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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구약 산책 http://blog.kcmusa.org/kwakgunyong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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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목사는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신일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한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교단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해서 가장 진보적인 교단에서 마쳐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1985년에서 1993년까지 서울향린교회에서 전도사, 부목사로 일하며 소중한 두 분의 스승인 고 안병무 선생님과 홍근수 목사님을 만나 신학과 목회의 방향을 정했습니다. 1993년 미국으로 건너와 줄곧 나성향린교회(전 선한사마리아인교회)를 목회하면서 클레몬트대학원에서 구약학 박사과정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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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3일 / 성령강림절 둘째 주일

첫사랑

요한계시록 2:1-7

곽건용 목사

청춘이 아니니까 청춘을 예찬한다?

“청춘(靑春)!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鼓動)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汽罐)과 같이 힘 있다.” 이 글은 제가 중학생 때 국어교과서에서 배운 민태원의 수필 <청춘예찬>의 첫 구절입니다. 그때는 크게 감동해서 거의 외우다시피 했는데 어제 다시 읽어보고 씁쓸하게 웃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글을 읽었는데 심장이 뛰지도 않고 별 감동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다시 읽고 그때와는 다른 뜻으로 감탄했습니다. 저자가 이 글을 썼을 때는 청춘이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청춘에 대해 생동감 넘치는 글을 썼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니 그가 청춘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청춘이 아니라 청춘에 대한 추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청춘의 나이를 살면서 ‘아, 내 청춘은 정말 아름답구나! 미치도록 아름답구나!’하며 감탄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청춘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게 아니라 청춘에 대한 추억이 아름답고 첫사랑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추억으로 남아 있기에 애절하며 맺어지지 않고 스쳐간 인연도 그 자체가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 인연에 애태웠던 자신이 그리운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설교제목이 ‘첫사랑’입니다. 제 첫사랑 얘기하려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 첫사랑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라는 뜻도 아닙니다. 저는 신앙의 첫사랑에 대해 얘기하려 합니다. 신앙에도 ‘첫사랑’이란 것이 있나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신앙에도 그런 게 있습니다. 처음 믿었을 때 느끼고 경험했던 뜨거운 감격과 감사, 기쁨 같은 것 말입니다. 엊그제 성서학당 시간에도 참석자 한 분이 처음 믿었을 때의 감격과 은혜 받은 얘기를 잠시 했는데 오늘 제가 얘기하려는 내용과 비슷해서 놀랐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계시록 2장은 신앙의 첫사랑에 대해 얘기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데 그 중 첫 번째가 에베소교회에 주는 말씀입니다. 이 교회는 대체로 칭찬을 받았지만 한 가지 책망을 받았는데 그것은 ‘첫사랑’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너는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어내고 낙심한 적이 없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당사자인 에베소교인들은 ‘처음 사랑’이 뭘 가리키는지 알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해서 짐작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이란 영혼의 밑바닥까지 뒤집어 놓는 일

신앙은 어떤 신학적, 신앙적 진술에 대해 옳다고 머리로 동의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른바 영적인 체험이라고 부르는 강렬한 감정적 체험이 사로잡히는데 그치지도 않습니다. 신앙은 지성과 감성과 영성 등 사람의 모든 정신적 능력이, 한 마디로 전인격이 관여하는 정신적, 영적 활동입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던 진실을 확인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의 경험을 반복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더 강렬하게 체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란 전에는 전혀 몰랐고 알고자 하지도 않았고 알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진실을 느닷없이 깨닫게 되는 것이고,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고 경험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겠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간절히 바란다고 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시작은 한 순간 느닷없이 다가와서 사람을 뿌리에서부터 확 뒤집어엎어 버리는 경험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이게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지 느낌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달리 풀어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무엇인가를 배웁니다. 이것을 흔히 ‘배움’이나 ‘교육’이란 말로 표현하지만 사회학에서는 ‘사회화’라고도 부르고 일차사회화와 이차사회화로 구별합니다. 일차사회화는 주로 부모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이가 스스로 판단할 능력을 갖지 못했을 때는 부모가 참이라고 믿고 그렇게 표현하는 것을 그대로 참으로 믿어버립니다. 이것을 일차사회화라고 부르지요. 반면 이차사회화는 학습을 통해서 배워나가는 과정으로서 주로 학교나 교회 같은 데서 이루어집니다. 일차사회화와 이차사회화를 통해 얻는 각각의 앎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차사회화를 통해 습득한 참은 의문을 제기하고 의심하고 새로운 학습을 통해 교정해나가지만 일차사회화를 통해 주어진 진리는 일평생 거의 변하지 않고 간직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이차사회화를 통해 학습된 진리를 교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경험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일차사회화를 통해 주어진 진리까지 뒤흔들어버립니다. 자기 삶이 근거하고 있는 근본적인 진리와 전제들까지 뒤흔들어버리는 사건이 바로 신앙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그 예를 바울에게서 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토라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보여주셨다고 믿었기 때문에 토라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이요 하나님 믿는 사람이 마땅히 걸어갈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이차사회화를 통해 습득한 진리일 뿐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진리, 곧 일차사회화를 통해서 주어진 진리이기도 했습니다. 일차사회화를 통해 주어진 진리가 이차사회화를 통해 더욱 확고하게 굳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런 확신은 다메섹으로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와 만나는 경험으로 송두리째 흔들렸습니다. 이 경험은 학습된 진리만 흔들어놓은 것이 아니라 일차사회화를 통해 주어져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들까지 뒤흔들어놓았습니다. 그는 머리를 망치로 크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는 ‘어, 이게 뭐지?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 엄청난 충격은 도대체 뭐지?’하며 한동안 정신 못 차리고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이 경험 후에 바울에게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그 후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돌아갔으며 3년 후에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그가 이 3년을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긴 하지만 저는 그 충격적인 경험을 곱씹어보고 의미를 명상함으로써 새로운 일차사회화가 일어난 시간이었다고 짐작합니다. 그동안 자신의 신앙과 삶을 지탱해온 진리를 버리고 새로운 진리 위에 신앙과 삶을 세운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는 복음 전파자로 나설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을 ‘재사회화’(re-socialization)라고 부릅니다.

첫사랑은 잊어버리자!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첫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에베소교인들을 꾸짖으시고 그것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이들이 잃어버렸다는 첫사랑은 무엇일까요? 이들은 무엇을 잃어버렸을까요? 이들은 고난을 견뎌냈고 낙심하지 않았다고 칭찬받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추측해봅니다. 처음 믿었을 때 에베소교인들도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넘쳤을 터이고 내 것 네 것 할 것 없이 서로 나누는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이 전하는 바로 그런 공동체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이들에게 고난과 박해의 시간이 왔습니다. 이들은 이를 악물고 고난을 견뎌야 했겠지요. 그러려니 이들의 마음은 강퍅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상황이 그랬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고는 하나 처음 믿었을 때 경험했던 기쁨과 감사, 감격을 이들은 더 이상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상황을 가리켜 첫사랑을 잃어버렸다고 표현하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만일 저의 추측이 옳다면 여기서 하나님은 첫사랑을 잃어버렸다고 꾸중하신 것이 아니라 그걸 안타까워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가 자식을 꾸중할 때처럼 말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꾸중할 때 한편으로는 꾸중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애처로워하고 안타까워하기 마련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첫사랑을 만나고 싶어 하지만 현명한 사람들은 만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첫사랑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이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정작 만나면 실망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럴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설령 첫사랑과 결혼해서 백년해로한다 해도 일평생을 첫사랑 하듯 사랑하며 살지는 않습니다. 설레던 첫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일상이 되고 맙니다. 가슴 설레던 사랑도 아침에 일어나면 양치하고 씻고 밥 먹고 자동차 타고 일 나가고 일과 관련된 사람들 만나 밀고 당기고, 가끔은 맘이 맞는 친구 만나서 흉금 털어놓고 웃고 울며 얘기 나누는 것 같은 ‘일상’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슬프고 안타깝기도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랑도 결국 일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오래 가지 않겠습니까? 사랑이 언제까지 ‘사건’일 수 있겠습니까? 사랑도 결국은 밥 먹고 차 마시고 화장실 가는 것처럼 일상이 되게 되어 있고 또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신앙의 첫사랑은 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사랑 할 때 가졌던 가슴 터지는 설렘은 얼른 잊어야 합니다. 처음 믿고 은혜 받았을 때의 기쁨과 감사, 감격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걸 바라고 다시 일어나길 기다리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신앙도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이른바 ‘생활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매일 밥 먹고 물마시고 싸고 씻고 닦고 사람 만나고 웃고 우는 것처럼 신앙도 일상이 되어서 가끔은 까먹을 때도 있어야 합니다. 저는 가끔 양치하는 걸 잊어버리고 집을 나설 때가 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그런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왕년’ 타령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내가 왕년에는......’ 하면서 옛날 자랑하는 사람 말입니다. 신앙도 ‘왕년타령’은 금물입니다. 내가 이래 뵈도 왕년에는 한 가닥 하던 사람이라느니, 왕년에는 은혜 받고 교회 일 다 하던 사람이라느니 하는 왕년타령은 잊어버려야 할 첫사랑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의 일입니다. 신앙은 어쩌다 한 번 일어날까말까 하는 ‘대박’이 아니라 매일 겪는 소소한 일상입니다. 과거의 경험이 아무리 중요해도 거기 매달려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일생일대의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건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꾸며낼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만나는 것이고 닥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올 때 오더라도 우리는 지금 여기서 매일의 일상을 살아야 합니다. 일상을 신앙으로 살지 않으면 신앙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강을 건넜으면 배는 버려야지, 등에 지고 갈 필요 없습니다. 과거에 받은 은혜는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현재가 있을 뿐이고 매일 살아갈 삶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과거에 겪은 놀라운 은총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 사는 일상에 달려 있고 거기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주어져 있는 재료들로 갖고 당장 무엇을 만들어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사건의 신앙’이 아니라 ‘생활신앙’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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