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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구약 산책 http://blog.kcmusa.org/kwakgunyong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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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목사는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신일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한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해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에서 마쳐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1985년에서 1993년까지 서울향린교회에서 전도사, 부목사로 일하며 소중한 두 분의 스승인 고 안병무 선생님과 홍근수 목사님을 만나 신학과 목회의 방향을 정했습니다. 1993년 미국으로 건너와 줄곧 나성향린교회(전 선한사마리아인교회)를 목회하면서 클레몬트대학원에서 구약학 박사과정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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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나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우르에서 죽었더라.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세기 11:27-12:4, 개역 개정판).

 

"Now these are the descendants of Terah. Terah was the father of Abram, Nahor, and Haran; and Haran was the father of Lot. Haran died before his father Terah in the land of his birth, in Ur of the Chaldeans. And Abram and Nahor took wives; the name of Abram's wife was Sarai, and the name of Nahor's wife, Milcah, the daughter of Haran the father of Milcah and Iscah. Now Sarai was barren; she had no child. Terah took Abram his son and Lot the son of Haran, his grandson, and Sarai his daughter-in-law, his son Abram's wife, and they went forth together from Ur of the Chaldeans to go into the land of Canaan; but when they came to Haran, they settled there. The days of Terah were two hundred and five years; and Terah died in Haran. 

Now the LORD said to Abram, "Go from your country and your kindred and your father's house to the land that I will show you. And I will make of you a great nation, and I will bless you, and make your name great, so that you will be a blessing. I will bless those who bless you, and him who curses you I will curse; and by you all the families of the earth shall bless themselves." So Abram went, as the LORD had told him; and Lot went with him. Abram was seventy-five years old when he departed from Haran." (창세기 11:27-12:4, RSV).

 

 

1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시간에 문단나누기했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산문의 경우 어디서 새로운 문단이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는지를 알아 맞추는 것 문단나누기였지요. 논리라고는 전혀 없이 뒤죽박죽인 글을 제외하면 모든 산문은 문단나누기를 할 수 있고, 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단나누기를 잘 하는 사람은 글을 제대로 잘 읽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문단나누기를 할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신문기사나 논설에서부터 소설이나 수필, 그리고 학술논문에 이르기까지 종사하는 직업에 따라 수많은 종류의 글을 읽으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수많은 종류의 글을 읽는다고 해서 고등학교시절 시험준비 할 때처럼 문단나누기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동안 문단나누기를 해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매주일 설교를 하는 목사가 된 후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매주일 읽을 성경구절이 정해져 있는 성경주기표 (lectionary) 를 따르지 않는다면 설교자는 설교할 성경본문을 스스로 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 정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본문을 정하는 일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끊어야 하느냐의 문제이므로 결국은 문단나누기라는 것이지요. 성경본문의 해석이 설교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은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는 데 있어서 첫번째 과제는 문단나누기곧 텍스트의 단위 (unit) 를 어떻게 정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우선 텍스트가 당시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려 했는가를 정확하게 짚어내야 합니다. 그것을 텍스트의 의도를 파악한다고 말합니다. 텍스트 본래의 의도를 정확히 짚어내야 거기에 기초해서 오늘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하여 그것을 전할 수 있습니다. 텍스트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문단나누기를 잘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입니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로 읽으면 설교가 제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문단나누기가 설교자나 성경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학자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사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의식적으로는 아니라 할지라도 나름대로 문단나누기를 하면서 읽습니다. 다만 의식하지 않을 뿐입니다. 이 때 장 (chapter) 과 절 (verse) 의 구분이 도움이 되긴 하지만 거기에 전적으로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장과 절이 문단나누기를 의식하고 만들어지긴 했지만 제대로 나누어지지 않은 부분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단나누기를 할 때는 글의 형식과 내용을 동시에 고려해야 합니다. 가장 쉬운 예는 시와 산문의 구별입니다. 시를 읽고 감상하는 방법과 산문을 읽고 감상하는 방법은 엄연히 다르므로 이 둘은 반드시 구별해야 합니다. 개역성경의 가장 큰 약점은 이 둘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 밖에도 말하는 사람 (narrator) 은 누구이고 듣는 사람 (audience) 은 누구인가도 따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지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고 있는지, 아니면 내레이터가 말하는지, 말하는 사람이 등장인물 중에 있다면 그것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구분해야 텍스트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라는 말은 욥기 8 7절에 나오는 말입니다. 아마 욥기에 나오는 말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말일 겁니다. 제가 사는 이곳 나성에는 한인들이 운영하는 많은 식당들과 사무실에 가보면 이 말씀이 한쪽 벽에 걸려 있습니다. 사업의 시작은 미미했지만 나중에는 돈을 많이 벌어 크게 확장하겠다는 주인의 간절한 소원과 굳은 의지가 이 한 문장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이 글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니 그 위력과 효과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또 의심해서도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누구 입에서 나온 말인지 아십니까? 이 말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은데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빌닷이 한 말입니다. 빌닷은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겠다고 왔지만 욥과 얘기하다가 위로가 아니라 비난과 비판 쪽으로 흘러버린 욥의 세 친구 중 한 사람입니다. 빌닷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욥에게 아무 근거 없이 욥의 자녀들이 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을 거론하며 욥에게 회개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만일 욥이 회개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만 한다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는 얘기입니다. 곧 사업성공을 비는 말이 아니란 뜻입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아무리 말이 멋있어도 식당이나 사무실에 걸어놓기는 적절하다고 할 수 없겠습니다.

요약하면, 성경을 잘 읽으려면 문단나누기를 잘 해야 하는데 문단나누기를 잘 하려면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듣는 사람은 누구인지, 그리고 그 내용은 어떤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2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12장을 둘만 들라고 하면 창세기 12장과 로마서 12장을 들 수 있겠습니다. 창세기 12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는 이야기로서 글 서두에 인용되어 있는 우리의 본문이고, 로마서 12장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는 말씀으로 바울이 교훈 또는 교리의 말씀을 마무리하고 생활 또는 실천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하는 장입니다. 둘 다 기독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유명한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저는 창세기 12 1절이 아니라 11 27절로부터 살펴보려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12 1절에서 새 단락이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11 27절에서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저만 유독 그렇게 읽는 것은 아니고 많은 학자들이 그렇게 읽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창세기 11장은 1절에서 9절까지 바벨탑 이야기를 한 다음에 10절부터는 셈의 자손의 족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족보는 마지막 절인 32절까지 이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마지막 절까지 족보 얘기이긴 합니다. 하지만 잘 읽어보면 26절과 27절이 어색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앞에 나온 족보와는 형식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24절부터 26절까지는 나홀은 이십구 세에 데라를 낳았고 데라는 낳은 후에 백십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라고 적혀 있는데 후 27절 이하에는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라고 적혀 있습니다. 27절이 10절처럼 아무개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라는 말로 시작되면서 데라의 자손에 대한 얘기가 26절과 27절에 중복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1 10절부터 26절까지의 족보에는 이런 중복이 없는데 유독 26절과 27절에만 같은 내용이 중복되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왜 같은 내용이 중복되어 있을까요? 그 까닭은, 10절부터 26절까지는 셈의 족보이고 27절 이하는 데라의 족보이기 때문입니다. 곧 서로 다른 두 개의 족보가 연결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셈의 후손의 족보는 결국 아브람에게 귀결되어 있습니다. 결국은 아브람 얘기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아브람만은 못하지만 다른 조상들보다는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가족을 이끌고 고향인 갈대아 인의 우르 (Ur) 를 떠났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 1절 이하의 텍스트가 중요한 까닭은 아브람의 가족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장차 보여주실 땅으로 갔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향을 떠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많은 사람이 12 1절 때문에 아브람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도 아브람 못지않게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은 아브람이지만 처음으로 고향을 등지고 길을 떠났던 사람은 데라였습니다. 창세기 11장은 이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어색함을 무릅쓰고 27절 이하에서 이 사실을 중복해서 전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1 27절 이하에 나오는 데라의 족보는 앞에 나오는 지루한 족보와는 달리 중요한 정보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처음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을 등지고 길을 떠났던 사람은 데라였다는 사실입니다 (31). 이때 이미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11 31). 물론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란 사실은 그때까지는 밝혀져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데라의 족보를 중복해서 전하는 이유가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창세기 11 27-32절에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임신하지 못하는 불임여성이었다는 사실입니다. 30절에는 뜬금없이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라는 말이 나옵니다. 앞의 족보에는 남자 이름과 그의 아들 중 장자의 이름만 밝히고 나머지 자녀들은 이름도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아무개는 아무개를 낳은 후 몇 년 동안 자녀를 낳았으며…” 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경우는 아내의 이름과 더불어 그들에게 자녀가 없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져 있습니다. 자식을 낳아준 아내의 이름도 전하지 않는 족보에 자식도 낳지 주지 못한 아내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는 사실이 자못 흥미롭습니다. 여기에는 아브람에게 자식이 없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함과 동시에 어떤 아내가, 또는 몸종이 낳은 자녀가 적법한가가 문제가 되리라는 점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요약하면, 데라의 족보를 따로 전한 까닭은 상투적인 형식의 족보로는 전할 수 없는 특별한 내용을 전하기 위해서였고, 그 특별한 내용은 첫째, 데라가 이미 가족들을 이끌고 고향 우르를 떠나 가나안을 향해 갔다는 사실이고, 둘째 아브라의 아내 사래는 불임여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아브람의 이야기에서 매주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습니다. 아브람의 이야기는 이 두 사실을 축으로 해서 전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3

 

아브람에게 고향을 떠나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명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122절에서 아브람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5절은 아브람 일행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고 말하고 6절은 가나안 땅에는 그때 이미 가나안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7절은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의 내용이 분명해졌습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후손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이고 둘째는 가나안 땅을 아브람의 후손들이 차지하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곧 자손의 번성과 땅의 소유, 이 두 가지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가지 약속이 이루어지는 데 장애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아브람의 후손이 번성하리라는 약속이 이루어지려면 일단 아브람에게 자식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이 약속을 받았을 때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불임여성이었고 이미 이들 부부는 충분히 (!) 늙어 있었습니다. 과연 아브람은 누구에게서 후손을 낳아야 할까요? 텍스트는 사래가 불임여성이었음을 일찌감치 밝혀 놓음으로써 긴장감을 더하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될 것인가, 성취된다면 어떤 방식으로 성취될 것인가 하는 긴장감 말입니다. 텍스트는 약속과 그 성취 사이에 난관이 가로막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요즘  가족제도에서는 대가 끊긴다고 해서 아내 아닌 다른 여자에게서 후손을 보는 일은 윤리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합니다. 하지만 옛날 아브람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재산만 많다면 얼마든지 여러 아내를 거느릴 수 있었고 아들을 얻기 위해서 둘째나 셋째 부인을 얻거나 몸종의 태를 빌리는 일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대였습니다. 실제로 아브람 부부도 그렇게 했습니다. 사래의 몸종이었던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란 아들을 얻었으니 말입니다. 이 일이 훗날에 종족갈등의 씨앗이 됐지만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당신께서 정한 후손이 아니라고, 적법한 후손은 사래의 태를 통해 태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래가 불임여성이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를 가로막고 있는 높은 장벽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땅의 약속은 어땠습니까? 여기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이미 거기에는 가나안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은 깃발만 꽂으면 내 땅이 되는 빈 땅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오랫동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작가 황석영 씨가 북한을 다녀와서 사람이 살고 있었네!” 라는 제목의 책을 낸 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제목입니까! 그 땅에 2 5백만 명을 헤아리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통계를 통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라는 제목은 얼마나 큰 충격이었습니까! 거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뿔난 도깨비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오래 잊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북한 땅에만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 오래 전부터 그 땅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늑대의 울음소리만 들리는 빈 땅이 아니라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다투면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땅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이 살고 있던 땅을 아브람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떻게?’ 라는 물음과 함께 그렇다면 거기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을 다 죽여버리고 그 땅을 아브람의 후손에게 주시겠다는 말씀인가? 아니면 가나안 사람들과 아브람의 후손을 공존하게 하겠다는 말씀인가? 그것도 아니면 신비한 방법으로 둘을 하나로 만드시겠다는 말씀인가? 과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약속을 주시면서 어떤 방법을 생각하고 계셨을까요?

이 두 가지 약속과 그것들의 성취, 그리고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난관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아브람의 이야기뿐 아니라 그 이후에 전개되는 긴 이야기들의 중심 주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이후의 이야기란 짧게 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 이스라엘의 선조들의 이야기이고 길게 보면 창세기에서부터 신명기까지의 모세오경과 그것을 넘어서 여호수와, 사사기까지의 이야기들을 가리킵니다. 아브람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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