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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구약 산책 http://blog.kcmusa.org/kwakgunyong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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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목사는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신일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한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해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에서 마쳐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1985년에서 1993년까지 서울향린교회에서 전도사, 부목사로 일하며 소중한 두 분의 스승인 고 안병무 선생님과 홍근수 목사님을 만나 신학과 목회의 방향을 정했습니다. 1993년 미국으로 건너와 줄곧 나성향린교회(전 선한사마리아인교회)를 목회하면서 클레몬트대학원에서 구약학 박사과정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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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2 26 / 주현절 여덟째 주일


거룩한 떡을 먹다

사무엘상 21:1-6


곽건용 목사


‘풍운아’ 다윗

제가 어 렸을 때는 만화나 영화 제목에 ‘풍운아(風雲兒)’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풍운아는 ‘좋은 때를 타고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매사에 일이 순탄하게 풀려 출세한 사람을 풍운아라고 부르지는 않았던 같습 니다.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소기의 목적을 이룬 사람을 그렇게 불렀던 같습니다.

다윗은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뜻을 이뤘다는 의미에서 전형적인 ‘풍운아’였습니다. 이새의 여덟 아들로 태어난 다윗은 집안에서 대수롭지 않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들 많은 집에 여덟 아들이었으니 가족들 눈에 띠기나 했겠습니까. 마디로 그는 태어나서부터 ‘주변인’이었습니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볼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이 우연히 전쟁터에 나갔다가 골리앗이란 블레셋 장수가 야훼 하느님을 능멸하는 것을 보고 분기탱천하여 물맷돌로 그를 죽임으로써 사울 왕실의 군인으로 발탁됐습니다. 그는 승승장구하여 사울의 가장 신임 받는 장수가 됐고 사울 왕의 총애를 몸에 받아 나중에는 그의 사위가 됐습니다. 그러나 천심(天心) 민심(民心) 다윗에게 기우는 것을 사울은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인생은 고달파지기 시작합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그의 친구였지만 그조차도 다윗을 향한 아버지 사울 왕의 미움을 없애지 못했고 다윗은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도망길에 오른 다윗은 놉에 사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갔습니다. 미리 전갈도 없이 다윗을 당황하며 맞은 아히멜렉에게 다윗은 왕명을 받아 이를 수행하러 가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는 배가 고프니 먹을 것 을 없겠느냐고 제사장에게 물었습니다. 제사장은 야훼 하느님께 바친 거룩한 밖에 없다고 말하며 다윗과 그의 군인들이 근래에 여인을 가까이 적이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떡을 먹을 자격이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윗이 그런 적이 없다고 하자 아히멜렉은 야훼 하느님께 바쳐졌던 떡을 다윗에게 주어 다윗은 그것을 먹고 목숨을 부지할 있었습니다. 나중에 사울 왕은 일에 대해 얘기를 듣고 놉의 사제들을 불러들여 모조리 죽여 버렸습니다. 아히멜렉의 아들 에비아달만 간신히 도망쳤는데 훗날 그는 다윗이 왕이 다음에 제사장이 됐습니다.

모든 망 명자의 신세가 그렇듯이 다윗의 망명생활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남의 나라 왕에게 자기 몸을 의탁하러 갔다가 정체가 드러나 오히려 위기에 놓이자 그는 미친 사람 시늉을 함으로써 가까스로 살아남기도 했습니다. 그는 번이나 사울의 손에 죽을 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았습니다. 반대로 사울을 죽일 기회도 있었지만 그는 하느님께서 손수 세우신 자기 손으로 왕을 죽일 없다면서 죽이지 않고 죽일 수도 있었다는 표식만 남겼습니다. 이에 사울은 잠시 감동하여 그의 행위를 후회하지만 후회가 오래 가지는 못하고 다시금 그를 죽이려 혈안이 됩니다. 사울은 이미 심각한 분열증을 앓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망자 다윗은 어떻게 연명했을까?

이렇게 망명생활을 하던 다윗 주변에 그를 따르겠다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했습니다. 언뜻 납득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추스르기도 어려운 망명객에게 많은 사람이 몰려들다니! 하지만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면 일이 전혀 납득 못할 일 은 아닙니다. 다윗을 따르겠다고 몰려든 사람들은 ‘억눌려 지내던 사람들과 빚을 지고 허덕이던 사람들, 밖에 불평을 품은 사람들’이었다고 했습니다(사무엘상 22:1-2). 마디로 말하면 사회에서 버려진 사람들,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다윗에게 몰려들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카드빚 독촉에 이겨 노숙자가 사람들이나 옛날에 빠지게 농사지어도 소작료도 감당하지 못해 산적이 사람들처럼 다윗 시대에도 그렇게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다윗 주변에 몰려들었고 다윗은 이런 사람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던 것입니다. 다윗도 왕에게 쫓기는 처지였으니 그들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생계를 유지했겠습니까? 방법을 보여 주는 얘기가 나발과 아비가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발은 부자였고 아비가일은 그의 아내였습니다. 하루는 다윗이 나발에게 부하를 보내 “ 당신은 우리 덕분에 먹고 살고 있으니 우리가 당신을 돌봐준 대가를 주시오. 라고 전하게 했습니다. 말은 들은 나발은 “도대체 다윗이 누구냐? 요즘은 주인에게서 뛰쳐나온 종놈들이 저마다 우두머리가 되는 세상이거든! 내가 어디서 굴러 왔는지도 모르는 놈들에게 먹을 것을 줘 야 한단 말이냐? 라고 대꾸하며 다윗 부하들을 빈손으로 쫓아 보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화가 나서 부하들을 무장시켜 나발을 죽이러 떠났습니다. 소식을 나발보다 먼저 들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우선 급한 대로 선물을 다윗에게 보내 급한 불 을 끄고 나중에 직접 그를 찾아가 엎드려 자기 남편의 어리석음을 대신 사과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화를 풀고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은 나발이 몸이 굳어 죽어버렸습니다. 심장마비 같은 것이 왔던 모양입니다. 나발이 이렇게 죽자 다윗은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았습니다. 다윗 일행은 이렇듯 무장한 군인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부자들을 보호해준다는 명목으로 그들에게서 재물을 취하는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사울의 추적의 고삐가 점점 강하게 조여들자 다윗은 이상 본국에 머물 없어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 블레셋으로 망명하여 블레셋의 용병이 됐습니다. 블레셋 왕으로부터 작은 하나를 배당받은 다윗은 주변 마을을 침공하여 약탈하는 것으로 연명했습니다. 사실이 블레셋 왕에게 알려질까 그는 부락민을 모조리 죽여 버렸고 약탈한 물건 일부를 유다 지파의 장로들에게 선물로 보내 그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훗날 고국으로 돌아갔을 때를 위한 ‘투자’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요나단을 비롯한 아들들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이제 자기를 죽이려 했던 사울 왕이 죽 었으니 다윗이 이스라엘로 돌아갈 발판이 마련된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사무엘 상권에 나오는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의 성격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개천에서 났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출세를 사람을 가리켜 ‘개천에서 났다’고 말합니다. 개천에서 나는 일이 자주 있으면 이런 말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용이 되기는커녕 평생을 개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다 죽는 사람도 허다합니다. 용이 했다가 되지 못하고 ‘이무기’가 되고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태어나기를 더러운 개천이 아니라 ‘온천’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습니다. 온천에서 태어나 온천에서 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고 온천에서 태어났지만 개천으로 떨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다양한 환경에서 태어나 자랍니다.

평생 개천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은 못나고 무가치한 사람일까요? 온천에서 태어났지만 개천으로 떨어진 사람은 지지리도 못난 사람입니까? 개천에서 태어나 용이 사람 은 모든 면에서 본받을만한 사람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습니다. 개천에서 태어나 용이 사람에게 장점과 단점이 있듯이 용이 되지 못하고 이무기가 되어버린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평생을 개천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개천에서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받을 점이 많은 인물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단점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국교회에서는 다윗을 결점 없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다윗을 비판하면 무슨 큰일이나 것처럼 야단입니다. 다윗이 하느님도 아닌데 도대체 다윗을 그렇게 높이는지 수가 없습니다.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에게도 예외 없이 단점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이삭, 야곱, 요셉도 그랬습니다. 장점 아니라 단점에서도 배울 것이 있는 법이므로 그것을 배우면 됩니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인들은 유독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인물의 단점을 지적하고 배우기를 마다하는지 수가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다윗은 너무 마음이 강퍅했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점은 다윗 아니라 개천에서 다른 용들에게도 자주 발 견되는 결점입니다. 나발에게 보여준 그의 태도에는 그의 강퍅한 성격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선택됐고 하느님의 지원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을 자신도 알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하느님의 명을 받아 그를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웠으니 자신도 자기가 왕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생존을 위협 받는 처지에 있었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되는 측면도 있지만 그래도 굳이 저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적지 않습니다.

이렇듯 다윗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는 하느님의 백성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생애의 모든 점을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객관적으로 보아서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 마땅한 모습을 자주 보 여줬습니다.


아히멜렉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그러나 다윗은 우리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일화를 여럿 남겼습니다. 그가 연루된 사건 중에는 훗날 신앙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행동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사무엘상 21장에 나오는 이야기도 하나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가다가 놉에 사는 아히멜렉에게 갔습니다. 굶주린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자 아히멜렉은 야훼 하느님께 바쳐졌던 떡을 그 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물론 떡을 먹을 자격이 있는가를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떡을 먹을 사람들이 근래에 여자를 가까이 했던 적이 있느냐고 제사장은 물었습니다. 다윗이 그런 적이 없다고 하자 제사장은 그에게 떡을 주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앞에서도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제단에 바쳐졌던 떡에 대해서 어떻게 규정하고 있습니까? 드려졌던 제사가 어떤 제사인지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에서 하느님께 드려졌던 제단의 떡은 오로지 제사장만 먹을 있었습니다. 말은, 다윗 일행이 근래에 여자를 가까이 했든 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그들은 먹을 자격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아히멜렉은 엉뚱한 질문을 다윗에 했던 것입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떡을 먹으라고 줘서는 됐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다윗에게 떡을 줬을까요? 그가 무식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하느님께 바쳐진 떡에 대한 율법 규정을 잠시 헷갈려서 그랬을까요? 율법을 무시해서 그랬을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 침 묵하고 있지만 저는 아히멜렉이 착각했거나 실수했다고는 생각 하지 않습니다. 아히멜렉은 제물에 관한 율법 규정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그런 중요한 규정을 모르고 어떻게 제사장 노릇을 했겠습니까! 그러면 그랬을까요? 그는 어렴풋이나마 다윗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루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는 다윗이 왕이 되면 자리 차지하겠다는 계산에서 나온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사울의 기세가 등등할 때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다윗을 차기 왕으로 낙점하셨다는사실을 아히멜렉은 전혀 눈치채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가던 도망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히멜렉이 율법 규정을 어겨가면서까지 제단에 바쳐졌던 떡을 다윗에게 주어 그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은 그가 어렴풋이나마 하느님의 계획을 인지하고 뜻을 실현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했다고 밖에는 없습니다.

그로부터 1 년쯤 지난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분이 바로 사건에 대해 얘기하셨습니다. 마가복음 2장을 보면 하루는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하도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안식일에 금지되어 있는 일을 당신 제자들이 하고 있다. 라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바로 일을 예로 드셨습니다. 다윗도 배가 고팠을 제사 장 외에는 먹을 없었던 떡을 먹 었다고 말입니다.

이야기는 하느님의 율법의 기본성격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율법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입니다. 율법은 도구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수단도 중요하지만 목적에 앞설 수는 없습니다. 수단은 활용 될 때만 가치 있는 것이 됩니다. 그것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태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기에 때로는 그것을 깨뜨리고 넘어서야 때도 있습니다. 거기에 너무 집착해서는 된다는 얘기입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것을 깨야 필요가 있을 때는 과감하게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럴 절대로 잊어서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율법 규정을 깨뜨리거나 넘어설 때는 행동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히멜렉은 제사장만 먹을 있는 떡을 다윗에게 행동 때문에 사울 왕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대가치고는 얼마나 대가입니까! 예수님은 어땠습니까? 예수님도 안식일 법을 넘어서는 행동 때문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 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 ”는 진리를 몸으로 실천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야 했습니다. 물론 다른 여러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예수님 사역의 근본정신은 마디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아히멜렉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그리고 예수님 같은 분이 있었기에 우리는 안식일 법의 참뜻을 알게 되고 정신을 존중하고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율법 규정들을 넘어선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무작정 틀을 깨려 하고 규정들을 무시하려는 태도는 크게 잘 못된 태도입니다. 그러나 목적과 근본 의미는 생각하지도 않고 무조건 전통과 규정을 따르겠다는 태도도 잘못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내가 전통과 규정을 따라야 하는가, 내가 그것들을 깨뜨리고 넘어서야 하는가, 무엇을 실현하려고 그래야 하는가에 대한 확신을 갖는 일입니다. 그리고 확신을 따라 살아갈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됩니다. 그러나 정작 절대 잊지 말아야 진실은, 대가가 결코 값 없는 대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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