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의 구약 산책 http://blog.kcmusa.org/kwakgunyong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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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목사는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신일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한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해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에서 마쳐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1985년에서 1993년까지 서울향린교회에서 전도사, 부목사로 일하며 소중한 두 분의 스승인 고 안병무 선생님과 홍근수 목사님을 만나 신학과 목회의 방향을 정했습니다. 1993년 미국으로 건너와 줄곧 나성향린교회(전 선한사마리아인교회)를 목회하면서 클레몬트대학원에서 구약학 박사과정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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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3:1-12 마태복음 5:21-24

곽건용 목사

왜 하필 이 본문일까?

오늘 설교의 3분의 1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준비한 공동설교문에서 가져왔고 나머지 3분의 2는 제가 준비했습니다. 교회협의회에서 같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준비한 설교문이므로 가져오긴 했는데 우선 선택한 성서본문에 대해 잠깐 얘기하겠습니다.

오늘의 구약본문은 창세기 33장에서 왔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재회하는 장면이지요. 알다시피 야곱은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여서 장자의 권리랄 빼앗은 후 외삼촌 라반에게 도망쳤습니다. 거기서 20여 년 살다가 드디어 귀향하는 길이었지요. 하지만 귀향길이 그리 기쁘지만은 않았던 것은 형을 만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에서는 장정 사백 명을 거느리고 야곱에게 오고 있었습니다. 환영객이 아니었음을 누구나 알 수 있었지요. 그는 야곱을 죽이려 했던 겁니다. 드디어 둘이 만났습니다. 야곱은 에서를 만나자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을 했다고 합니다. 아내들과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자 에서는 야곱을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고 울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에서와 야곱이 화해하는 장면임에는 분명합니다. 둘이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은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에서에게 엎드려 절하는 데 있습니다. 저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주일예배에서 읽으면 좋을 성서구절이 많을 텐데 왜 하필 이 본문을 택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둘이 화해하는 것은 좋지만 한쪽이 다른 쪽에게 엎드려 절을 하면서 화해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남과 북이 서로 자기가 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겠습니까. 서로 자기가 에서라고 우기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왜 하필 이 본문을 택했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17세기 이후로 발달한 인문주의와 계몽주의는 사람에 대한 지나친 낙관과 기대, 그리고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1,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그와 같은 사람에 대한 낙관과 기대는 철저히 무너졌습니다. 유럽을 비롯해서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대륙에서 벌어진 엄청난 희생과 파괴를 목격하고서 사람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산산이 부서져버린 겁니다. 인류는 그걸 통해서 사람이 얼마나 악한지 경험했습니다. 사악함의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교회는 세계대전 이전에는 별 생각 없이 각 교단별로 경쟁적으로 전도하고 선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가 세계대전을 겪은 겁니다. 교회는 그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교회는 화해와 일치운동을 벌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가 2차 대전이 끝난 후 194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창립됐습니다. 교회가 일치와 갱신, 대화와 상호이해를 증진하고 협력하는 교회연합운동(에큐메니칼운동)을 시작한 것은 이와 같이 절망적인 세계상황에 응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세계는 좌우 이데올로기로 양분됐습니다. 1945년에 우리 겨레는 일제강점에서 해방됐지만 승전국들의 패권다툼으로 인해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 아픔을 겪습니다. 냉전시기에 한반도는 한국전쟁의 아픔을 겪었고 둘로 나뉘어져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됐습니다. 전쟁은 1953년 휴전 이래 아직까지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분단은 우리 겨레의 선택이 아니라 국제적인 패권질서의 산물이었던 겁니다.

하나님께 바치려던 제물을 그 자리에 두고 형제와 화해하라!

올해로 우리 겨레는 해방 70년, 분단 70년을 맞았습니다. 성서에서 70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성서에서 70은 7이라는 완전수와 충만함을 상징하는 10이 결합된 숫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것이 70년 후였습니다. 해방 70년이 되는 올해,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셔서 한반도에 평화와 화해,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다시 말씀하지만 1945년에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한국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겨레는 전쟁이 끝난 ‘종전’이 아니라 전쟁을 잠시 쉬는 ‘휴전’ 상태에 있습니다. 언제라도 전쟁을 재개할 수 있는 상황인 겁니다. 한국전쟁 이후 65년 동안 남북 사이에 수많은 충돌이 있었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동안 슬퍼할 만큼 슬퍼했고 아파할 만큼 아팠습니다. 모진 경험도 많이 했습니다. 이제는 총을 버리고 손을 맞잡아야 할 텐데 아직 손에서 무기를 놓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65년 동안 남북관계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부침(浮沈)이 심했습니다. 1972년에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돼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통일의 날이 가까워진 줄 알았는데 곧바로 10월 유신이 선포됐고 남한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할 때까지 헌법의 권한을 초월하는 긴급조치시대를 살았습니다. 그 후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 이후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10년 동안 남북관계는 상당한 진척을 이뤘습니다.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을 비롯해서 화해분위기가 무르익었는데 지난 8년 동안 남북관계는 급격히 후퇴했고 모든 교류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한국교회는 재작년 부산에서 열린 WCC 10차 총회 이후 세계교회와 더불어 분단 70년이 되는 2015년에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임하기를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율법규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사랑가 이웃 사랑이 별개의 사랑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 같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이 다른 게 아니란 뜻입니다.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은 보이는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것과 뗄 수 없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마태복음 말씀도 형제에게 원망 들을 일이 생각나거든 하나님께 바치려던 제물을 제단에 두고(누가 훔쳐갈까 걱정하지 말고!)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다시 와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라 하셨습니다. 이 말을 지당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실제론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를 거꾸로 생각합니다. 곧 하나님께 은혜 받으면 모든 게 다 해결된다고, 은혜만 받으면 관계가 좋지 않던 형제자매와도 절로 화목해진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기 전에 먼저 형제자매와 화해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러 가다가도 형제와 화해하지 않은 게 생각나거든 하나님께 바치려던 제물을 그 자리에 놔두고 형제에게 가서 화해한 다음 돌아와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형제자매와 화해하지 않고 드리는 예배는, 곧 우리 겨레가 분단체제에서 드리는 예배는 반쪽짜리 예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원한을 없애지 않고, 화해하지 않고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남은 북의 교회에 대해서 가짜요 선전용이라고 비난하고 북은 남의 교회에 대해서 자본주의 정신에 찌든 물질주의, 성공 지향적 사이비 교회라고 비난합니다. 하루 빨리 남북 겨레가 서로 비방하지 않고 화해하고 온전한 예배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크리스천교회(제자회) 총회 결의문

여기서 지난달 오하이오 컬럼버스에서 열린 제자회 총회에서 채택한 결의문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결의문에 대해서는 몇 번 여러분에게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총회 여러 달 전에 여러 단계를 거쳐서 준비한 결의문이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을 때 저는 두 가지 상반되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하나는 결의문을 통과시켜준 회원들에게 고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자기들 일도 아닌데, 자기들과 거의 무관한 일에 대한 결의문이지만 정성껏 읽고 통과해준 데 대한 고마움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는 부끄러운 마음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오죽 못났으면 우리 겨레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제자회 총회의 힘을 빌려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좌우간 결의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2장 14절에서 우리에게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라고 선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나누는 적대감의 벽을 허물어 버리셨기에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우리의 지향할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로 여기는 제자회로서 우리는 북미에서뿐 아니라 한반도에서의 화해와 평화를 추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결의문은 2차 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4백만 희생자와 1천만 이산가족이 생겼다고 말하고 현재가 ‘정전’이 아닌 ‘휴전’ 상태임을 분명히 합니다. 특히 이산가족들이 서로 만나기는커녕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임을 서술한 다음 현재의 상태를 이렇게 선언합니다.

2015년은 일제(1910-1945년)로부터 해방된 지 70주년이지만 한반도 인들은 아직도 광범위한 군사화와 국제적인 냉전의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이런 적대적인 관점은 최근 북한의 핵무기 실험을 통해, 그리고 남한이 미국의 태평양에서의 군사재배치의 중심축의 초점이 되면서 더 강화되었다.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미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계속해서 이끌어 왔으며 남한 군대의 전시작전권을 가지고 있고 북한과 중국, 러시아로 부터의 미사일 요격을 위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를 한국에 설치하려 함으로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더 위협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네 가지 사항을 결의하는데 오늘 그걸 전부 소개할 시간은 없고 가장 중요한 것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제자회 총회는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한국 해방 70주년인 2015년에 아직까지도 한반도가 군사주의와 핵무기의 볼모로 잡혀있는 것을 인식하며, 제자회 총회와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교단장을 포함한 제자회의 지도자들이 미국과 캐나다 정부 그리고 국제사회에 (1) 모든 관련국들이 1953년에 조인된 휴전협정을 항구적인 평화협정으로 바꾸어 전쟁을 종식시키는 일에 헌신하는 것을 포함한 한반도의 평화 만들기를 위한 과정을 새롭게 시작할 것을 요구하고 (2) 한반도에서의 호전적인 군사훈련의 종식과 군사비 지출의 삭감 그리고 한반도에서의 핵무기를 없애고 동북아의 평화와 비군사화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밝혀 줄 것을 요구하도록 결의한다.

한 사람이 어른이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자기 운명을 자기가 결정하는 걸 가리킵니다.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남의 손에 끌려 다니거나 남에게 의존한다면 그는 아직 어른이 못 됐거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큰 문제를 갖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 겨레는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결권이 없는 정부라는 말씀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당 대표가 미국에 와서 큰절을 하고 다니면서 그걸 ‘외교’라고 부르는 형편이니 말 다했지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어른이 돼야

그러면 우리는 왜 광복 7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겨레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걸까요? 저는 마태복음 12장 22절 이하의 말씀에 근거해서 두 가지를 말씀하겠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마귀가 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사람을 예수께 데려왔습니다. 예수께서 마귀를 쫓아내고 그 사람을 고쳐주셨지요. 바리새파사람들은 예수께서 마귀 두목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면서 예수님을 헐뜯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고 어느 동네나 집안도 서로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지탱하지 못한다.”

저는 우리 겨레가 지난 70년 동안 마귀에 들려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저는 나쁜 일이 일어나면 무조건 그걸 마귀 소행으로 여기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누군가를 보면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악의 존재를 믿게 됐습니다. 우리 겨레가 그 악의 희생자요 귀신 들렸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많은 우리 겨레가, 많이 배우고 학식도 높은 사람들이 많은 겨레가 어떻게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삶을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 겨레는 마귀에 들려 귀머거리요 소경으로 살아온 게 아니냐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왜 내가 소경이요 벙어리냐, 볼 것 다 보고 할 말 하며 살아왔는데!’라고 저항할 사람이 많을 겁니다. 물론 우리는 보고 말하면서 살아왔지요. 하지만 우린 보기는 보되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봐왔고 말하기는 하되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면서 말도 안 되는 말을 말이라고 늘어놓으면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절이 아닙니다. 민주정부시절 10년을 거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강제로 억압하는 사람도 없는데 스스로 눈을 감고 입도 봉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 나오는 오스카처럼 어른이 되길 거부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유는 다르지만 말입니다. 눈을 뜨고 있다고 다 제대로 보는 것도 아니고 말한다고 다 이치에 맞는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제대로 보고 이치에 맞는 사고를 하며 타당한 말을 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올바른 관점을 갖는 일입니다. 올바른 관점을 갖는다 함은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 전체를 보는 관점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꼭대기에 올라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해야겠지만 반대로 밑바닥에서 위를 올려보기도 해야 합니다. 곧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하고 소외된 사람의 자리에서 사회를 바라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겨레의 분단과 관련해서 가장 약하고 소외돈 사람은 이산가족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젠 사물을 제대로 보고 이치에 닿는 말을 하는 진정한 평화의 일꾼이 필요합니다.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자기만의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평화의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70년 묵은 적대관계를 깨고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려면 자기 이해관계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은 자기 이해관계를 넘어설 수 있는 사람에 의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게 기독교인이어여 한다고 믿습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자기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반 발자국만 앞으로 나가면 됩니다. 자기 이해를 조금만 양보하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평생 동안 해야 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남북 간에 신뢰가 쌓이고 군비축소와 평화체제가 이루어지면 그 후로는 양보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면에서 득이 되는 삶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일에 앞장설 사람이 누굴까요? 저는 기독교인이라고 믿습니다.

곽건용 목사(향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