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의 구약 산책 http://blog.kcmusa.org/kwakgunyong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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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목사는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신일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한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해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에서 마쳐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1985년에서 1993년까지 서울향린교회에서 전도사, 부목사로 일하며 소중한 두 분의 스승인 고 안병무 선생님과 홍근수 목사님을 만나 신학과 목회의 방향을 정했습니다. 1993년 미국으로 건너와 줄곧 나성향린교회(전 선한사마리아인교회)를 목회하면서 클레몬트대학원에서 구약학 박사과정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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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기독교인의 성서 읽기 1

 

기독교는 성서의 하나님을 믿는 종교

 

기독교를 ‘책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책의 종교’란 말은 종교에서 경전이 차지하는 위치가 거의 절대적인 종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본래 ‘책의 종교’는 유대교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기독교도 그에 못지않게 경전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책의 종교’라고 불러도 하등의 손색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성서의 종교’인 셈입니다.

 

오늘 설교는 “왜 진보적인 교회가 필요한가?”라는 주제로 하는 두 번째로서 진보적인 기독교인은 성서를 어떻게 읽는지에 대해서 얘기하려 합니다. 본래 성서에 대한 얘기는 오늘 한 번만 하려 했는데 이 문제가 워낙 중요하다 보니까 좀 더 자세히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다음 주일까지 두 주간 성서에 대해 얘기하는 걸로 계획을 바꿨습니다. 그래서 “왜 진보적인 교회가 필요한가?”라는 주제의 설교를 이달 마지막 주일까지 모두 다섯 주일 동안 계속됩니다.

 

저는 교회가 그동안 성서를 어떻게 해석해왔는지에 대해 얘기하려 하는데 어떻게 얘기할까를 두고 고민을 좀 했습니다. 그 얘기만 하면 너무 지루할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성서 해석의 역사와 저 개인이 성서를 읽고 연구해온 이야기를 섞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제 얘기는 저만의 얘기가 아니라 진지한 관심을 갖고 성서를 읽으려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겪는 경험과 대동소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밑도 끝도 없이 그냥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성서의 하나님’ 곧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고 어떤 일을 하셨다고 성서가 말하는 대로 믿는 종교입니다. 기독교에서 성서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기록이라고 믿어집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보여주는 책이 성서라는 겁니다. 기독교에서는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됐다고 믿습니다. 성서의 글자 하나하나에 하나님이 영감을 불어넣으셨다는 겁니다.

 

교회는 1,500년 동안 성서를 그렇게 읽고 해석했습니다. 성서의 글자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됐으므로 틀림이 없다고 말입니다. 신앙의 관점에서뿐 아니라 역사적인 관점에서도 오류가 없다고 믿어왔습니다. 성서가 전하는 모든 얘기들은 거기 적혀 있는 그대로 일어났다는 겁니다. 딱히 말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대개는 성서가 하나님이 하늘에서 불러주는 대로 사람이 땅에서 받아 적는 방식으로 기록됐다고 믿어왔습니다. 개중에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 숫자가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아무런 힘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교회의 권력이 막강해서 성서에 대해서 아주 작은 의문조차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랬다가는 이단으로 몰리거나 죽임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성서가 여러 언어로 번역되다

 

이런 상황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계기는 루터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라틴어로만 읽히던 성서를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일이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성서는 오로지 라틴어로 쓰인 것만 읽혔습니다. 라틴어를 모르는 사람은 성서를 읽을 수 없었던 겁니다. 16세기 유럽 사람들 중에서 자기나라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하물며 라틴어는 말해 뭐 하겠습니까. 유럽 사람들 중에서 라틴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였습니다.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들이나 읽을 줄 알았겠지요.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서를 읽지 못했습니다. 신부가 말해주는 대로 믿었던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가 라틴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일은 일대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해 성서가 일반인들 손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그조차 독일어를 읽을 줄 아는 소수였지만 말입니다. 좌우간 이 후론 성서가 대중들에게 읽히기 시작했고 읽히니까 연구되기 시작했으며 연구되니까 대중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겁니다.

 

이 과정은 저 개인이 성서와 관계 맺는 과정과 닮았습니다. 제가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교회에 가면 여기저기에 성서가 널려 있었습니다. 겉장이 비닐로 된 성서 말입니다. 그때는 무슨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학생들에게 성서를 나눠주려고 했습니다. 예배에 개근했다고 주고 정근했다고 주고 전도했다고 주고 성경퀴즈대회에 입상했다고 주는 등 뭐든 핑계를 만들어서 성서를 뿌리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공짜로 두는 성경이 아니라 제 돈을 주고 성경을 샀습니다. 겉장이 가죽으로 만들어진 비싼 성경, 한자가 들어있고 관주가 달려있으며 상하 이단으로 인쇄된  성경이었습니다. 저는 이 성경을 정말 열심히 읽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열심히 읽었는가 하면, 성경구절 중에서 제법 널리 알려져 있는 구절들은 장절은 기억하기 못해도 그게 어느 쪽 어느 단에 있는지 정도는 알았습니다. 왼쪽 페이지 상단인지 오른쪽 페이지 하단인지 정도는 알았다는 얘기입니다. 이만하면 제가 얼마나 열심히 성서를 읽었는지 짐작하시겠지요?

 

하지만 성서 말씀이 무슨 뜻인지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물론 학생회에는 성경공부 시간이 있었지만 그것은 성경공부라기보다는 교리공부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까지는 성경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전혀 몰랐고 그걸 발견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냥 읽기만 했습니다. 뭔가 깨닫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계시’가 성서 안에 주어져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나는 성서를 읽으면서 그걸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성서에서 그걸 찾아내려고 기도하면서 열심히 읽었습니다. 성서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찾아내면 믿음이 더욱 굳건해지리라고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계시를 찾아내서 믿음이 굳건해지는 것 같은 경험도 했습니다. 그때는 한 마디로 성경이 제 신앙과 삶의 지침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루터가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이후 성서는 많은 언어로 번역됐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영어입니다. 제임스 왕의 명령으로 1604년에 번역에 착수한 킹 제임스 성경이 출판된 것이 1611년입니다. 아직도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이 성서를 봅니다. 좋은 영어 성서임에 분명하지만 문제도 많은데 그 얘기는 지금 할 수 없습니다. 성서는 그밖에도 많은 언어로 번역됐고 많은 사람들이 읽게 됐습니다. 좋은 일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랫동안 지켜져 온 성경의 권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겁니다. 사람들이 성서를 읽게 되면서 성서에 대해서 질문을 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런 일이 정말 일어났을까, 여호수아서를 보면 태양이 멈췄다고 되어 있는데 정말 그랬을까 등등의 질문 말입니다. 마침 그 시대가 과학적으로 엄청난 진보를 이룬 시기였습니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믿었던 믿음이 지동설에 의해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성경에는 과학에 모순되는 점이 많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한 겁니다. 이래저래 성경의 권위는 점점 더 추락했습니다. 성경이 추호의 오류도 없는 하나님의 말씀인가가 의심받게 됐습니다. 

 

신화(神話)를 제거하면 된다!

 

대학생 시절엔 성서에 대해서 이런저런 의문이 들었지만 교회학교 학생들 가르치는 재미가 워낙 커서 그런대로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4학년 때 신학교를 가서 목사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한참 고민하던 때 우연히 책을 한 권 만났는데 그게 루돌프 불트만이란 유명한 신약학자가 쓴 『신약성서 신학』이란 책입니다. 제 수준으로는 읽기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내용이 익숙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중간에 그리스어가 마구 튀어나와서 읽기 어려웠지만 끈기로 읽었습니다. 그 내용이 그때 제게는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사실 어려운 것은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거기서 저를 가장 큰 충격으로 몰아넣은 얘기는 신약성서가 ‘신화’적인 책이란 주장이었습니다. 저는 ‘신화’라는 말에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아서 책을 내던질 뻔했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계속 읽었습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처음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두 번 읽고 세 번 읽고 계속 읽어가면서 푹 빠져버렸습니다.

 

그의 주장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성서는 그것을 기록한 사람들의 시대적 상황 안에서 쓰였다, 그들이 갖고 있던 세계관의 틀 안에서 쓰였고 따라서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신약성서 시대 사람들이 갖고 있던 세계관은 신화적 세계관이다, 곧 자기들이 갖고 있던 실존적인 문제들을 신화라는 그릇에 담았다, 따라서 우리가 신약성서를 읽을 때는 신화라는 껍데기를 다 벗겨내고 읽어야 한다, 그러면 남는 핵심적인 내용은 ‘신앙의 결단’이란 실존적인 메시지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자기 시대 세계관이라는 틀 안에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서의 메시지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서 메시지도 그 시대에 널리 사용된 문학형식에 담겨 있는데 구약이나 신약이나 할 것 없이 그 당시에 가장 지배적인 문학양식은 이야기(story)나 설화(narrative), 또는 신화(myth)였기 때문에 그것도 그런 그릇에 담겨 있는 게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불트만은 메시지가 담겨 있는 ‘그릇’(이야기, 설화, 신화 등)에 크게 신경 쓰지 말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메시지가 뭔지를 이해하려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지금 나에게 믿으라고 결단을 요구하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저는 그때 그의 책을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신앙에 대한 새로운 눈이 열렸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성서는 어떻게 이해되고 있습니까?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성서는 사람이 쓴 사람의 책이기도 합니다. 성서는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쓰인 책이 아닙니다.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하나님이 사람의 손가락을 움직여서 쓴 책도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람은 그저 필기도구로만 사용됐을 뿐이겠지요. 성서는 그렇게 쓰인 책이 아닙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것을 쓴 사람의 삶의 경험과 신앙과 가치관, 세계관이 거기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에 의해 쓰인 책이지만 하나님의 영감이 작용하는 방식은 성서를 쓰는 사람의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활용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성서의 각 책이 문체와 내용에 있어서 다 다른 겁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반드시 유념해야 할 점은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이 갖고 있던 세계관이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알았던 하늘과 오늘 우리가 아는 하늘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주가 한없이 넓다는 것을 압니다. 천체과학을 전공하지 않았고 우주팽창설의 구체적인 내용은 모른다 할지라도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 ‘하늘’이라고 말했을 때 그게 얼마나 높은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하늘이 그렇게 높은지 몰랐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사는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보다 조금 더 높다고 상상했을 따름입니다.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적어도 오늘 우리가 아는 것처럼 높고 넓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그 정도 높은 곳에 살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종족신을 믿는가, 보편신을 믿는가?

 

이 얘기는 고대인들과 현대인들의 세계관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작은 예에 불과합니다. 고대인과 현대인은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다릅니다. 고대인들에게 하느님은 ‘종족신’(tribal god)이었습니다. 곧 자기 종족을 위해주고 보호해주고 승리하게 해주는 신이었던 겁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종족과 싸워서 지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승리한 종족의 신을 믿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의리’ 같은 것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들에게는 모든 족속을 위한 신, 곧 보편적인 신(universal God)에 대한 생각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나와 우리 종족의 수호신이 있었을 따름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보편적인 신’이란 생각이 싹튼 것은 구약성서시대 말기 또는 그 이후의 일로서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닙니다.

 

구약성서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구약성서에 현대인이 건전한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가 많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현대인의 건전한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들 말입니다. 과학적, 이성적으로도 그렇지만 윤리나 도덕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일을 사람이 했다면 비난받아 마땅한데 하나님이 했다는 이유로 비난은커녕 찬양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일들이 구약성서에 얼마나 많습니까. 대표적인 것이 대량살육(genocide)입니다. 구약성서에는 대량살육 얘기가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이집트의 장자들이 모두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거기 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을 여자와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죽이라고 하나님이 명령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일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까 무조건 옳다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요즘 대량살육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범죄행위입니다. 그걸 나치가 유대인에 대해서 저질렀든 터키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했든 일본이 우리 겨레에게 했든 미국과 한국이 베트남에게 했든 상관없이 범죄행위입니다.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지요. 대량살육이란 말 안에 이미 ‘분별없이’란 뜻이 들어 있습니다. 가나안에 살던 사람들이 단지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 살아야 할 땅에 살고 있었다는 이유로 죽었어야 한다면 단지 유대인이기 때문에 나치에게 죽었던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물론 성서는 그들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말하지만 그 주장이 충분히 강하고 설득력이 있지는 않습니다.

 

이밖에도 성서에서 건전한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얘기들이 많습니다. 여성을 차별하는 얘기나 노예를 사람 이하로 보는 것은 시대적 한계 때문이라고 합시다. 과학적으로 맞지 않는 얘기들도 시대적 한계로 보고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성서에는 건전한 상식과 윤리도덕으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살인하지 말라고 해놓고 하나님은 맘대로 사람을 죽인다거나, 도적질하지 말라고 해놓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한껏 약탈한 것은 눈감아주는 게 말이 됩니까? 이게 이중 잣대가 아니면 뭡니까? 구약성서만 그런 게 아닙니다. 예수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복을 빌어주라고 말해놓고는 바리새인들에게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욕했고 이방인은 ‘개’라고 불렀습니다. 아무리 잘못한 짓이 있어도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해라!”라고 말하는 건 지나치니 않습니까? 바울에 이르면 납득할 수 없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이런 예들을 일일이 거론한다면 아무리 긴 시간이라도 모자랄 터이니 그만하겠습니다.

 

성서를 조금이라도 열심히 읽으면 누구나 이런 문제가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그럴진대 전문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이 점을 발견했지만 교회의 권력에 눌려서 드러내고 말하지 못하다가 이성이 강조되는 계몽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달라진 겁니다. 그 이후로 성서에 대한 태도는 둘로 갈라졌다고 하겠습니다.

 

첫째로, 성경의 글자 하나하나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됐으므로 오류가 없다는, 오랫동안 지켜온 믿음을 옹호하고 방어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학문의 세계에서는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은 소수이지만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다수입니다. 특히 한국교회에서는 대다수가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둘째로, 소수지만 믿음 뿐 아니라 건전한 상식과 이성으로 성서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어떤 배경에서 그렇게 말했을까? 그렇게 말하는 이유와 목적이 뭘까?’를 묻는 태도 말입니다. 그 중에는 비교적 온건한 사람들이 있지만 매우 과격하고 파격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서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우리는 누가 성서를 썼는지 모릅니다. 오경은 모세가 썼고 마태복음은 마태가 쓴 걸로 알고 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는 개인저작이 아니라 집단저작입니다.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 단번에 쓰인 책이 아니라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쓰였고 각 시대에 맞게 수정되고 보충된 책입니다. 구약은 그 기간이 길고 신약을 짧다는 차이는 있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성서가 쓰이고 전해진 각각의 단계에 모두 영감을 불어넣어주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얘기는 다음 주일에 계속할 텐데 한 가지만 더 얘기하고 오늘은 마치겠습니다. 오늘날 진보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의 문제는 성서를 읽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보수주의자들을 성서를 많이 읽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서를 잘못 읽고 있습니다. 그게 그들의 문제입니다. 진보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성서를 읽지 않습니다. 마치 성서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성서에서 더 얻을 게 없다는 듯이 말입니다. 저는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이 태도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서는 여전히 우리 신앙과 삶의 지침입니다. 우리 신앙이 거기 근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를 읽어야 합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읽은 것 이상으로 성서를 읽어야 합니다. 물론 성서를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읽지 않으면 ‘어떻게’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성서를 읽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이 얘기는 다음 주일에 계속하겠습니다.

 

곽건용 목사(향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