는 그의 행동은 과오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해석할 근거가 텍스트에 터럭만큼이라도 있을까요? 없을 것 같지요? 하지만 고대의 해석자들이 누굽니까? 그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기어이 그 근거를 찾아냈으니 말입니다.

앞에서도 인용한 창세기 12 11절은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뭔가 어색하지 않습니까? 아브람이 사래와 하루 이틀 같이 산 것도 아닌데 내가 알기에…’ 라니요? 우리말이나 영어 (I know that…) 는 밋밋하지만 히브리 원문은 히네 나 야다티…’ 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보라, 이제, 나는 정녕 아노니…’ 라고 번역하면 그 맛이 더 살아납니다. 텍스트는, 아브람은 사래의 미모 뿐 아니라 그보다 대단히 더 중요한 모종의 사실을 알고 있고 이를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창세기 외경은, 아브람이 사래의 미모 뿐 아니라 그 때문에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는 해석했고, 어떻게 알게 됐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알려주셨다고 해석했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럴싸합니까? 그럴싸하다고 생각하실 분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 믿음의 조상을 변호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한 해석자들에게 배울 점은 하나 있습니다. 단어 하나라도 허투루 읽지 않고 꼼꼼하게 읽는 자세, 이것 하나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가 축자영감설을 공허한 구호로 외치는 사람보다는 훨씬 더 성경을 존중하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3

 

그럴싸하든 그럴싸하지 않든 후대의 해석자들의 해석은 단지 참고 사항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참고 사항참고가 아니라 방해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텍스트가 그런 경우인 것 같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의 텍스트는 바로 앞에 나오는 창세기 12 1-9절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이야기이고 이렇게 대치시킨 목적은 신앙의 아버지인 아브람의 양면을 극명하게 대조해서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12 1-9절의 아브람은 용기와 믿음의 인물이요 순종하는 사람의 표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10-19절의 아브람은 불안해 하는 인물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말을 빌면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시야 바깥으로 밀어냈습니다 (Abraham let the Word get out of his sight). 그는 아내를 팔아서라도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 했던 비겁한 남편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고 부도덕한 방법으로 자기에게 닥친 위기를 모면하려 했습니다. 그는 부부윤리에 있어서 부도덕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고 또 부정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텍스트가 보여주려는 바가 바로 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감추려는 모든 해석은 올바른 해석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텍스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점이 아브람의 부도덕과 불신앙이었을까요? 애굽 왕 바로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고서 이야기를 끝낸다면 중요한 점을 빠뜨린 것이 됩니다. 바로는 사래를 자기 여자로 받아들이고 그 대가로 아브람에게 재물을 하사했습니다. 그러나 사래의 일로 인해곧바로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사래 때문에아브람에게 재물을 하사했던 바로가 이번에는 사래 때문에하나님의 재앙을 받았던 것입니다. 바로의 입장에서는 재물은 주고 재앙은 받았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바로는 아브람을 불러 이렇게 나무랐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누이라고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18-19). 바로가 자기에게 닥친 재앙이 아브람 때문인지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 성경은 침묵합니다. 바로가 여호와 하나님을 알았을 리도 없고 믿었을 리는 더더욱 없습니다. 더욱이 훗날의 일이지만 바로의 애굽은 이스라엘과 원수가 됩니다. 바로 그 바로의 입에서 아브람을 꾸중하는 말이 나오다니! 믿음의 아버지 아브람이 장래의 원수 바로에게 꾸중을 들으며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다니!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자존심이 상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만 있다면 빼버리고 싶은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고스란히 성경에 보존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후대의 해석자들이 했던 것 같은 아브람을 옹호하는 해석 한 마디 없이 말입니다. 저는 이래서 성경이 좋습니다. 솔직해서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조준을 잘못하시지는 않았을 터인데 잘못은 아브람이 했는데 벌을 애꿎은 바로와 그의 집안 사람들이 받았습니다. 텍스트는, 잘못은 사래를 아내로 맞으려 했던 바로에게 있지 않고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고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바로에게 팔아 넘겼던 아브람에게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런데 정작 재앙을 당한 사람은 아브람이 아니라 바로와 그의 집안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일을 두고 하나님의 정의를 논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텍스트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죄 지은 당사자인 아브람은 그냥 두고 죄 없는 바로를 벌하셨습니까?” 하고 울부짖어보신 적 있습니까? 그런 적이 있다면 당신은 정말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물론 신앙 여부를 제가 판단할 자격은 없지만 말입니다. 그런 적이 없다고 해도 너무 자책하지는 마십시오. 왜냐하면 내가 받아야 할 벌을 다른 사람이 받는 경우에 하나님의 정의를 문제 삼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남이 받아야 할 벌을 내가 받았을 때는 눈을 부릅뜨고 목청을 돋우며 하나님께 따져 묻는 사람도 내가 받았어야 할 벌을 남이 받는 경우에는 침묵하기 일쑤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슬쩍 넘어가 버린다는 말씀입니다. 후자에서 전자로 가는 신앙의 길은 정말 멀고도 험한 것 같습니다. 이 길이 멀고 험해도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고 이 글이 그런 분들께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아브람의 비겁한 행동 때문에 엉뚱한 사람들이 피해를 당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의 불신앙의 언행 때문에 세상이 피해를 본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신앙인의 언행이 미치는 영향은 신앙인에게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세상이 너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동전의 앞면일 뿐입니다. 그 뒷면에는 너는 재앙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이 너로 인해 화를 당할 수도 있다.”  라고 쓰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나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우르에서 죽었더라.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세기 11:27-12:4, 개역 개정판).

 

"Now these are the descendants of Terah. Terah was the father of Abram, Nahor, and Haran; and Haran was the father of Lot. Haran died before his father Terah in the land of his birth, in Ur of the Chaldeans. And Abram and Nahor took wives; the name of Abram's wife was Sarai, and the name of Nahor's wife, Milcah, the daughter of Haran the father of Milcah and Iscah. Now Sarai was barren; she had no child. Terah took Abram his son and Lot the son of Haran, his grandson, and Sarai his daughter-in-law, his son Abram's wife, and they went forth together from Ur of the Chaldeans to go into the land of Canaan; but when they came to Haran, they settled there. The days of Terah were two hundred and five years; and Terah died in Haran. 

Now the LORD said to Abram, "Go from your country and your kindred and your father's house to the land that I will show you. And I will make of you a great nation, and I will bless you, and make your name great, so that you will be a blessing. I will bless those who bless you, and him who curses you I will curse; and by you all the families of the earth shall bless themselves." So Abram went, as the LORD had told him; and Lot went with him. Abram was seventy-five years old when he departed from Haran." (창세기 11:27-12:4, RSV).

 

 

1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시간에 문단나누기했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산문의 경우 어디서 새로운 문단이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지를 알아 맞추는 것 문단나누기였지요. 논리라고는 전혀 없이 뒤죽박죽인 글을 제외하면 모든 산문은 문단나누기를 할 수 있고, 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단나누기를 잘 하는 사람은 글을 제대로 잘 읽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문단나누기를 할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신문기사나 논설에서부터 소설이나 수필, 그리고 학술논문에 이르기까지 종사하는 직업에 따라 수많은 종류의 글을 읽으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수많은 종류의 글을 읽는다고 해서 고등학교시절 시험준비 할 때처럼 문단나누기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동안 문단나누기를 해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매주일 설교를 하는 목사가 된 후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매주일 읽을 성경구절이 정해져 있는 성경주기표 (lectionary) 를 따르지 않는다면 설교자는 설교할 성경본문을 스스로 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 정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본문을 정하는 일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끊어야 하느냐의 문제이므로 결국은 문단나누기라는 것이지요. 성경본문의 해석이 설교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은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는 데 있어서 첫번째 과제는 문단나누기곧 텍스트의 단위 (unit) 를 어떻게 정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우선 텍스트가 당시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를 정확하게 짚어내야 합니다. 그것을 텍스트의 의도를 파악한다고 말합니다. 텍스트 본래의 의도를 정확히 짚어내야 거기에 기초해서 오늘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하여 그것을 전할 수 있습니다. 텍스트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문단나누기를 잘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입니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로 읽으면 설교가 제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문단나누기가 설교자나 성경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학자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사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의식적으로는 아니라 할지라도 나름대로 문단나누기를 하면서 읽습니다. 다만 의식하지 않을 뿐입니다. 이 때 장 (chapter) 과 절 (verse) 의 구분이 도움이 되긴 하지만 거기에 전적으로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장과 절이 문단나누기를 의식하고 만들어지긴 했지만 제대로 나누어지지 않은 부분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단나누기를 할 때는 글의 형식과 내용을 동시에 고려해야 합니다. 가장 쉬운 예는 시와 산문의 구별입니다. 시를 읽고 감상하는 방법과 산문을 읽고 감상하는 방법은 엄연히 다르므로 이 둘은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개역성경의 가장 큰 약점은 이 둘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 밖에도 말하는 사람 (narrator) 은 누구이고 듣는 사람 (audience) 은 누구인가도 따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지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고 있는지, 아니면 내레이터가 말하는지, 말하는 사람이 등장인물 중에 있다면 그것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구분해야 텍스트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라는 말은 욥기 8 7절에 나오는 말입니다. 아마 욥기에 나오는 말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말일 겁니다. 제가 사는 이곳 나성에는 한인들이 운영하는 많은 식당들과 사무실에 가보면 이 말씀이 한쪽 벽에 걸려 있습니다. 사업의 시작은 미미했지만 나중에는 돈을 많이 벌어 크게 확장하겠다는 주인의 간절한 소원과 굳은 의지가 이 한 문장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이 글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니 그 위력과 효과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또 의심해서도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누구 입에서 나온 말인지 아십니까? 이 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은데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빌닷이 한 말입니다. 빌닷은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겠다고 왔지만 욥과 얘기하다가 위로가 아니라 비난과 비판 쪽으로 흘러버린 욥의 세 친구 중 한 사람입니다. 빌닷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욥에게 아무 근거 없이 욥의 자녀들이 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을 거론하며 욥에게 회개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만일 욥이 회개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만 한다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는 얘기입니다. 곧 사업성공을 비는 말이 아니란 뜻입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아무리 말이 멋있어도 식당이나 사무실에 걸어놓기는 적절하다고 할 수 없겠습니다.

요약하면, 성경을 잘 읽으려면 문단나누기를 잘 해야 하는데 문단나누기를 잘 하려면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듣는 사람은 누구인지, 그리고 그 내용은 어떤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2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12장을 둘만 들라고 하면 창세기 12장과 로마서 12장을 들 수 있겠습니다. 창세기 12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는 이야기로서 글 서두에 인용되어 있는 우리의 본문이고, 로마서 12장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는 말씀으로 바울이 교훈 또는 교리의 말씀을 마무리하고 생활 또는 실천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하는 장입니다. 둘 다 기독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유명한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저는 창세기 12 1절이 아니라 11 27절로부터 살펴보려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12 1절에서 새 단락이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11 27절에서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저만 유독 그렇게 읽는 것은 아니고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읽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창세기 11장은 1절에서 9절까지 바벨탑 이야기를 한 다음에 10절부터는 셈의 자손의 족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족보는 마지막 절인 32절까지 이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마지막 절까지 족보 얘기이긴 합니다. 하지만 잘 읽어보면 26절과 27절이 어색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앞에 나온 족보와는 형식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24절부터 26절까지는 나홀은 이십구 세에 데라를 낳았고 데라는 낳은 후에 백십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라고 적혀 있는데 후 27절 이하에는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라고 적혀 있습니다. 27절이 10절처럼 아무개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라는 말로 시작되면서 데라의 자손에 대한 얘기가 26절과 27절에 중복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1 10절부터 26절까지의 족보에는 이런 중복이 없는데 유독 26절과 27절에만 같은 내용이 중복되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왜 같은 내용이 중복되어 있을까요? 그 까닭은, 10절부터 26절까지는 셈의 족보이고 27절 이하는 데라의 족보이기 때문입니다. 곧 서로 다른 두 개의 족보가 연결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셈의 후손의 족보는 결국 아브람에게 귀결되어 있습니다. 결국은 아브람 얘기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아브람만은 못하지만 다른 조상들보다는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가족을 이끌고 고향인 갈대아 인의 우르 (Ur) 를 떠났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 1절 이하의 텍스트가 중요한 까닭은 아브람의 가족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장차 보여주실 땅으로 갔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향을 떠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많은 사람이 12 1절 때문에 아브람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도 아브람 못지않게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은 아브람이지만 처음으로 고향을 등지고 길을 떠났던 사람은 데라였습니다. 창세기 11장은 이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어색함을 무릅쓰고 27절 이하에서 이 사실을 중복해서 전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1 27절 이하에 나오는 데라의 족보는 앞에 나오는 지루한 족보와는 달리 중요한 정보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처음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을 등지고 길을 떠났던 사람은 데라였다는 사실입니다 (31). 이때 이미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11 31). 물론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란 사실은 그때까지는 밝혀져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데라의 족보를 중복해서 전하는 이유가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창세기 11 27-32절에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임신하지 못하는 불임여성이었다는 사실입니다. 30절에는 뜬금없이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라는 말이 나옵니다. 앞의 족보에는 남자 이름과 그의 아들 중 장자의 이름만 밝히고 나머지 자녀들은 이름도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아무개는 아무개를 낳은 후 몇 년 동안 자녀를 낳았으며…” 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경우는 아내의 이름과 더불어 그들에게 자녀가 없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져 있습니다. 자식을 낳아준 아내의 이름도 전하지 않는 족보에 자식도 낳지 주지 못한 아내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는 사실이 자못 흥미롭습니다. 여기에는 아브람에게 자식이 없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함과 동시에 어떤 아내가, 또는 몸종이 낳은 자녀가 적법한가가 문제가 되리라는 점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요약하면, 데라의 족보를 따로 전한 까닭은 상투적인 형식의 족보로는 전할 수 없는 특별한 내용을 전하기 위해서였고, 그 특별한 내용은 첫째, 데라가 이미 가족들을 이끌고 고향 우르를 떠나 가나안을 향해 갔다는 사실이고, 둘째 아브라의 아내 사래는 불임여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아브람의 이야기에서 매주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이야기는 이 두 사실을 축으로 해서 전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3

 

아브람에게 고향을 떠나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명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122절에서 아브람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5절은 아브람 일행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고 말하고 6절은 가나안 땅에는 그때 이미 가나안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7절은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의 내용이 분명해졌습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후손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이고 둘째는 가나안 땅을 아브람의 후손들이 차지하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곧 자손의 번성과 땅의 소유, 이 두 가지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가지 약속이 이루어지는 데 장애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아브람의 후손이 번성하리라는 약속이 이루어지려면 일단 아브람에게 자식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이 약속을 받았을 때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불임여성이었고 이미 이들 부부는 충분히 (!) 늙어 있었습니다. 과연 아브람은 누구에게서 후손을 낳아야 할까요? 텍스트는 사래가 불임여성이었음을 일찌감치 밝혀 놓음으로써 긴장감을 더하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될 것인가, 성취된다면 어떤 방식으로 성취될 것인가 하는 긴장감 말입니다. 텍스트는 약속과 그 성취 사이에 난관이 가로막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요즘  가족제도에서는 대가 끊긴다고 해서 아내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후손을 보는 일은 윤리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합니다. 하지만 옛날 아브람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재산만 많다면 얼마든지 여러 아내를 거느릴 수 있었고 아들을 얻기 위해서 둘째나 셋째 부인을 얻거나 몸종의 태를 빌리는 일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대였습니다. 실제로 아브람 부부도 그렇게 했습니다. 사래의 몸종이었던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란 아들을 얻었으니 말입니다. 이 일이 훗날에 종족갈등의 씨앗이 됐지만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당신께서 정한 후손이 아니라고, 적법한 후손은 사래의 태를 통해 태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래가 불임여성이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를 가로막고 있는 높은 장벽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땅의 약속은 어땠습니까? 여기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이미 거기에는 가나안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은 깃발만 꽂으면 내 땅이 되는 빈 땅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오랫동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작가 황석영 씨가 북한을 다녀와서 사람이 살고 있었네!” 라는 제목의 책을 낸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제목입니까! 그 땅에 2 5백만 명을 헤아리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통계를 통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라는 제목은 얼마나 큰 충격이었습니까!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뿔난 도깨비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오래 잊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북한 땅에만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 오래 전부터 그 땅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늑대의 울음소리만 들리는 빈 땅이 아니라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다투면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땅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이 살고 있던 땅을 아브람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떻게?’ 라는 물음과 함께 그렇다면 거기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을 다 죽여버리고 그 땅을 아브람의 후손에게 주시겠다는 말씀인가? 아니면 가나안 사람들과 아브람의 후손을 공존하게 하겠다는 말씀인가? 그것도 아니면 신비한 방법으로 둘을 하나로 만드시겠다는 말씀인가? 과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약속을 주시면서 어떤 방법을 생각하고 계셨을까요?

이 두 가지 약속과 그것들의 성취, 그리고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난관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아브람의 이야기뿐 아니라 그 이후에 전개되는 긴 이야기들의 중심 주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이후의 이야기란 짧게 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 이스라엘의 선조들의 이야기이고 길게 보면 창세기에서부터 신명기까지의 모세오경과 그것을 넘어서 여호수와, 사사기까지의 이야기들을 가리킵니다. 아브람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2006년 3월 19일 / 사순절 셋째 주일 / 장로 임직식


십자가 위에서 행복했던 사람

전도서 3:9-15  마태 27:32-44


곽건용 목사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를 강조하는 전도서

지난 주일에 전도서가 가르치는 지혜 가운데 하나가 ‘때를 분별하는 지혜’라고 말씀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습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때를 분별하는 지혜’를 보여주셨습니다. 말씀으로 가르쳐야 할 때가 있고 말씀하기를 중단하고 침묵해야 할 때가 있음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기적을 일으키고 병든 사람을 고치며 표징을 보여야 할 때가 있고 그러지 않아야 할 때가 있음을 아셨습니다. 말하지 말고 침묵해야 하는 시간과 기적을 일으키지도, 표징을 보이지도 말아야 하는 시간은 ‘수난의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수난의 시간이 점점 다가옴을 느끼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이 오기 전에, 곧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전 낮의 해가 있을 때 열심히 일하자고 제자들을 독려하셨습니다. 하루는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왜 당신 제자들을 금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제 곧 신랑을 빼앗길 터인데 그때가 되면 금식하며 슬피 애곡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랑을 빼앗기는 시간은 수난의 때였습니다.

전도서가 ‘시간’과 관련해서 가르치는 또 하나의 지혜가 있는데 그것은 ‘현재’라는 시간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과거와 현재, 미래 중 ‘현재라는 시간의 재발견’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와 완전히 단절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정신은 기억의 집합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좋고 아름다운 기억이든 나쁘고 추한 기억이든 과거에 일어난 일들은 기억이란 집합소에 간직되고 보관됩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지나치게 강해서 과거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현재를 회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과거로 숨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은 ‘미래’라는 시간을 두려워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한편으로 기대와 희망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합니다. 이런 뜻에서 인간은 지나간 시간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전도서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서는 ‘현재’라는 시간을 강조합니다. 과거나 미래보다는 ‘지금’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들은 전도서가 ‘carpe diem!’ 곧 ‘오늘을 즐겨라!’고 가르치는 책으로 생각해왔습니다. ‘carpe diem’이란 말은 라틴어로 ‘오늘을 붙잡아라!’ (seize the day), ‘오늘을 즐겨라’ (enjoy the present)란 뜻을 갖습니다. 물론 전도서가 무제한의 쾌락을 가르치는 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도서는 분명히 과거는 이미 흘러갔다고 말합니다. 과거의 영화(榮華)가 현재의 삶에 의미를 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전도서는 ‘인간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인간의 지혜로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지금 이 시간에 하느님께서 주신 네 몫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라는 제목의 시를 여러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시인은 예수님을 ‘괴로웠던 사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괴로움이 얼마나 컸습니까. 오늘 읽은 마태복음 27장 32절 이하에는 예수께서 당했던 육체적인 괴로움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이미 기력이 쇠해질 대로 쇠해진 예수님에게는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갈 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광경을 구경하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누군가가 예수께 쓸개를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는 맛만 보고 마시려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쓸개를 탄 포도주는 진통제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를 거절하셨다는 말은 당신께서 당해야 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피하거나 경감하려 하시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멜 깁스의 영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예수께서 당하셨던 육체적인 고통은 복음서의 수난 이야기만 읽어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극한의 고문을 당하셨으니 예수께서 느끼셨을 육체적인 괴로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예수님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조롱을 받으셨고 모욕을 당하셨으니 그에 따른 정신적인 괴로움 또한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이면 다시 짓는다던 자야, 네 목숨이나 건져라.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남은 살리면서 자기는 못 살리는구나. 저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이래!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고말고. 저 사람이 하느님을 믿고 또 제가 하느님의 아들입네 했으니 하느님이 원하시면 어디 살려보시라지.


그런데 윤동주 시인은 이런 예수님을 가리켜서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조롱을 당하고 있는 바로 그 예수님더러 ‘행복한 예수’라고 했습니다! 육체가 갈가리 찢겨져 너덜너덜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있던 예수더러 ‘행복한 예수’라고 했습니다! 이런 세상에! ‘과거’에 권능을 갖고 기적을 행하고 병든 사람들을 고쳤던 예수님도 아니고, ‘미래’에 수천의 천사들을 거느리고 왕이 되어 구름을 타고 오시는 예수님도 아니고, ‘지금’ 초라하게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더러 ‘행복한 예수’랍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도 예수에게 그랬던 것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기도할 때 때로 “예수님을 닮게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보고 그렇게 기도했는지 깊이 따져본 적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을 닮기 원하십니까? 권능을 떨치시는 예수님을 닮기 원하십니까? 왕처럼 군림하는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예수님을 닮기 원하십니까?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사람마다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있습니다. 전도서가 말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전도서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 하느님의 뜻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사람이 태어나는 일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는 전도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도서에는 ‘왜?’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라는 질문이 빠져 있습니다. 전도서는 단지 사람은 하느님께서 분깃으로 주신 행복을 누리라고만 가르칩니다. 왜, 무엇 때문에 하느님은 나를 세상에 보내셨는가? 하느님은 무엇을 이루려고 나를 세상에 보내셨을까? 나를 통해 하시고 싶은 일이 무엇이기에 나를 세상에 보내셨을까? 전도서는 이런 물음을 묻지 않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모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제한된 지식과 지혜로 어떻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다 알겠습니까. 다 알 수도 없고 또 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왜 내가 세상에 보내졌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그냥 아무 목적 없이 세상에 내던져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세상에 보내진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보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보내진 목적을 이루는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요? 그 일보다 더 큰 행복이 있겠습니까? 저는 무신론과 유신론이 근본적으로 여기서 갈라진다고 생각합니다. 무신론이나 유신론은 머릿속에서 긍정되거나 부정될 수 있는 ‘이론’이나 ‘탁상공론’이 아닙니다. 하느님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내용은 ‘나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졌다.’는 고백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 못하고 사는 사람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들만 보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들만 소명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보냄 받은 사람이요 다 소명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보내진 목적을 과거에 이미 이뤘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래에 이루겠다고 말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보내진 목적을 이뤄야 할 시간은 ‘현재’입니다.

‘왕년에’ 무슨 일을 했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과거에 어떤 하느님의 일을 성취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아직은 먹고 사느라고 아무런 여유도 없어 하느님이 나를 보내신 뜻을 이루지 못한다고도 말하지도 마십시오. 언제가 됐든 먹고 살만큼 여건이 갖춰지면 그때 가서 하느님께서 날 부르신 뜻을 이루겠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 모든 말들은 결국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 일은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못하기 때문입니다.

전도서가 그렇게 강조했던 시간은 ‘현재’라는 시간이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노래했던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당신께서 세상에 보내진 목적을 이루고 계셨으므로 행복한 분이었습니다.

우리 개신교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으므로 더 이상 십자가에 달려 계시지 않다는 뜻입니다. 반면 가톨릭교회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달려 있습니다. 전에는 이것이 제게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왜 가톨릭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아직까지도 여전히 십자가에 달아놓을까?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해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늘 ‘현재형’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해도 십자가는 늘 현재형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로버트 해리의 ‘지금 하십시오’ 라는 제목의 시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런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한마디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 될 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 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가 피고 가슴이 설렐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엔

너무나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