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기독교상담소의 보석찾기 http://blog.kcmusa.org/kacc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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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잘 도울 수 있는가? 대학원 수업 중 한 과목에서 본인이 상담을 받아보고 그 경험을 리포트로 제출하는 과제가 있다. 어느 학생이 주변에 상담 전문가가 없어서 6개월 정도 상담을 공부한 교회 사역자에게 상담 요청을 하고 만났던 이야기를 리포트로 제출하였다.

처음에 경청하고 공감을 잘 해줘서 자신의 문제를 잘 상담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하고 문제를 내놓자 그 사역자가 몇 초 동안 빤히 쳐다보더니, 학생의 손을 잡고 “기도합시다.”라고 하면서 기도만 하고 나온 실망한 경험이었다. 이 이야기를 리포트에서 보고 너무 웃기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다. 도움을 기대하고 찾아온 사람에게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그 마음도 얼마나 답답하고 속상했을까! 그런데 왠지 익숙하지 아니한가? 이 서투른 상담자처럼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그저 기도하자고 하는 상황이 말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상담을 해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더욱이 어떤 종류이건 리더의 위치에 있다면, 본인이 원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상담을 해주기를 기대받는 위치에 있게 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누가 상담해 오면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한다. 어떻게 상담을 잘하느냐에 대해서는 월드미션 대학교 상담대학원에 들어오면 된다. 그러나 어떻게 잘 상담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어떤 상담자가 되어야 하는지, 왜 상담자가 되기를 원하는지가 상담을 잘하게 되는 과정을 기꺼이 견뎌내도록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상담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상담은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한다.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은 결국 하나님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마음이다.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항상 시선을 떼지 않으시는 분이다. 주변에 영적으로, 정서적으로, 또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이 보이는가?

기독교 상담자의 모델은 예수님이다. 상담자는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것일까?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상담자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그분의 사랑, 긍휼, 인애, 자비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모습들은 우리 모두 닮아야 하는 모습이지만, 그중에서 상담자에게 꼭 있어야 하는 모습을 몇 가지만 살펴보자.

예수님의 친구의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죄인과 세리, 창녀와 병자들의 친구다. 일반 사람들에게서 소외된 사람들, 다른 사람과 쉽게 동등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람들, 열등감과 수치감을 가진 사람들, 질병이 있는 사람들, 깨끗하지 않아서 깨끗한 무리에 낄 수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예수님은 정죄하거나 탓하지 않으시고 받아 주신다.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을 기꺼이 맞아 주실 뿐 아니라, 그들을 찾아 나서고, 함께 밥 먹고 이야기하고 사귀신다. 이것은 예수님의 수용하는 마음이다.

상담자에게는 이처럼 사람을 정죄하지 않고 수용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그 마음을 갖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다. 이처럼 정죄하지 않고 수용하는 마음이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더 상담자에게 필요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상담이라는 장면은 타락한 세상에서 죄인이 겪을 수밖에 없는 문제와 아픔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상담은 고상한 일이 아닐 수 있다. 상담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친구가 평생 한 사람도 없는 사람, 남을 이용해서라도 내 것을 이루려고 했던 사람, 이용당하기만 하던 사람, 삶의 의욕이라고는 없는 사람, 너무나 두려움이 많아 숨조차 잘 쉬지 못하는 사람, 센스가 없어서 늘 왕따를 당하는 사람,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직업을 가진 사람, 중독과 폭력이 있는 가정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 교양있고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로 둘러싸인 나의 일상에서는 잘 마주치지 않을, 상담이라는 다리가 없이는 만나지 못할 사람들이다. 내가 마주치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마주하겠다고 결단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또한 예수님이 당신의 사역을 우리에게 위임하고자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아파도 성숙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가? 상담을 공부하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본인의 영적 심리적 성숙이다. 남을 잘 돕기 위해 공부하는데 이 과정에는 계속해서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고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상담자는 자신의 성장이나 성숙에 열려있는 마음이 필요하다. 상담공부가 재미있고 즐겁지만, 때로는 아프다. 그 아픔이 없이는 상담자로서 성장할 수 없다. 하나님의 초대는 늘 풍성한 축복이 약속되어 있는데, 그 축복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에서는 나의 불순물들이 다루어져야만 한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 중에 자신의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은 사람이 있었던가!

스스로 자신의 이슈들을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고, 그것들을 다루어야 좋은 상담자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상담은 어떤 연장이나 수술 도구가 없이 상담자 자신만이 내담자와 마주하기 때문이다. 즉, 상담자 자신이 연장이고 수술 도구인 것이다. 수술 도구가 뭉툭해서 수술을 할 수 없으면 안 되듯이, 상담자는 단련이 되어서 예리해져야 한다. 스스로가 직접 예리한 하나님의 수술 도구이다. 마치 예수님 자신만이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도구이셨듯이, 상담자는 그렇게 내담자가 먼저는 자기 자신과, 그리고 타인과, 나아가 하나님과 화평을 얻도록 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예리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과정이 아프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이 또한 하나님이 마음껏 두 팔을 벌려 상담자로 부르시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당신은 누군가의 기도의 골방에 들어갈 수 있는 안전한 사람인가? 상담자는 누군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꺼내놓은 대상일 수도 있다. 그래서 상담은 기도의 골방과 같다. 이 골방은 문을 닫고 있는 밀폐된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상담이라는 골방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모든 것을 오픈하는 아주 넓고 큰 공간이다. 내담자의 과거와 무의식의 세계에서부터 지금 여기의 세계가 공존하는 무한하면서 유한한 공간이다. 몇 십 년 동안 묻어 두었던 마음을 열어 보는 공간, 자신도 몰랐던 무의식적 의도를 깨닫는 공간, 깊은 두려움을 마주하는 공간, 새로운 시도에 대한 불안이 느껴지는 공간, 혼란스럽고 아픈 데 그래도 누군가가 옆에 있기에 안전한 공간 말이다.

내담자들에게 이런 말을 종종 듣는다. “이 이야기는 누구한테도 해 본 적이 없어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들의 비밀을 들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그들의 골방에 함께 있는 그 사실이 너무나 소중한 특권이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다. 내담자가 자신의 문제를 이해하고 통찰을 얻고 그것을 진지하게 다루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 그런 내담자의 여행에 잠깐 동행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상담자에게 주시는 특권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골방에 함께 있기를 원하신다. 우리를 언제든 환영하시며, 마음을 부드럽게 만져주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원하시며, 통찰력을 가지고 문제를 직면하고 다루기를 원하신다. 상담자는 하나님 앞에 열려 있는 그 자리에 내담자와 함께 있어 주는 사람이다.


김화자 교수(월드미션대학 기독교상담학)
[한인기독교상담소 제공]
나르시시즘(Narcissism, 자기애)는 오비디우스(Ovid)의 신화, 변신(Metamorphoses)에 나오는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나르시스(Narcissus)가 자기도취에 빠진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자기애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는 프로이드(Freud)에서 시작해서, 대상관계 이론가들인 컨버그(Kernberg)와 코헛(Kohut)에 의해 발전되었다. 반면, 기독교 인류학자인 판넨베르크(Pannenberg)는 신학적 입장에서 자기애를 이해했는데, 베르그너(Bergner)가 이 두 입장을 통합적으로 접근하여 정리한 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프로이드는 자기애를 정상적(normal) 자기애와 병리적(pathological) 자기애로 구분했다. 더 세분해서 구분한 사람들도 있지만 컨버그와 코헛은 프로이드의 구분을 발전시켰는데, 정상적 자기애는 유아가 자기 필요와 욕구만을 먼저 채우고자 하는 현상인 데 비해, 병리적 자기애는 정상적인 자기애가 충족되지 못한 채 내면으로 들어가 버리게 되면 병리적인 자기애를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신만이 중요하고 다른 사람은 소위 안중에도 없이 대하게 되는데, 다른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으려 하고 그 주위에 있는 사람은 초라함을 느끼게 하는, 그야말로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판넨베르크는 자기애를 자연적인 현상과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이해했다. 자연적인 현상으로서 자기애는 프로이드가 말한 대로, 유아가 자기애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지극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반면, 그는 자기애가 유아기를 지나서도 자기 스스로 안전감을 계속 추구하고자 할 때 비정상이라고 보았다. 즉, 신학적으로 볼 때, 이는 죄로 인해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되면서 생긴 자기중심성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타락 이후 정상적인 자기애가 결국 비정상적인 자기애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단절로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그 죄의 영향 아래 태어난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 불안해하면서 자신을 소외시키게 된다고 하였다. 자기애라는 것이 자신이 받지 못한 사랑을 내면으로 가져가서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상태라면, 이는 곧 하나님과 자신과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킬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보았다.

건강한 자기애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지만, 병리적 자기애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 이해 대해 컨버그와 코헛은 자기애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거나 진솔하게 사랑할 줄을 모른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기애는 우울과 분노로 나타나고, 다른 정신 장애들과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판넨베르크도 이러한 이해에 동의하지만, 그는 자기애는 정상적이거나 자연스러운 것이 더는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타락 이후의 인간은 모두 자기 위주의 사랑을 갈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기애가 인간 본연의 보습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타락 이후 현재 인간의 본성으로는 자기애가 자연스럽다고 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원래 그런 모습으로 창조하시지는 않았다는 면에서는 본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자기애적인 특성은 하나님이 창조한 상태라기보다는 타락 이후 나타난 현상, 곧 죄 된 본성이라고 주장한다.

판넨베르크와 컨버그, 코헛은 인간 발달과정을 통해 이러한 원래의 인간성을 회복하도록 점차 성장해가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을 같이하지만, 치료에서는 의견을 달리한다. 정신 병리적 관점에서 자기애적 성격 장애는 자신의 독특성이나 능력에 대해 과장된 자신감과 성공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싶어 하는 성격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족하고, 자신을 위해서는 타인을 이용하기도 하며, 같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초라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유형의 사람들을 일컫는다. 판넨베르크가 주장하는, 죄의 본성을 가진 인간의 특성으로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기애와는 구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치료적 접근도 다를 수밖에 없다. 컨버그와 코헛은 그 과정을 상담이나 심리치료를 통해 관계가 회복되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지만, 판넨베르크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자기애가 치료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해의 차이는, 정신 병리로서 자기애를 보느냐 아니면 인간의 죄인 된 상태에서 오는 자기애를 보느냐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판넨베르크는 신학적 입장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누구나 자기애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보다 일반적인 인간 죄성의 차원에서 말한다면, 컨버그와 코헛은 그 기준보다 더 심한 경우의 정신 병리적 차원에서 자기애를 이해하고 치료적 접근을 이야기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프로이드, 컨버그, 코헛은 타락 이후 인간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유아기적 자기애에서 이해를 출발시켰다면, 판넨베르크는 타락 전과 타락 이후의 인간 본성을 비교하면서 자기애를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대상관계 심리학자들은 다른 사람의 사랑이 필연적으로 필요한 유아기의 자기 사랑이 정상이라고 보고, 유아기적 자기애가 만족하면 더는 자기애로 빠지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자기애로 빠졌을 경우 그 이후 인간관계에서 그러한 사랑의 경험이 있어야 자기 속으로 빠져버린 상태에서 나올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그 유아기적 자기 사랑조차 타락의 결과라고 보고, 그 유아기적 자기애는 사랑을 받는다고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인의 상태로 남아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인간은 유아기적 자기애가 만족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자기애적인 존재라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자기애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울 수 있다고 본다. 앞서 언급한 대로, 자기애를 어떤 차원에서 보느냐에 따라 의견이 달라지지만, 이 두 입장이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인간성의 한 단면이기도 한 자기애와 자기애적 성격 장애에 대한 두 접근 간의 유익한 대화로서 이해하길 바란다.


김화자 교수(월드미션대학 기독교상담학)
[한인기독교상담소 제공]
상담은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상처의 치유나 갈등의 해결, 변화와 성숙 등 다양한 목적과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상담의 의미를 영성의 측면에서 한 번 살펴보자.

유해룡에 의하면 “영성은 어떤 신령한 존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조물인 인간의 실재에 관한 것이다.” 그는 또한 기독교 영성의 목적에 대한 헬미니엑(Helminiak)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는데, “기독교 영성의 목적은 하나님께로 열려있도록 지음 받은 피조물인 인간이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신의 영역, 즉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기 위한 고전적 영성훈련으로 헨리 나우웬은 마음의 훈련, 책의 훈련, 공동체의 훈련을 제안하였다. 마음의 훈련은 자신에 대한 내적 통찰을 얻기 위함이고, 책의 훈련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훈련을 말하며, 공동체의 훈련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훈련이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위한 영성은 자신의 내면세계에 대한 심리적인 통찰을 요구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가려낼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대인관계를 들여다보고 성숙을 이루는 과정이 필요하다. 영성은 이 모든 과정 자체가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드러나도록 하는데, 상담은 바로 이 과정을 돕는 일을 한다.

영성훈련은 바로 자신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자신에 대해 잘 아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흔히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본인도 모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막12:30, NIV) 온전히 드리기를 원하시는데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가 온전하지 못하다.

하나님은 너무나 진실하시고 참되시기에 우리의 참모습을 이미 아시고 그곳에서 우리를 만나시기 원하시는데, 우리의 참모습은 우리 자신도 대면하기 싫은 모습일 경우가 허다하다. 상담은 이러한 대면하기조차 싫은 우리의 모습을 깨닫게 하고 보게 하고 다루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깨어지고 상처 난 모습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도 그러한 자신의 참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고, 나아가 하나님이 다스리도록 할 수 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피조물”로서(고후5:17)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려면 반드시 우리의 연약함이나 상처를 포함한 참모습과 대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만나 치유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다. 부활 후에 만난 베드로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을 때도(요21:15-17),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을 만나셨을 때도(요4:16-18),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을 만나셨을 때도(삼하12:1-15), 다메섹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셨을 때고 그렇게 하셨다(행9:1-9).

영성은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하나님과의 깊고 친밀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 되는 일치를 이루고자 하는데, 이는 특히 기도(묵상기도, 관상기도 등)와 말씀(묵상, 영적 독서 등)을 통해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

순종을 통한 온전한 일치를 위해서는 신뢰의 부족, 불안과 조급함, 나 중심의 생각(self-entitlement), 삶의 통제권,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지각, 자기의(義) 등 방해요소들을 분별해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들을 해 볼 수 있다. 나는 정말로 내 삶을 다 맡길 수 있으리만큼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은 사랑과 기쁨과 평안임에도 나는 왜 두려워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자기 성찰과 통찰이 없이는 찾아내기 어렵거나 감당하기가 어려워 찾는 작업을 아예 시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온전한 순종으로 “거룩한 산 제사”(롬12:1)를 드리기 위해서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불순물을 분별하는 훈련이 요구되며, 그 훈련의 과정에 심리적인 통찰이 도움된다. 상담을 통해 불순물에 대한 성령의 조명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를 더할 수 있다.

요약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 속에 변화를 시작하셨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어가는 과정, 즉 영성훈련은 예수님이 그러했듯이 이미 변화를 시작하신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열어 맡기는 훈련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상담은 이러한 영성훈련의 과정에 필요한 작업들에 통찰을 제공하고 그 깊이를 더할 수 있도록 한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겠다.


김화자 교수(월드미션대학 기독교상담학)
[한인 기독교 상담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