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로의 신앙수필 http://blog.kcmusa.org/fullelderkim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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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수록 너나없이 종합병동이 되어간다. 안타까운 일이다. 안 아픈 데가 없으니 그냥 모른 체하며 지낼 수도 없다. 병을 적처럼 두려워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통과 아픔에 맞서 외로이 싸울 때 누군가 조용히 와서 기쁨의 빛을 비춰줄 수 없을까.

누군가 “병은 ‘적’이 아닌 그냥 ‘메시지’”라고 했다. 병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병은 때론 날씨 예보처럼 찾아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예보를 지나치게 된다. 그리고 며칠씩 무리해가며 일하거나, 몸살감기로 몸져눕고서야 후회한다. 몸이 원하는 만큼 쉬도록 허락하고, 나을 때까지 돌봐줘야 한다. 병은 또 예고 없이도 찾아오기도 한다. 뜻밖에 화상을 입거나 사고를 당하면 치료하느라 허둥댄다. 우리가 고통이나 아픔조차 못 느끼면 정상이 아니다. 고통은 무척 자연스러운 방어기제다. 끼니를 건너뛰면 배가 고픈 것도, 밤이면 잠이 쏟아지는 것도 똑같은 기제의 병이다. 아픈 것은 숨 쉬는 것과 같이 지극히 정상적인 삶의 일부분이다. 사람은 아프지 않고 살아갈 수가 없다. 몸과 마음에 딸린 부품이 워낙 많아서다. 고장이 잦다보니 늘 고치며 살아가야 한다. 건강은 잠시일 뿐 평생을 아프면서 살아간다.

사도 바울은 ‘간질’로 추정되는 병을 앓았다. 처음에는 ‘적’으로 여겼기에 자기를 찌르는 ‘가시’라 했고, ‘사탄의 하수인’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바울은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면서 전도활동을 했던 탁월한 권능의 사도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에서 낫고자 찾아왔는데 그들 앞에서 정작 자기 병은 고치지 못하고 쓰러지곤 했다면 얼마나 난감했을까.
바울은 하나님께 자기 병을 낫게 해달라고 세 번이나 간청하였지만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며 응해 주지 않으셨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곧 이어 그는 자기 병이 ‘적’이 아닌 정말 ‘메시지’였음을 고백한다. 그는 박해받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심한 모욕과 궁핍과 곤란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면서 그는 깨달았다. ‘사람은 약할 그때에 오히려 가장 강하다’는 것을……. 바울의 이 고백은 지난 2천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다시 일으켜 주었는지 모른다. 몸이 아픈 사람이든, 마음이 아픈 사람이든 말이다. 신앙인이 아니라도 잘 안다. 아프고 나면 더욱 성숙해지고 강해진다는 것을……. 이렇듯 아픔에 대한 그의 성찰과 실증적 해석은 많은 이를 위로하는 공감의 메시지가 됐다.

병을 친구로 여겼던 이들은 의외로 많다. 오래 병을 앓다보면 많은 걸 깨닫는 게다. 병은 처음에 불청객으로 와서는 쉼을 강요하였지만 생의 외경畏敬까지 터득하게 했다. 병은 적이었지만 정도 들어서 애증의 친구관계로 발전하게 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고통이 모두에게 다 친구 같거나 메신저 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길고 처참한 병고로 인해 가족들마저 피폐해지는 것을 보고 더 고통스러워한다. 치료가 되었어도 투병은 전쟁 같아서 상흔이 그대로 심리적, 정신적 고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병으로 실명하기라도 하면 평소에 보고 즐기던 것들을 모두 포기하게 돼, 절망감으로 우울증에 또 다른 고통을 겪게 된다.

에릭 카셀은 의학이 앞으로는 질병만의 극복이 아닌 환자의 ‘고통’을 좀 더 근본적으로 접근해 치유하도록 권고한다. 아픈 이들을 위한 사회적 관심과 참여가 더욱 요구되는 것이어서 도우미와 친구, 교우들이 나서야 한다고 한다. 치료 이후에 몰아닥칠 폭풍을 잠재우는 유일한 처방임은 물론이다. 성경에서 욥과 친구들의 예를 보자. 욥은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고 자신마저 중병이 들자, 하나님께 고통을 호소하며 부르짖는다. 이때 친구들이 위로하겠다고 찾아와서는 욥의 마음을 더 상하게 한다. 친구 셋이서 욥에게 왜 그런 불행이 왔는지를 꽤나 전문적으로 잘 분석해서 설명해 주었다. 마치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고 자신마저 불구가 된 사람에게 위문을 와서는, 차량 점검의 중요성과 안전운전 요령을 잘 설명해 주는 식의, 요샛말로 ‘팩트 폭행’을 가한 꼴이었다. 친구들의 조언이 당시 신앙과 가치관으로 보면 맞는다 해도 그런 설교는 ‘숯불에 기름 붓기’였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같이 아파해 주고, 말없이 손잡고 같이 눈물을 흘려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선언하셨다. 욥은 옳고 친구들은 그르다고. 아픈 마음에는 이해와 공감의 눈물이 무엇보다 명약이다.

카셀은 환자들의 고통은 상대적이라고 한다. “환자들은 전혀 고통스러울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고통스러워하고, 매우 고통스러울 것 같은 상황에서는 담담해 한다. 어떤 사람은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 괴로워할 때 그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사회적 사명감에서 동참한다면 실질적으로 그들의 고통을 감소시킬 수 있음을 뜻한다.
우리는 모든 어머니들이 겪는 고통이 상대적인 것임을 안다. 자신의 살이 찢기는 고통도 쉽게 잊는 것은, 아기도 온 힘을 다해 세상 밖으로 나왔음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해산의 고통은 엄청나지만 고뇌하는 산모는 거의 없다. 큰 기쁨에 아픔이 치유되는 것이다.

로마시대의 십자가는 인간이 가장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도록 고안한 형틀이다. 그 고통을 예수도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를 피할 수는 없는지 하나님께 간청했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인 그분에게 “아프냐? 나도 아프단다.”라는 말씀조차 못하고 외면하셨다. 그 후 인간 예수는 어떻게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을까? 성경에 이르기를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라고 했다. 그것은 고통 뒤에 오는 ‘다시 태어날’ 인간, 그로 인한 큰 기쁨 때문이었다. 갓 낳은 아기를 품에 안은 산모의 행복한 웃음을 상상해 보라. 예수는 그런 산모와 꼭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자. 주님은 어둠속에서 고통 받고 아파하는 사람들 곁에서 다 함께 기쁨의 빛, 치료의 광선을 비추자고 우리를 부르신다.



글쓴이: 김장진 장로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원
예심장로교회 사역장로
전 국토해양저널 발행인