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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구약 산책 http://blog.kcmusa.org/kwakgunyong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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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목사는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신일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한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해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에서 마쳐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1985년에서 1993년까지 서울향린교회에서 전도사, 부목사로 일하며 소중한 두 분의 스승인 고 안병무 선생님과 홍근수 목사님을 만나 신학과 목회의 방향을 정했습니다. 1993년 미국으로 건너와 줄곧 나성향린교회(전 선한사마리아인교회)를 목회하면서 클레몬트대학원에서 구약학 박사과정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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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상에는 선이 있을까?

사람들은 “왜 세상에는 악이 있을까?”라도 묻습니다. 마치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게 이상하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세상에는 선이 있는가?”라고 묻지는 않습니다. 마치 세상에 선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입니다. 정말 세상에 선이 있는 게 당연합니까? 그걸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여겨도 되는 겁니까? 선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고 악이 존재하는 것은 이상합니까?

세상은 본래 선했는데 점점 악해지는 걸까요? 아니면 본래 악했는데 그나마 조금씩 선해지는 걸까요? 성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세상에 악이 들어왔다고 하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그건 아닙니다. 선악과는 악을 행하게 하는 열매가 아니라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가 아닙니까. 그들이 따먹은 열매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였으니 그걸 먹기 전에는 선과 악의 구별이 없었고 그걸 먹은 후에 비로소 선악을 ‘구별’하게 됐다는 거 아닙니까. 게다가 그들 때문에 악이 세상에 들어왔다면 하와를 유혹해서 선악과를 먹게 만든 뱀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뱀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선한 존재였나요 악한 존재였나요? 물론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래서 처벌을 받았습니다. 낙원에서 추방당한 게 그것 아닙니까. 그 때문에 아담은 땀 흘리며 노동하게 됐고 하와는 산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왜 세상에는 악이 있을까?”라는 질문은 “왜 세상에는 선이 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물어야 합니다.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듯 선이 존재하는 것 역시 당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하긴 뭐 하지만 좌우간 둘은 나란히 갑니다. 선이 없다면 악이 있을 수 없고 악이 없으면 선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악이 있기 때문에 선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악의 문제는 선의 문제와 분리해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악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는 까닭은 세상에 선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선이 존재하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의 악을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겁니다. 악이 악인지도 모른 채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악을 인식하고 악의 문제를 고민하는 이유는 선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린 악의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쉽게’ 생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악을 극복하거나 이기기 어려운 줄은 우리 모두 압니다. 하지만 그게 ‘왜’ 그렇게 이기기 어려운지는 모릅니다. 왜 우리는 악과 싸우면 대개의 경우엔 질까요? 왜 우리는 악을 이기지 못할까요? 악이란 게 그리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복합적입니다. 그런데 우린 악을 실제보다 훨씬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지가 약해서, 우리가 가진 힘이 악의 힘보다 약해서 진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한편으론 맞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틀리기도 합니다.

‘악’은 매우 복잡하다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악과 싸워서 지면 대개는 ‘신앙이 약해서’ 진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 이유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한편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의지가 약해서’ 악에게 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인이 악과 싸워서 지는 것은 ‘신앙만’ 갖고 싸웠기 때문이고 의지를 갖고 싸워서 지는 사람은 ‘의지만’ 갖고 싸웠기 때문에 진 겁니다. 그런데 우린 그걸 모릅니다. 악이란 것은, 곧 악마라는 존재는 매우 복잡한 성격을 갖고 있고 무척 다양한 무기를 갖고 있으므로 신앙이나 의지만 갖고는 이길 수 없습니다. 악과 싸워 이기려면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무기를 총동원해서 싸워야 합니다. 그래도 이길까 말까 한 존재가 바로 악마입니다. 그런데 우린 이걸 모르고 신앙이나 의지만 갖고 싸우려 했기 때문에 이길 수 없었던 겁니다. 여기서 예수님만 잘 믿으면 다 이길 수 있다, 그분이 대신 우릴 위해 싸워주시기 때문에 우린 예수님만 믿으면 된다고 믿는 사람은 여기 없을 거라고 믿습니다. 기독교인은 그런 얌체 같은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스캇 펙(Scott Peck)이란 유명한 저자가 있습니다. 그는 정신과의사지만 제가 보기에는 정신과 의사 이상입니다. 그는 뉴욕타임스 서평 사상 최장수 베스트셀러인 『아직도 가야 할 길 The Road Less Traveled』의 저자로서 그 외에도 많은 책을 쓴 유명한 저자입니다. 저는 그의 저서 『거짓의 사람들 People of the Lie』에 나오는 얘기를 소개하겠습니다. 펙 박사는 기독교인으로서 정신병을 악의 문제와 연결시킨 사람입니다.

하루는 조지라는 사람에 펙 박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회사에서 인정받는 뛰어난 세일즈맨인데 하루는 출장을 갔다가 그 도시 명소인 성당을 구경하게 됐습니다. 성당을 구경하고 나오는데 출입문 옆에 작은 헌금함이 있는 게 아닙니까. 가톨릭교인도 아닌 그는 교회에는 한 푼도 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불현듯 거기서 그냥 나갔다가는 그 어떤 액운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그는 스스로 남 못지않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므로 그런 불안과 두려움이 드는 것이 당황스러웠지만 좌우간 그는 지갑을 뒤져서 동전으로 55센트를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충격적인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습니다. 그게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생각이어서 그는 잠시 정신을 잃고 멍해질 정도였습니다. 그때 그의 뇌리에 글자 하나하나 새겨지듯이 떠오른 생각은 “너는 55세에 죽을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줄은 꿈에도 안 해봤던 그는 당황한 나머지 얼른 지갑을 뒤져서 5불짜리 한 장과 1불짜리 두 장을 헌금함에 넣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곧 그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두 주일 후 이번에는 직접 운전해서 출장을 갔는데 길가에 제한속도 45마일이란 표지판이 나왔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그는 “너는 45세에 죽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또 불현듯 떠올랐다는 겁니다. 그가 호텔에 도착해서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숫자는 그저 숫자일 뿐 거기에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말도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비슷한 일은 반복됐습니다. 일주일 쯤 후 그는 길을 가다가 업튼(Upton)이란 표지판을 봤는데 문득 “너는 업튼이란 사람에게 살해당할 것이다.”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한 낡은 기차역을 지나갈 때는 “저 기차역 천장이 무너져 너는 죽을 거다.”라는 생각이 떠올랐고 다리를 건널 때는 “네가 저 다리를 건너는 마지막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생각이 떠올랐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밤중에 확인해보려고 70마일을 달려서 그 다리를 건너봤다는 겁니다.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날 비로소 그는 깊은 잠을 잘 수 있었고 그 후로 두 달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무렵 귀갓길에 그는 또 “차가 구덩이에 빠져서 넌 죽을 거다.”라는 생각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었지만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번엔 진짜일지 모른다, 다리에서 무사했던 것은 자기 판단을 흐리려는 술책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눈에 띠게 수척해졌고 체중도 7킬로나 줄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펙 박사를 찾아와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사건의 전말을 털어놨습니다. 박사가 보기엔 그는 전형적인 강박신경증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조지에게 강박신경증세에 대해 설명해주면서 그런 사람들이 많다고 말해줬습니다. 그러자 조지는 비로소 안심하더랍니다. 자기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런 증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안심이 되더라는 겁니다. 그 후로 그는 박사를 정기적으로 만나 상담하면서 병세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증세가 잦아들자 그는 치료를 중단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혼자 감당할 수 있으니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거였습니다. 박사는 조지를 말렸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과 이틀 뒤에 조지가 박사에게 전화했습니다. 강박증이 또 찾아왔다는 겁니다. “너는 급회전하다가 길 가던 사람을 쳐 죽일 거다.”는 생각이 뜬금없이 들더랍니다.

그때서야 조지는 자신에 대해 박사에게 솔직하게 얘기했습니다. 어렸을 때 있었던 일들, 아내와의 관계 등등에 대해 솔직하게 말했다는 겁니다. 그는 어렸을 때 외조부 댁에서 2년 정도 살았는데 그때 외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매주 거르지 않고 손찌검을 했다는 거지요. 그때 조지는 할머니가 혹시 죽지나 않을까 걱정하곤 했답니다. 박사는 그런 일들이 조지가 겪고 있는 강박증의 원인이 됐다고 봤습니다. 박사가 그의 얘기를 듣고 나서 조지는 자기 인생의 실체들과 맞부딪치는 걸 피해왔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걸 피하려고 강박 증상을 이용한다는 겁니다. 그 증상이 연막 약할을 해서 근본적인 문제와 맞서는 걸 막아줬다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강박증상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리가 끊어져서 죽고 천장이 무너져서 죽고 45세에 죽고 55세에 죽고 등등.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의 공포와 맞부딪쳐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단순히 피하려고만 했다는 겁니다. 박사는 이런 얘기들을 그에게 자세히 해줬지만 그는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악마와 계약을 맺다

그는 그 후로도 계속 강박증에 시달렸는데 넉 달이 지난 어느 날 그가 밝은 얼굴로 박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강박증세가 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의사가 보기에 그는 여전히 자기의 고통스런 과거와 맞부딪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면담이 끝나갈 무렵 그는 느닷없이 “선생님은 악마의 존재를 믿습니까?”라고 묻더랍니다. 의사가 왜 그런 질문을 하냐고 묻자 그는 그저 호기심이라고 답했지만 의사는 조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답을 피하고 있습니다. 그런 질문을 한 이유가 분명 있을 겁니다.” 하지만 조지는 그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몇 번의 면담을 하는 동안 조지는 매우 밝고 명랑했다고 합니다. 차림새로 깔끔했고요. 그런 그가 의사에게 하루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고백할 게 있습니다.” 라더니 그는 의사가 자기 강박증을 치료하려고 대단한 노력을 하지 않는 것 같아서 혼자라도 뭔가 해야만 했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악마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진짜 악마를 믿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저도 뭔가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악마와 이런 계약을 맺었습니다. ‘만약 내가 강박 증세에 이끌려 다시 그곳으로 간다면 악마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생각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만들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무슨 얘긴지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는 자기 강박이 사실이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 그 장소에 가보곤 했는데 계약에 따라서 이제부터 그런 행동을 하면 악마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 생각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할 터이므로 그곳에 가지 말아야 할 강력한 동기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허구입니다. 곧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조지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허구였던 겁니다.

그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지만 계약을 맺었다는 생각이 효험이 있더랍니다. 실제 그는 악마를 믿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계약을 맺은 데 대해 죄책감이 느껴지더란 겁니다. 하지만 효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죄책감은 감수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박사는 그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내담자를 앞에 두고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생각에 빠졌습니다. 대체 ‘강박’이 뭡니까? 그걸 떨쳐버리려고, 곧 자체가 현실이 아닌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존재하지도 않는 악마와 계약을 맺고 또 거기서 효험을 보고 있다니 대체 이 강박이란 게 뭐냐 말입니다.

박사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조지는 또 한 번 그를 충격에 몰아넣는 얘기를 했습니다. “제가 죄책감을 갖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악마와 맺은 계약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악마를 믿지 않기 때문에 만약 그 장소로 돌아갈 경우 악마가 정말 저는 죽게 할 것인지 확실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걸 해결하려면 별도의 보험 있어야 했습니다. 제가 그곳으로 돌아가는 걸 확실히 막아줄 수 뭔가가 필요했지요. 그래서 저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막내아들 크리스토퍼를 걸었죠. 만일 내가 계약을 깨고 그리로 돌아간다면 나만 죽는 게 아니라 아들도 죽는다고 말입니다. 이제 제가 돌아갈 수 없는 이유가 뭔지 아셨을 겁니다. 설령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는 아들을 놓고 모험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거든요.”

그 말을 듣고 의사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조지와 같은 환자는 없었습니다. 강박증을 이기려고 악마와 계약을 하고, 게다가 사랑하는 아들까지 건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답니다. 조지는 그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의사는 그를 만류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면 자기 생각을 얘기해주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한참 기다려도 의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조지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언제 얘기하시렵니까?”라고 외쳤습니다. 그때서야 의사는 “조지, 당신에게 죄책감이 든다니 참 다행이네요.”라는 말로 얘길 시작했다. 그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2주일 후에 계속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악마의 존재를 믿습니까? 세상에 악의 존재한다는 것은 대부분 믿습니다. 드물지 않게 악을 경험하니까 말입니다. 물론 악의 존재를 믿지만 악마는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악마가 만들어낸 게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냈다고 믿는 겁니다.

저는 7-8년 전까지만 해도 악마를 믿지 않았습니다. 물론 신약성서에는 악마가 등장합니다. 신약성서는 악마의 존재를 전제하고 얘기를 전개합니다. 저는 그런 얘기는 죄다 그 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을 뿐, 현대인에게 믿으라고 강요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마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세상에는 사람의 통제를 벗어난 악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는 저도 모르겠는데 신약시대 사람들은 바로 그것을 악마 또는 사탄이라고 부른 게 아닐까 싶습니다.

곽건용 목사(향린교회)
로마서 1:18-28 고린도전서 6:9-10

곽건용 목사

뜻이 확실한 줄 알지만......

오늘은 신약성서가 동성애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그 전에 예수님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사람의 성적 지향에 대해 얘기하신 적 없습니다. 자신의 성적 지향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성적 지향에 대해서도 전혀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동성애를 반대하거나 인정하는 주장을 펼치는 데 예수님을 끌어들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침묵’으로부터 어떤 주장을 이끌어내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살펴볼 구절은 고린도전서 6장 9절, 10절과 로마서 1장 26절, 27절, 두 군데입니다. 신약성서에는 동성애 관련 구절이 몇 군데 더 있지만 시간적인 제약도 있거니와 가장 중요한 구절이 그 두 군데이므로 그것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6장 9절, 10절을 보겠습니다.

불의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나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나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도둑질하는 사람들이나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이나 술 취하는 사람들이나 남을 중상하는 사람들이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불의한 사람들’을 열거합니다. 음행하는 자들, 우상숭배자들, 간음하는 자들, 여성 노릇하는 자들, 동성애자들, 도둑질하는 자들, 탐욕 부리는 자들, 술 취하는 자들, 남을 중상하는 자들, 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란 겁니다. 열한 부류의 사람을 열거하므로 상당히 길게 보이지만 세상에 불의한 자들이 이들뿐이겠습니까. 불의한 자들이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들이 어디 이들뿐이겠냐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만 열거한 이유는 고린도교회의 상황 때문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이들 중에 다른 사람들은 누굴 의미하는지 분명한데 ‘여성 노릇하는 자들’과 ‘동성애자들’이 누굴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여성 노릇하는 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로 ‘말라코이’인데 이 말은 ‘부드러운 사람’이나 ‘여성스러운 사람’을 가리킵니다. 드물게는 ‘남창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나 ‘소아(小兒) 성애자들’(어린 아이와 성관계를 갖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한답니다. 여기서는 후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할 겁니다. 부드럽거나 여성스럽다고 해서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볼 수는 없을 터이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라코이’는 ‘남창’이나 ‘소아 성애자를 가리킨다고 봐야 할 텐데 문제는 이 단어가 그런 뜻으로 사용된 경우가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확실하게 그렇게 볼 근거가 부족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말 성서도 ‘탐색하는 자’ 또는 ‘여색을 탐하는 자’로 달리 번역했고 영어성서도 ‘adulterer’나 ‘male prostitute’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 단어는 뜻이 분명하지 않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이보다 더 문제가 되는 단어는 ‘동성애자’로 번역된 ‘아르세노코이타이’라는 말입니다. 학계에서는 이 단어가 ‘강제성이 있는 동성애자들’을 가리킨다고 학자들이 있지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 단어 역시 뜻이 분명하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말 성서가 ‘동성애자’ 또는 ‘남색 하는 자’라고 번역했으므로 그 뜻이 분명한 걸로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경우엔 하단에 각주를 달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뜻이 분명치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모든 경우에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말 만큼은 그래야 한다는 겁니다. 학자들 중에는 ‘말라코이’가 ‘성적으로 이용됐던 아이들’을, ‘아르세노코이타이’는 ‘말라코이를 성적으로 이용한 어른들’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문맥으로 보면 그럴 듯하지만 그렇게 볼만한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분명한 사실은, ‘말라코이’와 ‘아르세노코이타이’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들만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다음은 로마서 1장 26, 27절입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바르지 못한 관계로 바꾸고, 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마땅한 대가를 스스로 받았습니다.

바울은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했다고 비난합니다. 여기서는 고린도전서에서처럼 ‘말라코이’나 ‘아르세노코이타이’ 같이 한 단어로 된 표현을 쓰지 않고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한 부끄러운 짓’(Men committed shameless acts with men)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하는 부끄러운 짓’이 뭘까요? 그것을 남성 간의 성행위라고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더욱이 바로 앞에서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라고 말하므로 이 대목이 남성 간의 성행위를 가리키는 것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선 오해할 여지가 있는 번역부터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새번역성서>가 ‘바른 관계’와 ‘바르지 않은 관계’라고 번역한 말은 그리스어로 ‘자연스러운 관계’와 ‘자연스럽지 않은 관계’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개역성경>은 ‘순리대로’라고 제대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을 ‘바른 관계’와 ‘바르지 않은 관계’라고 표현하면 가치판단을 개입시키는 꼴이 됩니다. ‘다르다’와 ‘틀리다’가 다른 의미이듯 ‘다르다’와 ‘자연스럽다’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전자에는 가치판단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자연스럽다’거나 ‘자연스럽지 않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강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헤엄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반대방향으로 헤엄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선 뭐가 옳고 뭐가 그르다는 가치판단을 할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자연에 순응하는 것’과 그것을 ‘거스르는 것’을 가리킬 따름입니다.

그런데 ‘자연’라는 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입장이 갈립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보느냐 아니면 시대의 풍조로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는 겁니다. 이것은 그리스어 ‘피지코스’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창조질서라고 보면 동성 간에 성관계 갖는 것은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역리’(逆理)라고 봐야 합니다. 반면, 그걸 시대정신이나 시대의 풍조라고 보면 동성 간의 성관계에 대한 가치판단은 시대가 바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장애를 갖고 태어나는 걸 하나님의 징벌이나 저주로 생각했지만 시대가 달라져서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이 차이는 해석에서 비롯된 차이입니다. 곧 해석자가 어느 편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라는 겁니다. ‘피지코스’를 하나님의 창조질서로 해석하면 동성 간의 성행위를 금지하는 게 맞고 그것을 시대의 풍조로 해석하면 동성애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둘 중 어느 편이 옳다고 절대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둘 다 가능하므로 이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또한 이 구절을 이해하는 데는 로마서 1장 전체맥락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모든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보면 누구나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겁니다. 곧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가 없더라도, 예언자가 아니더라도, 꿈이나 환상을 보지 않더라도 자연세계와 삼라만상만 봐도 하나님을 알고 느낄 수 있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습니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부르시고 특별한 계시를 주셔도 사람들은 그걸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서 우상이나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어떻게 심판하셨습니까? 사람들이 마음 내키는 대로, 욕정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의 몸을 욕되게 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앞에서 열거한 음행하는 자들, 우상숭배자들, 간음하는 자들, 여성 노릇하는 자들, 동성애자들, 도둑질하는 자들, 탐욕 부리는 자들, 술 취하는 자들, 남을 중상하는 자들, 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이 그런 자들입니다.

뜻이 분명하지 않은 ‘말라코이’와 ‘아르세노코이타이’는 이들 가운데 두 부류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누구나 당신을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음과 탐욕 때문에 생각이 허망해졌고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결과들 중 두 경우인 겁니다. 그렇다면 의미가 분명한 다른 악행들, 곧 음행, 우상숭배, 간음, 도둑질, 탐욕, 술 취하는 것, 중상, 약탈 등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유독 ‘말라코이’와 ‘아르세노코이타이’만 떼어놓고 강조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판단은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결국 성서를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다

이상이 신약성서의 동성애에 대해 제가 하려는 얘기입니다. 그런 구절이 몇 군데 더 있지만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이제는 이 구절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과 인정하는 사람의 견해 차이는 결국 성서를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측과 인정하는 측 모두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동성애 반대 측은, 성서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이므로 자기들은 성서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게 믿는지는 곰곰이 생각해봐야 하겠지만 좌우간 그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반면 동성애를 인정하는 측은, 성서는 일차적으로 그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에게 선포되고 전해진 말씀이기 때문에 일차적으로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는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가 현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성서를 이해하려면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해석’해야 한다는 겁니다. 성서 시대 사람들이 갖고 있던 세계관과 가치관, 과학지식 등은 현대인의 그것과 달라도 많이 다르기 때문에 현대인이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석’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동성애 금지계명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들도 구약성서의 ‘모든’ 계명이 절대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돼지고기, 새우, 오징어, 바다가제, 굴 등을 먹지 말라는 명령과 월경 중에 성행위하지 말라는 명령, 간음한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 등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하지만 동성애 금지명령은 이런 계명들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들도 성서의 모든 계명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고 믿는 것 아닙니까? 반면 동성애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동성애 금지명령이 시간과 장소와 문화에 따라서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계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동성애자에 대한 의학적, 과학적 지식에 근거해서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따져봅시다. 양쪽 입장을 들여다보면 양쪽 모두 성서를 선택적으로 읽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양쪽 모두 자기들 입장을 뒷받침해주는 구절을 더 중요하게 받아들인다는 얘기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성서를 선택적으로 읽는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만 동성애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 점입니다. 곧 더 중요한 말씀이 있고 덜 중요한 말씀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도 있고 그렇지 않은 진리도 있다는 겁니다. 사실상 양편 모두 같은 입장을 갖고 있는데 동성애를 반대하는 측은 그 사실을 부인하는 한편 인정하는 측은 인정합니다.

동성애 금지계명의 이유와 목적

동성애를 금하는 계명은 왜, 무슨 이유로, 어떤 목적으로 주어졌을까요?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보면 어느 편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진지하게 추구하지 않습니다. 전자는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난다고만 말할 뿐, 금지계명의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는 답을 내놓지 않습니다. 동성애를 인정하는 측 역시 답을 내놓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동성애 반대는 인도주의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만 말할 뿐, 구약성서가 말하는 동성애 금령의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는 확고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계명에는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이유와 목적이 없이 주어진 계명은 없습니다. 아직 이유와 목적을 밝혀내지 못한 계명은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그걸 모른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구약에서 동성애 금지명령이 주어진 이유는 동성 간의 성행위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에 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남자끼리의 성행위를 통해서는 아이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구약성서시대 사람들은 사람의 생명이 남자의 정액에 의해 전달된다고 믿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갖고 있던 과학지식이 그랬습니다. 따라서 정액을 의미 없이 낭비하는 일은 생명을 죽이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야훼께서 보시기에 매우 악한 짓이었지요.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유다와 다말 이야기가 이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유다가 가나안 여인 수아를 아내로 받아들여 아들들을 낳았는데 그 중 큰아들 에르가 죽었습니다. 당시 관습에 따라서 유다는 둘째 아들 오난을 에르의 미망인 다말에게 들여보냈습니다. 다말과 동침해서 아들을 낳아주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난은 형수에게 아들을 낳아주기 싫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 재산의 일부가 그에게 가는 게 싫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오난은 다말과 잠자리에 들었다가 정액을 바닥에 쏟아버리곤 했답니다. 이런 오난의 행위가 야훼 보시기에 악했으므로 야훼가 그를 죽게 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이 동성애 금지명령의 이유와 목적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난의 행위는 남자끼리의 성행위와 똑같은 결과를 낳았습니다. 아기를 만들지 못하는 ‘무용한’ 성행위, 생명을 담고 있는 정액을 낭비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야훼는 이런 행위를 악하게 보셨던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성서가 여성 간의 성행위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생명을 낭비하는 행위가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동성애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제 오늘 설교가 거의 끝나갑니다. 성서가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얘기하는지에 대해서 제가 하려는 얘기는 모두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동성애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실까 하는 점입니다. 아직까지 해온 모든 얘기들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생각을 알려는 몸부림의 결과입니다. 양쪽 모두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제대로 믿어보려고 노력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분이란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진실을 자주 망각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진실 말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믿는 하나님은 우리가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하나님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동성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뭘까요? 하나님은 동성애를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려고 애쓰고 알 수 있는 것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텍스트’뿐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아직까지 한 얘기가 하나님의 생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동성애에 대한 성서의 구절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제대로 해석해보려고 애썼을 뿐입니다. 그 텍스트들을 어떻게 하면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소원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성서도 읽고 학자들과 영성가들의 글도 읽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분입니다.

저만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모르니까 매사에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은 죄인이다, 죄인은 반드시 회개시켜야 한다, 회개하기 전까지는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니까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함부로 받아들이는 걸 걱정해서 받아들이지 말자는 편이 아니라 함부로 배제하는 걸 걱정해서 받아들이자는 편입니다. 이것 역시 선택의 문제입니다.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어떻게 하는 게 동성애를 반대하는 겁니까? 동성애에 대해서 성서가 명하는 대로 행해야 한다면 동성 간에 성행위를 하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야 합니다. 레위기 20장 13절은 동성 간에 성행위하는 자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하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같은 남자와 동침하여 여자에게 하듯 그 남자에게 하면 그 두 사람은 망측한 짓을 한 것이므로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하지만 동성애 반대자들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투표에서 반대하고 거리시위를 하기도 하고 동성애자들을 말로 비난하기도 하며 가끔은 행동에 옮기기도 하지만 레위기가 명하는 대로 죽이지는 않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자신들 주장대로 성서가 명해서 동성애에 반대한다면 성서의 명령 그대로 죽여야죠. 그게 아니면 성서의 명령대로 실천한다고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결국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 주장은 그들을 차별하자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들을 이성애자들과 똑같이 대우하지 말자는 겁니다. 반대로 동성애자를 인정하자는 사람들은 그들을 차별하지 말자는 겁니다. 그들을 이성애자들과 똑같이 대우하자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그들을 차별하는 게 옳습니까, 아니면 차별하지 않는 게 옳습니까?

마지막으로 사진 한 장 보여드리겠습니다. 한 아이가 서 있고 그보다 더 어린 아이가 휠체어를 타고 앉아 있습니다. 엄마 케이티 마이어의 아들 케이든은 7개월 때 척수근육위축 판정을 받았답니다. 아이의 근육은 시간이 갈수록 서서히 약해지고 있습니다. 겨우 한 살인 그는 휠체어에 탄 채로 아주 제한적으로만 이동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케이든이 엄마와 함께 과학센터를 방문했습니다. 그가 한 체험형 교육 장치를 작동하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었는데 근처에 있던 소년이 다가와서 케이든이 공 굴리는 기계를 제대로 작동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옆에 머물면서 함께 놀아줬답니다. 이를 보고 엄마가 소셜 미디어에 아래 글을 썼는데 그게 화제가 됐습니다.

과학박물관에 있던 작은 소년에게.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르지만 멋진 행동을 보여줘서 고마워. 우리 아들과 함께 놀아줘서 고마워. 우리 아이가 바닥에서 공을 집지 못하는 걸 보고 네가 도와줬지. 왜 공을 집지 못하는지, 왜 못 걷게 된 건지도 묻지 않고 말이지. 케이든은 너와 아주 많이 닮았어. 호기심이 많고 아주 똑똑하지. 케이든은 물건

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해 해. 케이든이 힘이 약한 걸 알아채고 같이 레버를 돌려줘서 고마워. 너는 아마도 이 글을 읽을 수 없겠지만 너의 행동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있단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케이든에게 잘해주는 사람들은 꼭 왜 이렇게 된 건지 물어봐요. 그러면 나는 아들에게 너무 미안해져요. 그 소년이 내 아들을 보이는 상태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제게는 충격이었어요. 도와주면서도 정상인처럼 대했으니까요....”

동성애에 대해 찬성이니 반대니 하는 게 다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아이가 케이든에게 했던 것처럼 아무 것도 묻지 말고 그냥 바라봐주면 안 될까요? 그냥 있는 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주면 안 될까요? 저는 케이티가 한 말 중에 “그러면 나는 아들에게 너무 미안해요.”라고 말한 대목에서 전율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동성애가 옳으니 그르니 하면서 논쟁하는 걸 하나님께서 보시면서 동성애자들에게 미안해하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미안하다, 내가 너희들을 그렇게 태어나게 해서 그런 편견과 차별에 시달리게 만들어서....”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미안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향해서 미안해하시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은 그래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람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곽건용 목사(향린교회)
시편34:1-22,마가복음14:32-36


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오늘은 ‘기도’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사실 기도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기도에 대해 설교합니다. 오늘은 정말 하고 싶은 얘기, 해야 할 얘기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일일이 다 찾아 읽어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여러 번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이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얘기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비유를 말씀하셨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전한 복음서 기자 누가가 한 말입니다. 곧 비유가 기도에 관한 가르침이란 얘기는 비유에 대한 복음서 기자 누가의 ‘해석’입니다. 누가는 자기가 이해한 비유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서두에서부터 규정했던 겁니다.


어느 고을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못된 재판관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고을에 과부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내용이 뭔지는 모르지만 ‘억울한 일’이 있어서 줄곧 재판관을 찾아가서 자기의 권리를 찾아달라고 졸랐다는 겁니다. 하지만 재판관은 과부의 청을 모른 척하고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혼자 이렇게 생각했답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지만(자신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안 그러면 자꾸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


그러니까 과부의 억울한 사정이 불쌍해서도 아니고 정의를 세워야겠다는 의지가 있어서도 아니고 단순히 자기가 귀찮으니까, 청을 안 들어줬다가는 과부가 계속해서 자기를 귀찮게 만들 테니까 과부의 청을 들어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편하자고 들어주겠다는 겁니다. 복음서 기자 누가는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너희는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주시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했다고 전합니다.


여러분은 이 비유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비유에 대한 복음서 기자 누가의 해석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그 해석에 동의하십니까? 저는 본래 예수님의 비유가 말하려는 메시지와 누가가 이해한 메시지는 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예수님은 재판관을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못된 재판관’이라고 성격 규정했습니다. 만일 비유의 메시지가 누가의 해석처럼 ‘기도’에 관한 것이라면 재판관은 하나님이 되는데 어떻게 이렇게 ‘못된 재판관’이 하나님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 때 우리가 하도 졸라대니까 귀찮아서 들어주실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믿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본래 비유에서 못된 재판관은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저는 비유가 본래는 기도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약자가 자기 권리를 찾는 방법에 대한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약자가 가진 수단이라고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강자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라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중간에 포기하면 도무묵이 된다는 거죠. 강자가 귀찮아서라도 청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 누가는 이 비유를 기도에 관한 가르침으로 이해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기도와도 잘 들어맞는 부분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도가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에 이렇게 해석했을 거라고 봅니다.


비유가 말하려는 점은 ‘끈질김’입니다. 재판관이 하나님이든 강자든 청원하는 사람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란 겁니다. 하지만 과부가 그토록 끈질기게 청원한 ‘내용’이 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억울한 일’이라고만 말할 뿐이고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건 뭐든지 청원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저는 마태복음 6장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의 실마리가 있다고 봅니다.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지 말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예수님은 여기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남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회당이나 큰 길 모퉁이에서 기도하지 말라는 얘기는 남에게 보이려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둘째로,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하나님이 더 잘 들어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아니란 겁니다.


하나님은 숨어서 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남들이 안 보는 곳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은 얼른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우선 하나님이 숨어 계신다는 말이 그렇습니다. 왜 하나님이 숨어 계셔야 합니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숨어 계신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굳이 하나님이 숨어 계실 이유도 없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것과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납득할 수 없습니다. 남들에게 과시하지 않고 조용한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에는 여러분 모두 공감하실 겁니다. 하지만 그것과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점이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이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얘기에 비하면 별것 아닙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하시고는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게 뭔지 다 알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신답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다 아신답니다! 예수님은 그러니까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지 말라 하셨지만 사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신다면 전혀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요? 아예 기도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다 아시는데 뭣 하러 기도를 하는가 말입니다.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곧 우리에게 뭐가 필요한지 하나님은 이미 다 아신다면 우린 아예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은 들어주실 때까지 하나님이 귀찮아 할 정도까지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누가복음 18장의 비유와는 완전히 다른 메시지를 줍니다.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그 동안 여러분은 기도에 대해 뭘 어떻게 배웠습니까? 기도 많이 해라, 끈질기게 기도해라, 구체적으로 기도해라, 이루어질 줄 믿고 기도해라 등이 여러분이 기도에 대해 배운 것일 겁니다. 이 모든 것들은 기도하는 ‘방법’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기도를 ‘어떻게’ 하라는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곧 기도의 ‘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를 들어왔고 배워왔다는 겁니다. 하지만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곧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는 별로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6장에는 바로 기도의 ‘내용’에 대한 얘기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다 아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뭔지 아시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 아신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로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흔히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갖고 싶은 것, 내가 욕망하는 것을 구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기도란 그런 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내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 바로 다음에 주기도가 나옵니다. 주기도는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곧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터프하게 드리는 기도’입니다. 글자 그대로 우리가 기도를 하되 강하게 하자는 겁니다. 터프하게 기도하자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기도를 구걸하듯 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기도를 구걸하듯이 하지 말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하자는 겁니다.


갖고 싶은 것을 구하면 비굴해지고 필요한 것을 구하면 당당해진다


성서에는 기도를 당당하게 했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18장의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은 야훼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려 한다는 것을 알고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이 거기 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아브라함이 보기에 롯과 그 가족들을 소돔 성 사람들과 함께 멸하시는 것은 정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소돔 성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야훼께 청했습니다. 거기서 의인 오십 명을 찾아내면 그곳을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바꾸시겠냐고 말입니다. 야훼께서는 그렇게 하시겠다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당당하게 한 번 더 청합니다. 의인이 사십 명 있어도 계획을 바꾸시겠냐고 말입니다. 이에 야훼께서 동의하시자 그는 숫자를 점점 줄여 열 명까지 낮췄지요. 물론 알다시피 소돔 성은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당하고 맙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야훼와 당당히 맞서서 기죽지 않고 기도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구걸하지 않고 당당히 구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의 기도 내용이 정당했기 때문입니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는 일이 야훼의 원칙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야훼께 원칙을 지키라고 청했던 겁니다. 기도의 ‘내용’이 야훼 스스로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야훼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욥도 그랬습니다. 욥은 흠이 없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흠이 전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는 야훼 자신도 인정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이유 없이 고통을 당합니다. 원인은 천상에서 야훼와 사탄이 벌인 내기 때문이지만 욥이 그걸 알 리 없습니다. 그에게는 그게 ‘이유 없는’ 고통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그는 야훼께 당당히 따졌습니다. 자기가 왜 이런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하냐고 말입니다. 그는 누구에게나 당당했습니다. 분명히 그럴만한 죄를 지었을 테니 얼른 하나님께 회개하라고 닦달하는 친구들의 주장에도 그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럴 만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법정으로 끌어내려 합니다. 법정에 나란히 서서 잘잘못을 따져보자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피고인 동시에 재판관이라는 문제가 있어서 망설였지만 말입니다. 이런 욥이 여러분 눈에는 어떻습니까? 당당하지 멋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겟세마네에서의 기도에 대해서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제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는 기도를 아버지의 뜻이 무조건 ‘순종’하는 기도라고 말입니다. 물론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순종을 가리키는 것, 맞습니다. 하지만 이 기도는 당당하게 “이젠 제 할 일을 다 했으니 아버지의 차례입니다. 이제는 아버지께서 나서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골고다로 가셔서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터이니 그 사건을 통해 아버지의 구원의 뜻을 이루시려면 이젠 직접 나서시라는 뜻의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소유하려 하고 욕망을 채우려 한다면 비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걸 겸손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겸손은 그 반대급부로 뭔가를 얻으려는 목적이 없을 때 자기를 낮추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에게 아부나 하고 하나님 마음에 드는 행위를 해서 하나님에게 뭔가를 얻어내려 한다면 그런 기도가 얼마나 비굴해지겠습니까. 하지만 기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 곧 정의와 평화, 인권과 자비와 화해 등을 구하는 거라면, 곧 하나님의 나라가 땅 위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런 기도를 당당하게 드릴 수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는 종교를 통해서 물질적인 복을 얻어서 누리려는 기복신앙을 비판하면서 기도에 대해서는 기복신앙의 태도를 그대로 유지해왔습니다. 안 그렇다고 말하지 못할 겁니다.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저는 우리 기도의 내용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으로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갖고 싶은 것,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위해 기도합시다. 하늘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자는 말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가 마음과 뜻을 합해서 함께 이루어나갈 것을 소망하는 적극적인 신앙 행위이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