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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구약 산책 http://blog.kcmusa.org/kwakgunyong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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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목사는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신일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한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해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에서 마쳐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1985년에서 1993년까지 서울향린교회에서 전도사, 부목사로 일하며 소중한 두 분의 스승인 고 안병무 선생님과 홍근수 목사님을 만나 신학과 목회의 방향을 정했습니다. 1993년 미국으로 건너와 줄곧 나성향린교회(전 선한사마리아인교회)를 목회하면서 클레몬트대학원에서 구약학 박사과정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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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 12일 / 사순절 둘째 주일


말할 때와 침묵할 때

전도서 3:1-8 마가 8:31-33


곽건용 목사


품격 있는 삶

예수님의 수난사는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떠돌이 예언자 나사렛 예수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반면 전도서는 부와 권력을 남부러울 것이 없이 누렸고 지혜의 화신(化身)이라 불렸던 솔로몬 왕이 인생을 마감하는 시점에서 지나온 나날을 돌이켜보며 적은 글로서 결국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것이었다고 말하는 책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둘 사이에 그 어떤 공통점도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전도서만 따로 읽지 말고 잠언, 욥기, 전도서 등 지혜문학 전체를 염두에 두고 읽을 때 둘 사이에는 통하는 면이 있다고 했습니다.

잠언은 초등학생을 위한 책이고 욥기는 중고등학생을 위한 책이며 전도서는 대학원생을 위한 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잠언의 내용은 지극히 상식적이며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고, 욥기는 사춘기 때 절실하게 물었음직한 물음과 저항을 담고 있는 책이며, 전도서는 모든 것을 다 해보고 인생의 달고 쓴 맛을 모두 겪어 본 사람이 쓴 책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일리가 전혀 없는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옳은 얘기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책 제목이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십여 년 전에 “내가 살면서 알아야 할 것은 유치원에서 모두 배웠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정작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유치원에서 다 배운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살아가면서 삶의 고통이나 허무의 문제에 부딪쳐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살아가면서 내내 그런 문제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리기만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고통의 문제나 허무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살아가면서 항상 부딪치는 일상적인 문제들은 아닙니다. 예외적으로 부딪치는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무와 무의미에 늘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대부분의 문제에 대한 답은 잠언에 다 들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잠언은 삶의 교과서 같은 책입니다. 교과서는 어려운 참고서에 비해 내용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교과서를 무시하고 어려운 참고서를 풀 수 없고 초등학교를 건너뛰고 중학교 갈 수 없고 고등학교도 안 나온 사람이 대학원 갈 수 없듯이 잠언이 없는 욥기와 전도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잠언과 욥기와 전도서는 쓰인 시기도 다르고 저자도 다르고 본래 순서대로 읽도록 의도되지는 않았지만 내용을 보면 잠언, 욥기, 전도서 순으로 읽으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지혜문학이 말하는 올바른 삶이란 무엇입니까? 지난주에 얘기했듯이 창조세계 안에는 창조주 하느님께서 심어놓은 질서가 있는데 이 질서를 잘 깨닫고 거기 순응하여 삶으로써 행복을 누리는 것, 이것이 지혜문학이 말하는 올바른 삶이요 지혜로운 삶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지혜문학은 행복한 삶이나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는 삶을 애초에 목표로 정해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방편’으로서 하느님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을 살라고 권고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이 뭔가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 그 자체가 지혜문학의 궁극적인 가르침입니다. 질서에 순응하는 삶이라고 해서 삶이 미리 정해진 궤도를 따라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지혜자의 삶은 기대와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잠언은 지혜자의 삶이 도달할 결말을 비교적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결말은 행복한 삶이고 축복 받은 삶이라고 말입니다. 이에 비해서 욥은 그 결말이 그렇게 당연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욥도 자기에게 불행이 닥쳐오기 전에는 잠언처럼 믿었지만 이유 없이 닥쳐온 불행으로 인해 그 신념이 흔들립니다. 전도서는 욥기보다 더 회의적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생각을 알 수 없고 지혜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손 밖에 있다고 전도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잠언과 욥기와 전도서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세 책 모두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삶을 권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잠언은 말할 것도 없고 욥기와 전도서도 이 점에서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을 다잡지 않으면 삶은 몸이 욕구하는 대로 따라 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지혜문학은 몸이 가는 대로 생각도 따라서 가는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잠언에 나오는 게으르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저는 잠언, 욥기, 전도서를 통틀어 지혜문학이 지향하는 삶은 품격(dignity)있는 삶이란 한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지혜문학이 말하는 품격 있는 삶

잠언은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확연히 구분합니다. 잠언의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잠언이 말하는 품격 있는 삶은 하느님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입니다. 잠언의 가르침대로만 산다면 그 사람은 넉넉하게 품격 있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잠언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품격이 있습니다. 잠언의 가르침이 지당하고 쉽다고 해서 잠언대로 살아가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잠언이 가르치는 대로만 살면 그 사람의 삶에서는 품위가 우러나오고 향기가 날 것입니다.

한편 욥은 부당한 고난을 당하여 재를 뒤집어쓴 채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고 있었지만 결코 품격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의 겉모양을 비참하기 그지없었지만 그의 내면으로부터 눈부신 광채가 퍼져 나왔습니다. 그는 납득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는 친구들의 주장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느닷없이 닥친 고난은 그의 품격을 여지없이 추락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되도록 자신을 내팽개치지 않았습니다. 이유 없이 닥쳐온 고난은 품격을 지키며 살아온 그의 삶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고난을 죄의 대가로 믿었기 때문에 욥의 친구들은 욥더러 얼른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빌라고 충고했습니다. 기억하지 못해도, 납득할 수 없어도 일단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보라는 말입니다. 쉬운 길로 가라는 충고였습니다. 여러분도 알지도 못하는 죄를 무조건 용서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모두 용서해주십시오.” 하는 기도가 바로 이런 기도입니다. 하지만 욥은 이렇게 쉬운 길 가기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는 알지도 못하는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대신 하느님의 정의를 문제 삼았습니다. 하느님이라면 모름지기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은 쉽게 용서를 비는 길보다는 신성모독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하느님과 직접 대면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대답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욥의 품격입니다. 지혜문학이 말하는 품격 있는 삶은 겉모양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품격은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보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리석은 자의 삶을 살라고 권고하지는 않습니다. 삶은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되는 대로 막 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껏 쾌락을 누리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행복이 있는데 그것을 감사하게 누리며 살라고 권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잠언과 욥기와 전도서가 말하는 삶의 품격을 모두 한 몸에 구현하셨던 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들, 특히 비유의 말씀들에는 잠언과 그것을 더욱 심화시킨 가르침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속으로는 욥이 외친 것 못지않게 하느님의 정의를 갈망하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고 예수께서 자주 눈물 흘리셨던 데서 이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사랑의 표현인 동시에 분노의 표출이고 정의의 외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전도서가 묻고 있는 궁극적인 물음인 죽음에 대한 물음에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잡혀와 자기 앞에 끌려온 예수께 “나에게는 너를 놓아줄 수도 있고 십자가형에 처할 수도 있는 권한이 있는 줄을 네가 모르느냐?” 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네가 하늘로부터 권한을 받지 않았다면 나를 어떻게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움찔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에게는 누구도 범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용기’가 아니었습니다. 깊은 신앙에서 우러나온 태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모든 것을 무효화하는 부정적인 힘으로 받아들이시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품격이었습니다.

이렇듯 지혜문학이 가르치는 품격 있는 삶과 예수님의 삶에는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지혜문학이 말하는 품격 있는 삶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때’에 관한 말씀과 때를 분별하는 삶도 바로 삶의 품격 중 하나였습니다.


‘때’를 분별하는 지혜

전도서는 삶의 궁극적 의미를 파악하는 지혜는 인간의 능력 밖에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런 지혜는 오직 하느님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얻을 수 있는 지혜, 곧 인간의 능력 안에 있는 지혜들도 있는데 ‘때’에 관한 지혜도 그 중 하나입니다. 모든 일에는 다 정해진 때가 있다는 지혜의 말씀 말입니다. 오늘 읽은 전도서 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나 정한 때가 있다.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나 다 때가 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으면 살릴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애곡할 때가 있으면 춤출 때가 있다.


예수께서도 ‘때’를 중시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억지로 이룰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다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일은 상황이 무르익어야 하고 여건이 갖춰져야 합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인을 예수께 보내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하라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마리아가 무슨 의도로 하인을 예수께 보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아들에게서 뭔가 심상치 않은 점을 느꼈을 것입니다. 요셉과 정혼한 상태에게 그녀에게 나타났던 천사의 말을 기억했었던 지도 모르지요. 이 때 예수께서는 아직은 당신께서 세상에 나타날 때가 아니었다고 보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은 메시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은 낮이요 일할 때라. 밤이 오면 일하지 못하리라.”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수난의 시간이 다가옴을 느끼시고 그 시간이 이르기 전에 해야 할 사역을 마저 감당하시려 했습니다. 이 이야기 역시 ‘때’에 대한 예수님의 민감한 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반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거듭 예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아직 그럴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때’에 대한 민감한 의식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드디어 예수님께 수난의 시간이 왔습니다. 이 시간은 동시에 예수님께는 ‘침묵’과 ‘무행동’의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신 후 답답하게 보일 정도로 침묵하셨고 무기력해 보일 정도로 아무 행동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을 상대로 권위 있게 논쟁하시지 않았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빌라도에게는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고 떠들어대던 빌라도에게 ‘하느님의 허락’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짤막하게 대답하셨을 뿐입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라는 비아냥거림에도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수난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때’에 대한 예수님의 예리한 인식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듯 침묵하심으로써, 수난을 몸으로 받아들이심으로써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전도서의 가르침으로 보나 예수님의 삶으로 보나 지혜로운 삶은 ‘때’를 파악하고 분별하는 삶입니다. 그런 인식이 내 삶을 품격 있게 만들어줍니다. 웃어야 할 때인지 울어야 할 때인지, 받아들여야 할 때인지 거부해야 할 때인지, 말을 해야 할 때인지 침묵해야 할 때인지, 칭찬해야 할 때인지 꾸중해야 할 때인지, 매질을 해야 할 때인지 가슴으로 끌어안아야 할 때인지를 잘 분별하는 사람의 삶은 지혜롭습니다. 그런 삶은 자기의 품격을 높일 뿐 아니라 공동체의 품격도 높여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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