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대의 동양고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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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L.A 판) 1999년 1월 22일

 

불교를 구분하는 소승(hirayana)과 대승(mahayana)은 구원으로 이끄는 작은 수레, 큰 수레 라는 뜻이다. 개인문제에 매달렸던 원시불교가 소승적이었다면 해탈을 이웃과의 관계에서 크게 풀어가자는 운동이 대승이다. 하지만 동남아의 소승불교권에서는 자신들을 소승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소승이라는 명칭은 대승불교에 의해 편의적으로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소승의 교리는 결코 '작지'않기에 그들은 이 호칭을 외면한다. 소승의 가르침은 아직 나의 철학적 고민도 철저하게 해결 못한 상태에서 감히 사회와 구조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데서 출발 한다. 그런 점에서 소승불교에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동시에 바른 인간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다움이 담겨있다.

최근의 조계종사태를 보면 대승의 한계가 뚜렷이 나타난다. 개혁그룹으로 종단민주화에 기여했던 월주스님과 지선스님이 이렇게 싸울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지난날의 조계종 혈투가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였다면 오늘의 사태는 양쪽 모두 종교적 명분이 뚜렷하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종교에 매몰된 신앙인이 아니라 삶을 사는 인간을 보고 싶을 뿐 이다.

 

 한국교회의 부흥과정에서 파행도 많았지만 이제 많은 교회들이 구제와 선교 같은 대승적인 일에 나설 정도로 성숙해졌다. 특히 탄탄한 재정을 바탕으로 한 대형교회들의 기여도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물량주의와 미숙성이 곳곳에 배여 있다. 이러한 미숙성은 개신교의 인간화 운동이 부족한 데 연유한다. 인간화란 본회퍼의 신학에 기초를 둔 인간회복의 개념이다.

'나'의 문제는 모든 종교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에서 '나'는 항상 물질적 존재였으 며, 부의 축적을 비롯한 개인의 안일이 모든 신앙생활의 주제였다. 이제 먹고 살만해져서 선교와 구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까지는 좋은데 나의 문제가 아직 해결안되어 있기에 미숙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삶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엄격한 윤리성 위에서 구원을 관조해 보고 물질이 아닌 영혼을 통해 신과 만나고자 하는 소승적 입장이 우선되어야 교회의 사업에도 종교 적 무게가 실릴 것이다. 열광적 기도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실천하기 위해 내 자신이 어떤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진지한 기도가 필요한 때이다.

 

식당 옆 테이블에서 들리는 설교와 간증에는 하나도 틀린 내용이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상투성이 묻어있다. 그 절절한 사연을 하는 수 없이 엿들으면서 목사인 필자로서는 기독교의 부흥을 기뻐하기에 앞서 새로운 사명감에 빠져든다. 확신에 찬 신앙인도 좋지만 식당에서 조용할 줄 아는 '현대인'이 더욱 그립다.
인간화는 기독교의 신본(神本)에 위배되는 개념이 아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본디 모습을 찾으라는 명령이다. 그 동안 너무 물질과 허세와 숫자에 매달려온 우리였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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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환 2006-07-23 04:13:39(PM)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게되었습니다. 그러한 차이가 교회 내에도 존재함을 공감합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도 요약을 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물론 이 면이 기독교의 신앙과 교리에 서있는 분들이 읽으 것이라 보아 생략한 줄로 압니다만, 그래도 위의 글에서는 불교와 기독교가 같은 선상에 있는 종교에 지나지 않는 다원주의 느낌을 가지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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